런던행 비행기에 탑승하며
K, 지난번 편지에서 저는 새로운 장소로 떠나기 위한 준비 모습을 당신에게 공유했습니다. 오늘은 지원한 대학원에 합격한 이후부터, 런던행 비행기를 타는 순간까지 생각하던 생각의 조각들을 당신에게 공유하고자 합니다.
사르트르는 ‘우리는 우리가 한 선택들의 집합이다.’라고 정의했습니다. 그렇다면 그때 제가 한 유학이라는 선택은 지금의 저라는 존재를 향해 가는 하나의 분수령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선택은 직전 편지에서 언급한 것처럼, 이를 현실화하기 위하여 취한 작고 사소한 습관을 쌓기 위한 선택들 (영어공부, 규칙적인 생활, 저축, 그리고 불필요한 인간관계에 얽매이지 않는 자기중심적 생활 등)이 누적되어 나타난 결과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기에 중요한 것은 합격자 발표가 난 순간부터 제가 퇴사를 통보하고 저의 첫 직장에서의 생활을 스스로 정리하기 시작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지금도 그때를 돌아보면, 당시 저의 퇴사라는 선택은 수동적인 삶으로부터 주체적인 삶으로의 전환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비록 회사는 수직적이었고, 변화와는 상관없는 모습으로 돌아가고 있었지만, 그 말이 곧 함께 일하는 사람들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으로 이어지지는 않았습니다.
외려 그러한 조직 속에 있으면서도, 저는 너무나도 넉넉한 인심과 삶에 대한 여유를 지니고 있는 분들과 함께 일할 수 있는 행운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비록 사고의 유연함과 혁신성 등과 같은 성장을 위한 사고방식을 지니지는 않았지만, 좋은 직장의 이웃이자 어른으로서 배울 것이 있는 분들이었으니까요.
그렇기에 퇴사라는 선택은 조직생활에 대한 부적응으로 인한 현실 도피와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그보다는 내 인생은 온전히 나의 것이어야만 한다는 인식의 발로였습니다. 마르그리트 유르스나르는 그러한 삶의 태도를 그녀의 소설인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회상록’에서 다음과 같이 표현했습니다.
“나의 행동은 정녕 나를 닮아야 한다. 왜냐하면 나의 행동은 나를 재는 유일한 척도요, 사람들의 기억 속에, 혹은 심지어 나 자신의 기억 속에도 나를 묘사해 넣는 유일한 수단이기 때문이며, 죽음의 상태와 삶의 상태 사이의 차이를 이루는 것이 아마도 바로, 행동으로써 자신을 표현하고 변화시키기를 계속할 수 있는가 없는가의 여부이기 때문이다.”
한국에서의 생활을 모두 정리한 저에게 남은 것은 이제 무거운 캐리어 가방 두 개와 배낭 그리고 런던 히드로 공항으로 떠나는 비행기표 한 장이었습니다. 가족들의 배웅을 받으며 떠나면서 저는 가급적 돌아오지 않고 새로운 세상에서 정착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습니다. 저를 배웅해주던 어머니도 기왕에 나가게 된 거, 현지에서 정착해서 살아볼 것을 권하시면서 응원한다고 하셨지요. 이렇게 저는 오랫동안 잠자고 있던 꿈을 깨우고, 더 넓은 세상을 향해 나가게 되었습니다. 그때는 제가 이렇게 다시 서울로 돌아와 당신에게 편지를 쓸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지만요.
이제 당신에게 매주 쓰던 긴 편지를 런던으로 향하는 순간을 마지막으로 줄입니다. 그 이후의 행적은 당신이 너무나도 잘 알고, 당신의 비범함에 제가 어느 정도 함께하는 모습도 있기에, 이러한 장문의 글보다는 즐겁게 술잔을 기울이면서 이야기를 나누는 것으로 대체할까 합니다.
날씨는 많이 춥고, 세상은 언제나 그렇듯이 혼란스럽습니다. 조심하고 또 조심하며 하루하루 의미 있는 성취와 함께 하시길 바라며 이만 줄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