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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elix Park Aug 28. 2023

생각의 조각들 34

틈틈이 글쓰기

https://www.youtube.com/watch?v=m0Tve24ezNQ



1. 글쓰기의 위안


울적함이 감돌 때는, 무언가 잘 풀리지 않고 삶이 고단하다고 느껴질 때는 위안을 주는 글들을 읽는다. 그렇게 해도 그 감정의 응어리가 풀리지 않을 때는 냉장고에 있는 맥주를 벗하여 조곤조곤 달래도 일찍 잠든다. 그러나 때로는 그렇게 해도 잠이 오지 않고, 맑은 정신으로 그 울적함을 마주 봐야만 하는 때가 있다. 


그럴 때는 심리적 동요가 없을 때는 잊고 있던 블로그를 오랜만에 열어본다. 늘 그렇듯이, 꾸준히 글을 쓰는 행위는 운동과 같으며 그것이 곧 작가로 가는 열쇠라는 플랫폼의 안내가 먼저 눈에 띈다. 


잠시 그 안내 메시지를 곱씹으며, 내가 과연 그 정도로 꾸준히 글을 쓰면서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에 대하여 고민한다. 내가 글을 쓰는 이유는 결국 온전히 나 자신을 위하여 남기는 글이건만, 왜 넓고 넓은 세상의 한 모퉁이에도 관심을 가져주는 것일까? 아니지 반대로 말하면, 온전히 너를 위한 글인데 왜 굳이 블로그를 쓰는 것인가? 그저 종이와 연필이면 충분한 것 아닐까?라는 이런저런 생각이 머리에 감돈다.


'어쩌면 우리가 온전히 홀로 있을 수 없는 존재이기에 우리는 모두 자신만의 흔적을 남기는 것일지도 모른다.'라는 궁색한 변명과 자기 위안과 함께 키보드에 손을 올리고 의식의 흐름에 맞춰서 글을 쓴다. 


온전히 나 자신을 위한 글을 남기는 공간


2. 쇼펜하우어의 행간과 사유


쇼펜하우어는 행간에 울부짖음이 느껴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철학이 아니라고 했다. (정확한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분명한 건 최근에 그의 책을 읽으면서 과거와는 매우 다른 정서적인 경험을 받았다는 것이다. 과거에는 그의 책을 훌륭한 사고방식과 논리적 흐름의 귀결이라고 읽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의 글에서 다른 것이 보인다. 이제는 그의 글에서 일평생 뜻대로 되지 않은 삶에 대하여 고통받은 무던하게 무언가를 넘기면서 수긍하거나 혹은 예민하지 않았다면 인지하지 못했을 (모르는 게 약이다) 수없이 많은 부정적인 것들에 대한 슬픔이 너무나도 깊게 느껴진다. 다른 이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예민하게 느끼고 앞날을 볼 수 있었던 그에게, 헤겔과는 너무나도 다른 존경보다는 비교와 조롱이 더 익숙했던 그에게는 철학은 스스로를 승화하는 작업이 아니었을까.


(물론 오랜 세월 살아가면서 말년에는 나름 인정받았지만, 나는 아직 쇼펜하우어만큼 나이 들지 않았으니 젊은 날에 그가 겪은 고통에 눈이 먼저 간다.)


아픔을 모르는 기쁨은 존재하지 않는다. 패배와 좌절 없이 행복은 우리를 방문하지 않는다. 시련의 눈물 없이 웃음에 가치가 매겨지지 않는다. 아픔을 통해 배우지 않은 모든 것이 거짓이다. 적어도 “인생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서 그러하다. 그 질문에 대한 모든 대답이 아픔이다.

너는 이제 아픔으로 인하여 남보다 더 성숙해지리라. 나무는 빗물을 마시고 자라며, 인간은 자기가 흘린 눈물로 갈증을 해소한다. 후회하지 말고 눈물을 거둬라. 네가 스스로 진실을 선택하게 될 때까지 씨앗을 뿌리고 삶의 밭을 일궈라.

