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글짓는약사 Feb 12. 2022

퇴사하면 마냥 좋냐고요?

퇴사 후 불편한 점

퇴사한 지 어느덧 두 달이 지났다. 한 달 전 '퇴사 후 좋은 점 12가지'라는 글을 쓸 때는 마냥 좋았다. 순도 100의 행복을 만끽할 때였다. 하지만 지금은 조금 다르다. 행복 외에 다른 감정이 20 정도 섞였다고나 할까.  


여전히 내가 누릴 수 있는 여유와 평화로움은 좋지만, 한편으로는 기약 없는 쉼이 약간 불안하기도 하고, 그렇지만 아직 일을 하기는 싫은 모순적인 감정들이 공존하고 있다.


게다가 사소하지만 조금 불편한 점도 몇 가지 생겼다. 모든 일이 그렇듯 퇴사 역시 좋은 점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꼬박꼬박 받는 월급이 없다는 것은 당연한 사실이기에, 경제적인 부분 외에 개인적으로 느낀 불편한 점 몇 가지를 적어보려고 한다.   




#퇴사 후 불편한 점


1. 나를 증명해주는 직장이 없다


퇴사 후 처음으로 불편함을 느낀 순간은 비대면으로 증권사 계좌 개설을 할 때였다. 쉬는 동안 공모주 청약이나 해볼까 하는 생각이었다. 새로운 증권사 계좌를 만들기 위해 순서에 따라 진행하던 중, 관처럼 직장명 7년 동안 다닌 약국명을 입력려다가 멈칫했다.

 '아, 나 이제 여기 안 다니지...'

안 쓰고 넘어갈 수 없나 하고 봤지만 직장명은 필수 기재사항이었다.  

'어떡하지, 뭐 이래. 직장 안 다니면 계좌도 못 만드는 거야? 거짓말로 쓸 수도 없고.. 뭐라고 쓰지?'

잠시 고민하다가 될 대로 되라는 생각으로 '휴직 중'이라고 적었고 직장 주소에는 집 주소를 적었다.




'안 되면 안 만들면 되지. 치사해서 내가 공모주 청약 안 하고 만다...!!'

혼자 마음속으로 투덜거렸는데, 다행히 별문제 없이 넘어갔고 계좌 개설도 무사히 완료할 수 있었다.


이날의 경험을 통해 전혀 의식하지 않았던 사실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었다. 나라는 사람은 변함없지만, 현재 직업인으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타인에게 객관적으로 나를 증명할 수 없다는 사실. 아직 그럴 일은 없지만 만약 대출을 하려고 해도 소득이 증명되지 않기 때문에 힘들 거라는 사실 또한 예상할 수 있었다.


그동안 직장이 나를 둘러싸고 있던 울타리 같은 존재였음을 깨닫는다. 자유를 어느 정도 제한하지만 안전하게 보호해주는 울타리. 직장이라는 안전지대를 벗어난 나는 자유를 얻었지만 나를 증명해주던 객관적 지표를 하나 잃었다.



2. 처음 보는 사람에게 나를 소개할 때 어려움이 있다


일을 안 하고 있으니 처음 보는 사람에게 나를 소개할 때도 약간의 어려움이 있다. 일을 안해도 나는 여전히 약사지만, 직장인으로서 나를 설명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소개팅이나 선으로 새로운 사람을 만났을 때 이런 대화가 오갈 수 있다.

"약사라고 들었는데 어디서 근무하세요?"

"아... 지금은 잠시 쉬는 중이에요."

한창 일할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쉬고 있다는 말에 상대는 궁금해한다. 왜 쉬는 건지, 무슨 문제가 있는 건 아닌지, 몸이 아픈 건 아닌지.


충분히 궁금해할 수 있는 부분이지만 일일이 설명하기는 또 싫다. 처음 보는 사람에게 굳이 구구절절 나의 사생활 이야기를 하고 싶지는 않으니까.


예전 같으면 "OO약국에서 근무약사로 일하고 있어요."라고 단순 명쾌하게 답할 수 있는 질문인데 지금은 그럴 수가 없다.

그래서 그냥 웃으며 말한다.

"그동안 열심히 일해서 잠시 셀프 방학중이에요ㅎㅎ"

직장이 없고 쉬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나를 바라보는 타인의 시선과 평가가 달라질 수 있다는 것 또한 퇴사 후 감수해야 되는 부분이다.



3. 엄마 몰래 하는 소소한 인터넷 쇼핑이 불가능하다


사실 이건 너무 사적이고 사소한 문제라 쓸까 말까 고민했는데, 솔직하게 써보기로 마음먹었으니 써본다.


올해부터 재테크 공부를 시작하면서 쓸데없는 소비를 많이 줄이기는 했지만, 물욕이라는 것이 그렇게 쉽게 사라지지는 않았다. 게다가 지름신도 여전히 가끔 찾아오신다.


그래서 퇴사 전에는 인터넷 쇼핑을 할 때 배송받는 주소지를 직장으로 해놓았다. 그러면 엄마 몰래 사서 집으로 가져올 수 있었는데, 이제는 집으로 주문해야 되니 뭘 샀는지 엄마가 다 알게 된다.


퇴사를 하고 나니 나에게는 '꼭 필요한 소중한 물건'이지만 엄마가 볼 때는 '쓸데없는 소비'인 것들을 살 때면 또 뭘 샀냐는 엄마의 잔소리와 눈총 감수해야만 한다.



 

아침에 눈을 뜨면 습관처럼 챙겨서 출근하던 날들이 있었다. 이제 겨우 두 달 정도 쉬었는데 아득한 과거의 일만 같다. 그래서 그런지 가끔, 일을 하고 싶은 마음도 약간 생긴다. 아침마다 배송 오는 약들을 제자리에 채워 넣고, 처방전을 받아 조제하고, 사람들을 대하고 복약 설명하던 시간들. 정신없이 일했지만 그 속에서 느끼던 보람과 만족감이 조금 그립다.


하지만 이래 놓고 다시 일하러 가면 금방 지금 생활이 그리워질 거라는 사실 또한 잘 알고 있다. 사람은 이렇게도 모순적인 존재다.

'뭘 어쩌란 거냐.. 하나만 해, 하나만!!'

오늘도 모순된 양극단의 마음을 오가며 갈팡질팡하는 나를 잘 다독여본다.


퇴사 후 불편한 점에 대해 3가지 정도 적어보았지만 사실 아직까지 크게 불편한 점은 없다. 하지만 이 시기가 길어진다면 또 다른 무언가가 생길지도 모른다.(나의 즐거운 퇴사 생활을 위해 부디 더 이상은 없기를 바라며..) 


12 : 3, 좋은 점 12가지에 불편한 점 3가지. 그래도 이 정도 스코어라면 아직은 해볼 만하다!

이전 09화 퇴사 후 카페에 가는 이유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