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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짓는약사 Jun 01. 2022

반찬가게 매니저가 되다

엄마와 이모가 반찬가게를 시작했다. 퇴사 5개월 차, 나는 반찬가게 매니저가 되었다.


엄마와 이모가 들떠서 이리저리 가게를 알아보러 다닐 때 솔직히 나는 말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결혼 후 30년이 넘는 세월 동안 가족들 식사를 책임지느라 고단 했을 텐데, 굳이 그 힘들고 귀찮은 일을 장사까지 하면서 할 필요가 있겠나 싶었다. '오늘은 또 뭘 해 먹어야 되나'하는 끼니 걱정이 '오늘은 또 뭘 만들어서 팔아야 되나'로 바뀔 뿐이니 말이다.

 

하지만 음식 솜씨에 나름 자부심이 있는 엄마에게 반찬가게는 오랜 꿈이었다. 그동안은 혼자 시작해볼 엄두가 나지 않아 생각만 는데 이모가 같이 하겠다고 나서 용기를 얻으신 모양이었다. 때마침 이모가 사는 아파트 상가에 빈 가게가 나왔고 물 흐르듯 일이 진행되어 2주 전 반찬가게를 개업했다. 하필이면 이때 휴직 상태인 나는 당연하게도 개업 준비에 동원되었고, 어쩌다 보니 요즘 매일같이 반찬가게로 출근을 하고 있다.


요즘에는 무엇보다 SNS 홍보가 중요하다는 말을 듣고 온 이모가 나에게 특명을 내렸다. 네이버와 카카오맵에 업체 등록하기, 지역 카페에 홍보글 올리기, 네이버 밴드 만들고 관리하기까지 모두 내가 해야 되는 일이었다.


나도 이때까지는 누군가 만들어 놓은 가게 정보를 이용하는 소비자을 뿐, 정보를 만드는 생산자의 입장이 되어보는 건 처음이라 하나씩 해보면서 배웠다. 언젠가 내 약국을 오픈하면 도움이 될 경험이라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알바가 해야 되는 일이 너무 많지 않냐고 투덜대자 이모는 '매니저님'이라는 직함까지 붙여주며 나를 구슬렸다. 그렇게 나는 반찬가게 매니저가 되었다. (그래 봐야 현실은 무급 극한 알바지만...)


"배달음식은 지겹고 반찬 만들기는 힘드시죠?"


의문문으로 시작하는 공감 유발 멘트, 가게 홍보를 위해 내가 생각한 첫 문장이다...ㅎㅎ




요즘 나의 하루 일과는 이러하다.


1. 오전 10시쯤 출근을 한다. 가게 오픈은 11시지만 그전에 가서 오픈 준비를 도와야 하기 때문이다. 우선 그날의 반찬 목록을 확인하고 손글씨로 가격표를 적는다. 깨끗하게 인쇄를 하면 더 좋겠지만 아직 초기라 그럴 정신까지는 없다. 하지만 아날로그식 가격표도 나름 정감 있고 좋은듯하다! 그리고 포장 용기에 담겨 나오는 반찬들을 쇼케이스 냉장고와 선반에 나눠서 보기 좋게 진열한다.


아날로그식 가격표..ㅎㅎ



2. 12시쯤 반찬이 다 나오면 하나하나 사진을 찍어서 네이버 밴드에 '오늘의 반찬'을 업로드한다. 밴드 댓글 또는 전화로 주문을 받는데, 주문이 들어오면 입금 확인을 하고 예약된 반찬을 따로 포장해놓는다. 그 사이에 가게로 방문하는 손님들 응대와 판매, 계산도 해야 된다. 두 사장님은 주방에서 재료 손질하고 떨어진 반찬을 다시 만드느라 여념이 없어서 바깥일은 온전히 내 몫이다.


