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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짓는약사 Dec 28. 2021

당신만의 19호실이 있나요?

'19호실로 가다'라는 도리스 레싱의 단편소설이 있다. 주인공 수전의 집은 빈 방이 남아돌고 정원까지 달린 커다란 저택이지만 아내나 엄마가 아닌 온전한 그녀 자신으로 존재할 공간은 없다.


그래서 수전은 친구를 만나러 간다고 거짓말을 하고, 시내의 한 호텔방을 자신의 안식처로 삼아 주기적으로 드나든다. 특별한 무언가를 하는 것은 아니다. 그녀는 거기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저 멍하니 앉아 있다가 집으로 온다. 다만 어떤 역할인로서의 압박에서 벗어나 혼자만의 공간에서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는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호텔을 드나든다는 사실을 남편이 알게 되자 그녀는 외도를 했다는 거짓말까지 하며 그 공간을 지키려고 한다.


사실 처음에는 수전의 행동이 잘 이해되지 않았다. 굳이 외도를 했다는 거짓말까지 할 필요가 있었을까, 라고 생각했다. 아무도 모르는 그녀의 유일한 안식처였던 공간이 변질되었다고 느껴서였을까. 아니면 자신의 행동을 이해받기 위해 구차한 변명을 하기보다는 차라리 거짓말을 하는 게 낫다고 생각해서였을까.


어느 쪽이든 누군가의 아내나 엄마가 아닌, 온전한 자기 자신으로 존재할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을 가지기 위해 절박한 마음으로 19호실을 찾았을 그녀가 안쓰러웠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혼자만의 공간이 필요하다.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도 타인과는 공유하고 싶지 않은 자기만의 공간이 있다는 뜻이다. 이는 수전이 찾던 19호실처럼 실재하는 공간일 수도 있고, 타인에게 밝히고 싶지 않은 혼자만의 비밀일 수도 있다.

  



'섹스앤더시티'의 여주인공 캐리는 사랑하는 남자 빅과 결혼하지만 막상 결혼을 하고 나니 꿈에 그리던 결혼 생활이 아님을 느낀다. 잠깐씩 만나 시간을 보내는 연애와는 달리 결혼은 24시간, 모든 일상을 공유하는 '생활'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캐리는 잠시 빅에게서 떨어져 결혼하기 전 혼자 살던 아파트로 간다. 그곳에서 혼자였을 때처럼 여유를 느끼며 글 쓰는 작업도 하고 혼자만의 시간을 보낸다. 그리고 그 시간을 통해 오히려 빅과의 관계가 더 돈독해진다. 그 장면을 보며 결혼을 하더라도 혼자만의 공간, 혼자만의 시간은 꼭 필요하겠다는 생각을 했다.



사람은 혼자서는 살 수 없는 사회적 동물이지만 혼자만의 공간, 혼자만의 시간이 있어야 온전한 자신으로 존재할 수 있다. 사람마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그러한 공간과 시간이 꼭 필요함은 분명하다. 나 역시 그런 시간을 갖지 못하면 나도 모르게 마음이 뾰족해지고 사람들 속에 있어도 행복하지가 않다.


누구나 자신만의 19호실에 있는 시간들을 통해 좀 더 자기다워지고, 좀 더 단단해지며, 그리하여 다른 사람들과 연결되어 살아갈 힘을 갖게 된다.  




한편 '완벽한 타인'이라는 영화에서는 타인에게 밝히고 싶지 않은 비밀로서의 19호실에 대해 다룬다.


오랜만의 커플 모임에서 그중 한 명이 저녁을 먹는 동안 게임을 하자고 제안한다. 테이블에 휴대폰을 모두 내어놓고 각자의 휴대폰에 오는 전화, 문자, 카톡, 이메일 모든 것을 공유하는 것이다. '각자의 19호실'의 결정체인 휴대폰이 울릴 때마다 흐르는 묘한 긴장감과 더불어 밝혀지는 충격적인 비밀들.

 


사람은 누구나 세 개의 삶을 산다.
공적인 삶
개인의 삶
그리고 비밀의 삶

'차라리 모르고 살았다면 더 행복하지 않았을까?'라고 생각되는 사실들을 서로가 알게 되면서 영화는 파국으로 치닫는다.


이 영화를 보며 아무리 가까운 사이일지라도 섣불리 서로의 19호실을 공유하는 것은 현명하지 않다는 생각을 했다. 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라면 내보이거나 받아들이기 힘든 사실이 있을 수 있고, 그로 인해 관계가 깨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친한 사이라 해도
적당한 거리를 유지해야 한다.

아무리 친하고 사랑하는 사이라도
그 사람이 허락하지 않는 한
그 사람의 개인 영역을
침범하지 말아야 한다.

상대가 누구든 너무 멀지도 않게,
너무 가깝지도 않게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라.

이민규 <생각의 각도>


아무리 친한 사이라도 서로 모든 것을 알고 공유할 필요는 없다. 따라서 상대가 허락하지 않는 한 불쑥 그 사람의 19호실 문을 열고 들어가려 하지 말자. 건강한 관계를 위해서는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는 것이 필요하다.


나의 19호실이 존중받기를 원한다면 상대의 19호실도 존중해주자. 온전한 자기 자신으로 존재할 수 있는 그 공간이 지켜져야 함께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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