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글짓는약사 Apr 01. 2022

퇴사를 해도 최소한의 루틴은 필요하다

퇴사 후 시간은 순식간에 흘러 벌써 넉 달이 다 되어간다.


주변의 누군가는 두 달만 놀아도 지겨워질 거라고 말했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나 같은 집순이에게 이런 황금 같은 시간이 지겨울 리가 없다.


또 누군가는 꼬박꼬박 들어오던 월급이 없어지면 불안할 거라고 말했지만 글쎄, 아직은 괜찮다. 매달 나오는 실업급여도 있고 부족한 부분은 퇴직금을 조금씩 꺼내어 쓰고 있다. 물론 확인할 때마다 줄어드는 통장잔고를 면, 곳간에 비축해둔 쌀이 줄어드는 것처럼 조금 걱정스럽기는 하다. 하지만 아직은 앞자리 숫자가 바뀌지 않아서인지 불안하지는 않다.(그동안 쉬어본 적이 없어서 몰랐지만 사실 나.. 이 생활이 적성에 맞는 걸까?ㅎㅎ)

   

퇴사를 하고 제일 먼저 한 것은 바로 기상 알람 끄기. 자고 싶은 만큼 푹 자고, 알람 소리 없이 눈이 떠질 때 일어나는 평화로운 아침이 이어지고 있다.


문제는 출근을 해야 된다는 부담감이 없다 보니 점점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나는 일이 반복되고 있다는 것이다.


직장에 다닐 때는 밤에 아무리 늦게 자도 다음날 출근을 하려면 제시간에 일어나야만 했다. 그래서 늦게 자면 수면 부족으로 다음날이 힘들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기 때문에, 되도록이면 취침시간을 넘기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런데 요즘은 다음날에 대한 걱정이 없으니 취침시간을 넘겨도 마음이 편안하다. 늦게 자면 다음날 늦게 일어나면 된다는 생각에 자꾸만 수면시간이 늦어진다. 특별한 뭔가를 하는 것도 아니다. 그동안 못 본 드라마를 몰아본다거나, 흥미로운 유튜브 영상을 본다거나, 그러다 보면 어느새 자정을 넘기게 된다. 늦게 자니 아침에 늦게 일어나고, 그러면 또 밤늦게까지 잠이 안 와서 놀다가 늦게 자는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다.




나도 직장에 다닐 때는 새벽에 일어나 나만의 아침 루틴을 하며 하루를 시작했다. 그때는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났는데, 요즘은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나는 것으로 수면 패턴 자체가 바뀌어버렸다.


좋은 습관을 들이는 것은 힘들지만 원상 복귀되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한번 흐트러진 수면 패턴은 다시 바로잡기 힘들다는 것을 알면서도 밤이 되면 달콤한 유혹을 뿌리치지 못한다. 몸에 나쁜 걸 알면서도 계속 먹게 되는 불량 식품 같은 느낌이랄까.


요즘 나는 스스로에게 꽉 조였던 고삐를 풀어준다는 생각으로 다소 여유롭게 생활하고 있다. 매일 아침마다 플래너에 하루 일정을 쓰고 있지만 극단적으로 간소화된 계획표이다. 잉여인간이라는 죄책감을 느끼지 않을 정도, 최소한의 일만 하며 느슨하고 물렁한 일상을 보낸다. 그 결과 직장을 다닐 때보다 해내는 것이 적다. 그나마 꾸준히 하고 있는 것은 블로그와 브런치에 글쓰기, 운동하기, 책 읽기 정도이다.(물론 이것조차 매일 하는 건 아니고 빼먹는 날도 있지만)


놀라운 건 직장 생활을 할 때도 이걸 다 했다는 것이다. 예전에는 시간을 쪼개 그 많은 걸 어떻게 다했나 싶다. 쉬면 책을 많이 읽을 거라 생각했는데 그것도 별반 차이가 없다. 오히려 더 적게 읽는 것 같기도 하다.


사실 처음부터 이렇게 시간을 보내려 한 것은 아니었다. 퇴사가 결정된 후 나는 파워 j의 성향을 발휘하여 하고 싶은 일 리스트를 적는 동시에 거창한 일일 계획표도 만들었다. 욕심을 꾹꾹 눌러 담은 빼곡한 계획표였다.


하지만 퇴사 후 그 계획표는 단 한 번도 지켜진 적이 없다. 여백의 시간을 알차게 보내고 싶은 마음으로 만든 계획표였지만 막상 퇴사를 하고 나니 생각이 달라졌다. 그동안 앞만 보고 달려온 나에게 주는 달콤한 휴식이 필요했고, 더 솔직히 말하면 스스로를 채찍질하며 열심히 살아야 될 필요성이 없어졌다.(게다가 너무 빼곡하게 짜서 도저히 실천할 수 없는 계획표였다...)