3. 정신없이 일하다 보면 점심시간이다. 점심 때는 밥만 해서 먹고 싶은 반찬을 골라와 같이 먹는다. (정확히 말하면 그날 포장하고 남은 반찬들이다.) 점심을 먹고 커피를 한잔 마시며 잠시 한숨 돌린 후, 바깥에 내어둔 국과 반찬들이 다 식었는지 확인하고 냉장고로 옮긴다.


4. 점심시간 이후에는 조금 한가하다. 보통 어린이집 하원 시간, 직장인들 퇴근시간에 바쁜 편이라 중간에 손님이 없을 때는 나도 다음날 반찬에 쓰일 재료 손질을 돕는다. 손님 응대는 약국에서도 항상 해오던 일이라 익숙하지만 재료 손질은 정말 힘들다. 반찬 만드는 것이 이렇게 손이 많이 가고 힘든 일인지 몰랐다. 그동안은 엄마가 해주는 반찬을 맛있게 먹기만 했지 그 과정에 대해 알려고 해 본 적이 없었다. 새삼 엄마에게 미안한 마음이 드는 요즘이다.


오늘의 미션은 도라지 다듬기!


5. 오후 4시~6시 반 정도가 손님이 많고 바쁜 피크 타임이다. 그 시간이 지나면 손님은 어느 정도 마무리되지만, 가게 일은 마무리가 되지 않는다. 원래는 7시 마감이지만 7시 퇴근은 언감생심, 꿈도 못 꾼다. 다음날 만들 반찬 재료 준비를 어느 정도 끝낸 후 8시쯤 늦은 저녁을 먹는다. (그날 팔고 남은 반찬들로 구성된 식단이다.) 마지막으로 바닥 청소를 하고 음식물 쓰레기까지 비우면 거의 9시, 그때쯤 되어야 겨우 퇴근할 수 있다.


매일 하루하루가 어떻게 지나가는지도 모르게 순식간이다. 퇴근하고 오면 어깨도 뭉치고 다리도 아프고 너무 피곤하다. 그런데 엄마와 이모는 초인적인 힘을 발휘하는지 나보다 일찍 출근서 12시간을 넘게 일을 하는데도 기분이 좋다. (참고로 엄마와 이모는 새벽 6시에 출근을 하신다...) 손님들이 맛있다고 또 사러 오면 힘이 생긴다고 한다. 이것이 사장님과 알바의 차이인가...


현생이 너무 바쁘고 정신없다 보니 브런치에 글을 쓸 여유도 없다. 물론 주말과 공휴일은 쉬지만 평일에 정신없이 일하고 나면 주말에는 아무것도 하기가 싫어서 뻗어있다.


자신의 사업체를 운영하는 건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신경 쓸 것도 많고 힘든 일이었다. 반찬가게는 단순히 '반찬을 만들어 포장해서 파는 일'이 아니었다. 매일 정신없이 바쁜 엄마와 이모를 옆에서 바라보고 있자니 무심코 지나치던 수많은 가게의 사장님들이 모두 대단하게 느껴진다.




때마침 내가 쉬고 있을 때 엄마가 가게를 오픈해서 도와줄 수 있으니 다행이라고 생각하지만 한편으로는 이렇게 계속 반찬가게 매니저로 시간을 보내도 되나, 하는 마음도 있다. 의미 없는 경험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 또한 어떤 식으로든 나의 삶에 도움이 될 거라고 믿어보지만 가끔 내가 여기서 뭐 하고 있나, 하고 현타가 올 때도 있다.


이를테면 멸치볶음이 3000원인지 3500원인지 헷갈릴 때, 손님이 가져온 젓갈이 오징어 젓갈인지 창난젓인지 헷갈릴 때. 오징어 젓갈과 창난젓을 구분해야 될 일이 내 인생에 생길 줄은 정말 몰랐다.


아아, 내 인생 이렇게 흘러가도 괜찮은 건가요? 한 치 앞도 예상할 수 없는 게 인생이라지만, 정말 알 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는 퇴사 5개월의 일상이다.


밴드에 올리는 젓갈 사진 (무슨 젓갈인지 구분 가능하신가요?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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