아름다움은 상처 입은 가슴만이 발견할 수 있다. 그 벅찬 기쁨을 위해 아름다움은 저렇듯 신비한 모습으로 나의 이마 위를 떠돈다. 누구나 한 번쯤은 인생에서 동요를 느낄 때가 있다. 항구를 출발한 배는 필연적으로 파도를 거슬러야 한다. 인생도 마찬가지다. 태어남은 동요를 수반할 수밖에 없다. 흔들리지 않는 것은 인생이 아니다. 의심이 가지 않는다면 신앙이 아니다.

- 쇼펜하우어, 당신의 인생이 왜 힘들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中 -


세상은 당신의 슬픔에 무심하고, 우리 모두는 각자 자기 자신의 고민에 함몰되어 타인의 슬픔에 신경 쓸 겨를이 없다. 그렇기에 이안 플레밍의 소설 속 베스퍼 (007의 그녀가 맞다)는 그래서 결국 우리 모두는 섬이라고 표현한 것이리라.



3. 사유와 철학, 그리고 고통받는 존재


그러나, 그 가운데서도 타인의 비통함과 슬픔에 가끔은 눈이 가는 사람이라면, 아마도 쇼펜하우어의 적나라한 슬픔과 그의 독설 안에 담긴 위악적인 모습에 공감과 함께 슬픔을 느낄 것이라 믿는다. 그런 이들은 결국 각자 자기 자신만의 사유에 기초하고, 그 사유가 무엇일까 고민하며 '철학'이라는 심술 맞은 학문에 관심을 가지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든다.


좋든 싫든 한 번 철학이라는 영역을 들어온 순간 다시는 과거로 돌아갈 수 없다.


신기한 것은 철학이라는 영역으로 우리의 사유가 확장되고 이를 도구로 활용하는 순간 우리는 결코 과거로 돌아갈 수 없다. 어쩌면 창세기의 아담과 이브가 맛본 선악과가 바로 이런 것일지도 모른다. 이미 한 번 맛본 이상 아무렇지도 않은 삶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선악과를 맛본 아담과 이브가 신으로부터 쫓겨난 존재가 되는 순간부터 그들은 스스로 모든 것을 일궈내는 삶으로 옮겨졌다.


그 의미는 단순히 그들이 먹고 마시고 자는 것을 스스로 해결해야 함을 의미하는 것만은 아니리라. 과거로 돌아갈 수 없음의 또 다른 의미는 다른 존재들과 다르게 끊임없이 스스로를 채찍질하며 그 사유를 더 이상은 멈출 수 없고, 그 사유를 지속적으로 확장하고 성장시키지 않는 한 영원히 고통받는 존재로 거듭남을 의미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물론 철학은 고통을 준 만큼 이를 수행하는 이들에게 혜택도 주는 듯하다. 삶의 고난은 결코 당신만이 겪는 것이 아니라고, 넓고 넓은 세상을 조금만 둘러보면 당신의 고통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더 불행한 이들은 언제나 있을 것이니 스스로를 객관화해서 인식하면 생각보다 당신은 괜찮은 삶이라고 알려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고의 프로세스 그 자체가 바로 내면의 고통이 휘몰아치는 시발점이 아닐까 싶다. 차라리 몰랐으면, 속 편하게 남 탓을 하고 세상과 더 높은 존재 (신이든 무엇이든.)를 원망하는 단순한 사고방식으로 살 수 있었을 테니까. 


하지만 이제 더 이상 당신은 그러한 책임전가를 할 수 없다. 당신은 그저 슬픔을 삼키고, 넘어진 그대를 스스로 일으켜 세워 먼지를 툭툭 털고 다시 걸어야 한다. 좋냐고? 좋을 리가, 괴로움에 더불어 씁쓸함까지 붙는 것이 이러한 사고방식의 결과가 아닐까 싶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이제 당신은 과거로 돌아갈 수 없다. 그저 묵묵히 일상의 소소함에서 다시 행복 (행복이 뭔지는 이제 잘 모르겠다만)을 찾고자 노력하고, 해야 할 일을 하는 의무감으로 자신을 밀어 넣는 것 밖에 남지 않았다. 그리고 삶의 위안이 될 무언가를 찾는 여정으로 다시 배의 키를 돌릴 뿐이다. 언젠가는 당신도 어딘가에는 안착하여 그때는 그랬지라고 스스로를 돌아볼 수 있기를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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