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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짓는약사 Jan 19. 2022

퇴사 후 월급 대신 얻은 것

그저 바다를 바라볼 수 있는 여유

오랜만에 1박 2일로 가족 여행을 다녀왔다. 다 같이 시간을 맞추기도 힘들뿐더러, 코로나가 오고 나서는 여행 자체를 거의 가지 않았기 때문에 정말 오랜만의 여행이었다. 어디를 갈까 고민하다가 일몰이 좋다는 변산반도 부안으로 가기로 했다. 동해나 남해 쪽은 가보았지만 서해는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어서 무척이나 기대되었다.


직장생활을 할 때는 연차가 없어서, 1박 2일 여행을 가려면 선택의 여지없이 주말에 가야만 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제약이 없으므로 일요일에 출발하여 월요일에 돌아오는 일정으로 잡았다. 가급적이면 사람이 붐비지 않을 때 가고 싶어서였다.




1박 2일 여행 코스 중 가장 좋았던 곳은 숙소 근처에 있는 바다 뷰의 카페였다. 전면이 통유리로 되어 있어서 자리에 앉아 겨울 바다를 감상할 수 있는 곳이었다. 우리는 기다란 테이블과 좌식 의자가 있는 곳에 앉았는데, 마침 바닥이 온돌방처럼 뜨끈뜨끈해서 더 좋았다. 자리에 앉는 순간 차가운 겨울바람에 얼어있던 몸도 스르르 녹고, 따뜻한 커피를 한 모금 마시 마음도 따뜻하게 데워지는 느낌이었다.



우리가 앉았던 자리


바닥의 뜨끈한 온기를 즐기며 아무 말 없이 고요하게 앉아 다 같이 바다를 바라보는 시간이 무척 좋았다. 바닷물이 밀려오고 파도가 부서지고, 또다시 밀려오는 것을 그저 바라보았다. 마치 시간이 멈춘 듯, 아무 생각도 안 나고 머릿속의 모든 근심이 사라지는 느낌이었다. 마음이 편안했다.


파도가 치면서 생긴 포말 중 일부가 거품이 되어 공중에 둥둥 날아다녔다. 이제껏 바다를 보러 다녔지만 한 번도 본 적 없었던 광경이었다. 부모님 역시 이런 건 처음 본다며 신기해하셨다. 큰 비누 거품 같기도 하고, 구름 조각 같기도 하고, 바람에 날리는 눈송이 같기도 했다. 창 밖을 내려다보니 서너 살쯤 되어 보이는 꼬마가 그 거품을 잡겠다고 손을 내저으며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절로 미소 지어지는 풍경이었다.


카페는 뷰가 좋은 곳이라 사람이 많을 줄 알았는데 일요일 저녁이라 그런지 생각보다 한산했다. 그나마 있던 사람들도 저녁 식사 시간이 가까워지자 하나 둘 나갔고, 우리 가족만 남아 주위가 조용해졌다. 일요일 저녁이기에 느낄 수 있는 고요함, 다음날 출근하지 않아도 되기에 누릴 수 있는 작은 사치였다.


"아들이 가까이 있고 딸이 쉬니까 이렇게 여행도 오고 너무 좋네."

창밖을 바라보던 엄마가 한마디 하셨다.

"그렇지~~ 이렇게 놀러 다니려면 내가 계속 쉬어야겠지?ㅋㅋ"

나의 장난기 섞인 말에 엄마가 부드럽게 눈을 흘기며 웃는다.

"그래도 그건 아니지~~!"

그 말에 다 같이 한바탕 웃었다.


날씨가 흐려서 기대했던 일몰은 볼 수 없었지만, 여유롭게 겨울 바다를 바라보며 가족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어서 행복했다.


사람이 없을 때 찍어본 사진


예전에는 가끔 있는 공휴일이나 주말에 여행을 갔기 때문에, 어딜 가도 사람이 많았고 나 역시 바쁘게 움직였다. 주어진 시간 동안 최대한 많은 곳을 둘러보고 방문했다는 증거물을 남기듯 사진도 열심히 찍었다. 효율을 중요시하는 습관은 여행을 가거나 놀 때도 어김없이 발휘되어, 짧은 시간에 최대한 많은 것을 보고 즐기려고 했다.


물론 많은 곳을 둘러보고 열심히 사진을 찍는 여행도 즐겁기는 했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항상 무언가에 쫓기듯 바쁘게 다녔기 때문에, 그 시간 자체를 온전하게 누렸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남는 건 사진뿐이라고 하지만, 카톡 프사에 올릴 가장 예쁜 사진을 고를 때 빼고는 사실 다시 찾아보는 일도 거의 없었다.


그 순간의 분위기, 피부에 와닿는 공기, 내 눈으로 보는 색감, 내 손으로 느끼는 촉감, 바람에 실려오는 냄새 같은 것은 사진으로 담을 수 없다. 온전히 그 순간을 만끽하며 내 기억 속에 저장해두어야만 다시 꺼내볼 수 있는 것들이다. 하지만 예전의 나는 그런 여유가 없었다. 미션을 완수하듯 정해진 장소에서 빨리 사진을 찍고 다음 장소로 이동해야 된다는 강박이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의 나에게는 여유가 생겼다. 앞으로도 시간은 충분하고, 그동안 원하면 언제든 여행을 갈 수 있다는 생각이 나를 여유롭게 해 주었다. 그래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한가로이 바다만 바라보고 있어도 행복했고, 가족들과 함께 누릴 수 있는 그 시간이 감사했다. 어느새 여행을 할 때 효율을 따지기보다 그 순간에 빠져있는 나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저녁노을을 바라보고 있자니 초조한 기분이 들었다. 해가 지려면 아직 한 시간 정도 남았고, 브리다는 말할 것도, 묻고 이야기할 것도 많았다.
그녀는 무언가를 바라보며 가만있을 때마다, 해야 할 일과 만나야 할 사람을 내동댕이쳐둔 채 소중한 시간을 낭비하고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그녀는 언제나 좀 더 효과적으로 시간을 쓸 수 있을 텐데, 하고 생각했다. 아직도 배울 게 너무 많았다.
그런데 태양이 지평선 가까이 내려올수록, 구름이 황금빛 광선과 장밋빛으로 물들어갈수록, 브리다는 그동안 치열하게 살아왔던 것이 이렇게 하루쯤 앉아서 저녁노을을 감상하기 위해서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파울로 코엘료 <브리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한가로이 앉아 바다를 바라보는 시간을 가진다는 것. 효율을 중요시하는 예전의 나라면 아마 그럴 수 없었을 것이다. 잠깐 앉아있더라도 머릿속으로는 다음에 갈 곳을 떠올리고, 커피를 다 마시기 무섭게 일어나 바쁘게 이동했을 테니까.


그런데 그날, 아름다운 겨울바다를 바라보며 나 역시 브리다와 같은 생각을 했다.

'그동안 치열하게 살아왔던 것이 이렇게 하루쯤 앉아서 겨울바다를 감상하기 위해서가 아니었을까'라고. 


퇴사 후 나는 여유를 얻었다. 매달 정해진 날짜에 꼬박꼬박 들어오던 월급은 이제 없지만, 대신 그저 바다를 바라볼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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