그리고 생각 없이 해오던 일들에 생각을 덧붙이자 행동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예전에는 아침에 알람 소리를 듣고 잠이 깨면 자동적으로 몸을 일으켜 아침 루틴을 했다면, 요즘은 알람도 없거니와 저절로 눈이 떠져도 자리에서 일어나는 대신 생각을 한다.


'출근도 안 하고 꼭 해야 될 일도 없는데.. 조금만 더 누워있을까.. 어차피 시간도 많은데..'


이런 게으른 생각으로 이불속에서 침대의 온기를 느끼며 다시 눈을 감는다. 그리고 얼마간 더 누워있는다.


늦게 일어나니 아침 시간이 줄어들고 자연스레 아침마다 하던 루틴도 안 하게 된다. 직장에 다닐 때는 나에게 주어진 자유시간이 얼마 없으므로, 최대한 시간을 아껴서 밀도 높게 쓰려고 노력했다. 반면 지금은 하루를 온전히 내 의지대로 사용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무의미하게 흘려보내는 시간이 많아져서 오히려 효율이 떨어진 것 같다.


학창 시절과 직장 생활, 꽤 오랜 세월을 정해진 시간의 틀에 맞춰서 살아온 나에게 처음으로 주어진 자유시간인 지금, 나는 그 시간의 흐름에 몸을 맡기고 이리저리 떠다니는 기분이다. 내가 이렇게 수동적인 인간이었나, 하는 생각을 해본다.


넘쳐나는 시간 속에 내가 사용할 수 있는 시간은 오히려 줄어든 느낌, 풍요 속의 빈곤이랄까. 일상의 리듬이 깨졌다. 새삼 규칙적인 생활의 중요성에 대해 생각해본다.


놀고먹고 마음껏 퍼져서 쉬는 것이 마냥 행복하지는 않다. 경험상 그 즐거움의 유효 기간은 두 달 정도인 것 같다. 그런 생활도 가끔 해야 좋지 매일 할 수 있게 되면 무감각해진다. 그리고 일상을 조여주는 무언가가 없으면 다소 무기력해지기 마련이다. 사람은 생각보다 쉽게 적응하고 간사한 동물이기 때문이다.


그동안 고생했으니 좀 해이하게 살아도 괜찮아, 라는 생각으로 생활하면 처음에는 행복할지 몰라도 점점 스스로의 일상이 만족스럽지 않다. 오랜만에 가져보는 휴식인 만큼 맘껏 게으르고 나태해지고 싶은 마음과, 아무것도 하지 않으며 시간을 낭비하고 있다는 죄책감, 양가감정을 느끼는 순간이 찾아온다.




루틴은 몸의 뼈대와 같다. 뼈대가 튼튼하면 일상이 무너지지 않는다. 기분 좋은 습관이 기분 좋은 삶을 만드는 것은 물론이다.

장명숙 <햇빛은 찬란하고 인생은 귀하니까요>


좋은 루틴이 자리 잡고 있는 일상은 튼튼하다.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 넘쳐나는 시간 속에서 부유하지 않고, 주체적으로 시간을 관리하며 건강한 일상을 보내려면 좋은 루틴이 필요하다. 일상의 리듬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적당한 틀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내 시간을 오로지 내 뜻대로 사용할 수 있다는 건 무척 큰 장점이지만, 강제성이 없기 때문에 해이해지기 시작하면 일상이 무너지는 것은 한순간이다.


프리랜서로 일하던 사람들이 시간 활용이 어려워 다시 직장에 가는 경우도 보았다. 직장 생활의 목적이 어딘가에 소속되고 싶다는 마음, 안정적인 월급뿐만 아니라 일정한 생활 리듬을 유지하기 위함에도 있음을 알 수 있다.


좋은 일상이란 좋은 루틴이 많은 일상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나를 위한 건강한 루틴들을 만들고 실천해야겠다고 다짐해본다. 다만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과한 욕심은 버리고 꼭 지킬 수 있는 정도로 시작해야겠다. 퇴사를 해도 최소한의 루틴은 필요하다는 것을 이제야 깨달았다.


우선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나는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야겠다. 한 번에 되돌리기는 힘들 테니, 오늘부터 30분씩이라도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야겠다!

이전 10화 퇴사하면 마냥 좋냐고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