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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짓는약사 Jun 27. 2022

새로운 쳇바퀴가 필요한 시점

퇴사 6개월 차, 삶이 조금 무료해진다.


일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성취감이나 보람이 없어진 탓일까?


다행인 것은 그동안 직장 생활을 하며 모아놓은 돈과 퇴직금이 있어서 생활이 힘들거나 빨리 돈을 벌어야 될 텐데, 하는 종류의 불안함은 없다는 사실이다. 확실히 마음의 여유는 통장 잔고와 어느 정도 비례하는 것 같다.  


생각해보니 이렇게 긴 시간 동안 기약 없이 쉬어본 것은 처음이다. 대학 졸업 후 바로 취직하여 근무약사로 일하면서 중간에 몇 번의 이직이 있었지만, 대부분 다음 직장을 미리 구해놓고 그 사이에 잠시 쉬는 것이 다였다. 다니던 약국이 갑작스레 폐업을 하게 되어 하루아침에 일자리를 잃었을 때는, 빨리 일할 곳을 구해야 된다는 조급함에 마음 편히 쉴 수가 없었다. 아마 그때는 모아놓은 돈이 얼마 없었기 때문에 그랬던 것 같다.




특별한 하루라는 것은 평범한 하루들 틈에서 반짝 존재할 때 비로소 특별하다. 거대하게 굴러가는 쳇바퀴 속에 있어야지만, 잠시 그곳을 벗어날 때의 짜릿함도 누릴 수 있다. 마치 월요일이 없이 기다려지는 금요일이란 있을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김이나 <보통의 언어들>


예전에 읽을 때는 무심히 넘겼던 구절인데 새삼 와닿는다고 느끼는 요즘이다. 출근 안 하고 노는 생활이 마냥 좋을 것 같지만 듣기 좋은 꽃노래도 한두 번이지, 라는 말처럼 꼭 그렇지도 않다. 고백하자면 요즘의 내가 그렇다. 평일과 주말의 경계가 없어진 삶이라 요일 감각도 없고, 그러다 보니 주말도 더 이상 특별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어쩌다 생긴 여유를 만끽하며 행복해했는데 조금 무료해지는 걸 보니 다시 일을 시작해야 될 시기가 왔음을 느낀다. 겨울이 시작될 무렵 퇴사를 했는데 벌써 에어컨을 틀어야 되는 계절을 마주하고 있다. 반년 동안을 푹 쉬었으니 뭐, 그럴 만도 하다. 이제 다시 쳇바퀴에 몸을 실어야 할 것 같다. '쳇바퀴'라는 단어는 보통 부정적인 의미로 많이 쓰이지만 사실 일상을 탄탄하게 유지해주는 긍정적인 장치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쳇바퀴 속에 갇혀서 바깥세상이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필요하다고 여겨질 때는 스스로 쳇바퀴에서 내려올 줄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6개월 동안 쳇바퀴 밖에서 사는 경험을 해봤으니 이제 다시 스스로 올라가 보려고 한다.


다만 이번에는 조금 다른 쳇바퀴를 선택하려 한다. 근무약사가 아닌 개국약사가 되려고 한다. 그동안 문전 약국, 로컬 약국에서 골고루 근무해봤고 다양한 과의 처방도 받아보았으므로 경험치는 어느 정도 쌓였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런 결정을 내리게 된 가장 큰 이유는 다시 근무약사로 일할 생각을 하니 마음이 내키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유가 뭘까, 생각해보니 그건 더 이상 내가 원하는 삶이 아니라는 결론에 닿았다. 근무약사로 한 곳에 오래 머물다 보니, 더 이상 새로울 것도 배울 것도 없는 어제와 같은 오늘이 반복되는 일상이었다. 일어나면 당연하게 출근하고 정신없이 일하다가 퇴근하면 지쳐 잠드는 매일의 반복.


물론 약사로서 다양한 경험을 쌓을 수 있었기 때문에 그 시간들이 무의미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관성에 의지하여 흘러가던 삶에 제동이 걸리고 쉬는 동안 내가 원하는 미래를 그려보는 시간을 가져보니, 그 생활을 다시 반복하고 싶지는 않다고 마음이 말했다.


사실 갑자기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것은 아니다. 1~2년 전부터 그런 생각이 조금씩 고개를 내밀었지만, 적당히 현실에 안주하고 싶은 마음과 매달 입금되는 월급의 달콤함에 빠져 애써 외면하던 중이었다. 그렇게 일주일, 한 달, 일 년, 세월이 쌓여가며 경력도 쌓였지만 가끔 내가 이렇게 오래 일했구나, 하고 자각할 때면 스스로가 대견하게 여겨지는 동시에 변한 것이 없는 삶에 대한 아쉬움, 답답함도 있었다. 근무약사로서는 페이나 경력이 한계점에 도달했다고 느껴지는 시점이었다.


나는 일을 통해 내가 성장하고 있음을 느끼고 앞으로 더 발전할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할 때 더욱 보람을 느낀다. 물론 각자의 생각이나 성향에 따라 일의 의미는 다를 수 있다. 자신이 잘 알고 익숙한 일을 반복적으로 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어느 정도 업무의 틀은 잡혀 있지만 제자리에 머무는 것이 아닌, 발전 가능성이 있는 일이 좋다. 그리고 누군가에게 받는 월급에 길들여지면 스스로 살아가는 방법을 잃어버리고 삶도 변화하지 않을 거라는 생각도 있었다. 그래서 이제 개국약사로서 새로운 경험을 시도해보려고 한다.




파울로 코엘료의 <연금술사>에 보면 이런 구절이 있다. 양들은 물과 먹이를 제공받는 대가로 양털과 자신의 고기까지 내어놓는다는. 월급이라는 마약에 중독되면 결국 양들처럼 되는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을 문득 하게 되었고 순간 조금 섬뜩한 기분이 들었다. 나 아닌 누군가에게 의지한다는 것은 나도 모르는 사이에 조금씩 내 인생을 저당 잡히는 일일지도 모른다.


양들은 스스로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할 필요가 없다. 마찬가지로 월급만 바라보며 살다 보면 스스로 뭔가를 해보려는 노력을 소홀히 하게 된다.


하지만 알고 있는 것처럼 우리를 평생 책임져주는 직장은 없다. 그러니 지금 당장의 월급에만 의지하지 말고 스스로의 능력을 키워 자립할 수 있는 힘을 길러야 될 것이다. 그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지금 나에게는 새로운 쳇바퀴, 개국이 그 답이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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