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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짓는약사 Mar 12. 2022

퇴사 후 카페에 가는 이유

퇴사한 지 석 달 정도 되니 일상이 단조롭다. 따로 약속을 잡지 않는 한 사람을 만날 일도 없고, 시국이 시국인만큼 거의 집에서만 생활하기 때문이다. 그 결과 활동 반경이 좁아진 것은 물론이고 새로운 자극이 없으니 어제와 같은 오늘이 계속 이어진다. 그토록 바라던 평화로운 일상임에도 불구하고 가끔, 지겹게 느껴질 때가 있다.


'정신없이 일하던 때를 생각해봐, 하루 종일 사람 상대하고, 진상 손님 때문에 힘들었던 거 벌써 잊었니? 평화로운 게 최고, 뭘 더 바라는 거야?' 

과거의 내가 현재의 나를 일깨운다.


'그렇지, 지금 누리는 꿀 같은 휴식이 나도 좋긴 한데, 그래도 뭔가 좀.'

현재의 내가 과거의 나에게 소심하게 대꾸한다.


어째서 사람은 이다지도 간사한 존재인건지, 좋은 것은 왜 이리도 금방 익숙해져서 딴생각을 하게 되는 건지.


벌써 다시 일을 하고 싶다는 것은 아니다.(조금은 더.. 쉬어도 될 것 같은 느낌이다.) 하지만 단조로운 일상에 아주 약간의 자극이 필요하다고 느껴지면 집을 벗어나 카페로 간다. 코로나 시국, 백수가 혼자 갈 수 있는 가장 만만한 곳은 카페이다.


짐작하겠지만, 내가 카페에 가는 것은 단순히 커피를 마시기 위함은 아니다. 집에도 커피 머신이 있기 때문에 얼마든지 커피를 내려마실 수는 있다. 물론 카페에 가면 다양한 선택지가 존재하고, 남이 만들어주는 더 맛있는 커피를 마실 수 있다는 건 사실이지만.


하지만 그것보다는 집을 벗어나 새로운 공간에 가는 것만으로도, 단조로운 일상에 변화를 줄 수 있기 때문에 카페를 찾는다. 




그래서 어제 아침에는 책 한 권을 들고 카페로 출근을 했다. 내 방 책상 대신 카페 창가 자리에 앉아 사람 구경도 하고 따뜻한 바닐라라떼를 홀짝이며 여유를 즐겼다. 남들은 출근해서 일하는 평일 아침에 카페에서 여유를 부리고 있으니 내가 퇴사했다는 사실이 실감 다.


집에만 있으면 그냥 출근할 곳도 없고 할 일도 없는 백수 같은 느낌이지만, 이렇게 나와 카페에 앉아있으면 내가 누리고 있는 이 기약 없는 여백의 시간이 새삼 기쁘고 행복하다. 직장생활을 할 때는 그토록 바라고 갖고 싶었던 여유 아닌가. 마음만 먹으면 이런 시간을 매일같이 가질 수도 있다는 사실을 문득 깨닫고 혼자 감격하기까지 했다. (물론 커피값이 만만치 않겠지만..)


커피만 마시는 것이 아니라 책도 읽고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면 몇 시간은 금방 간다. 그래서 경험상 너무 조용하거나 규모가 작은 카페는 조금 불편하다. 좌석이 몇 개 없으니 커피를 다 마시고 나면 자리를 비워줘야 될 것 같고, 오래 앉아 있으면 약간 눈치도 보이기 때문이다.


적당히 넓고, 손님도 좀 있고, 약간의 소음도 있는 곳이 부담 없다. 이런 조건을 만족하기에는 역시 스타벅스가 최고다. (느닷없는 스타벅스 찬양론.. 내가 스타벅스 주주라서 그런 건 절대 아니고, 경험상 그렇다는 거다..ㅎㅎ) 개인 카페에서 느낄 수 없는 편안함이 있다고나 할까.


혼자 앉기 좋은 창가 자리가 있는 것도 마음에 들고, 아침 일찍부터 문을 여는 것도 좋다. 출근하듯 이른 시간에 카페에 가면 뭔가 알찬 하루를 시작하는 기분이라 뿌듯하다. 고소한 커피 향, 커피를 만드는 소리, 사람들의 이야기 소리,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소리가 ASMR처럼 깔리면 그 속에서 편안하게 내 시간을 즐긴다. 카페 손님 1이 되어 그 분위기에 녹아드는 느낌이 좋다.


가져온 책을 읽다가 눈이 아파서 잠시 눈을 감아본다. 다시 눈을 뜨고 지친 눈을 좀 쉬게 하려고 멍하니 먼 곳을 바라보았다. 깜박하고 인공 눈물을 가져오지 않아서 조금 불편하다. 여담이지만 안구건조증을 예방하려면 의식적으로 눈을 깜박이고 먼 곳을 바라봐주기도 해야 된다. 요즘은 일할 때는 컴퓨터 모니터에, 쉴 때는 스마트폰 화면에 집중하느라 안구건조증을 호소하는 사람들이 많다.


창밖 세상을 바라보니 소리 없이 재생되는 영화의 한 장면 같다. 소리가 없으니 평화롭고 조용하다. 파란 하늘, 어디론가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 쉴 새 없이 달리는 자동차, 다들 어디로 가는 걸까. 요즘 확진자 수가 예사롭지 않더니 맞은편 병원 앞에 코로나 검사 줄이 길게 늘어서 있다. 언제쯤이면 마스크 없이 다닐 수 있을까, 이런저런 생각을 해본다.


주위를 둘러보니 평일 오전인데도 생각보다 손님이 꽤 있다. 왜 저들은 이 시간에 출근 안 하고 여기 앉아있을까, 나처럼 퇴사 후 잠시 쉬는 중일까, 황금 같은 연차를 쓰고 온 것일까, 아님 취업 준비생일까, 저들도 혹시 나를 보며 이런 생각을 하고 있지는 않을까.


혼자 집에만 있다면 절대 할 수 없을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오랜만에 머릿속에 새로운 자극들이 주입된다. 그렇지, 이게 바로 내가 카페에 가는 이유다. 공간이 바뀌면 새로운 생각이 떠오른다. 이렇게 글 쓸 소재도 하나 생겼으니 커피 한잔만큼의 값어치는 한 것 같다.




퇴사를 하고 나니 바쁘게 돌아가는 세상에 속하지 않은 관찰자가 되어, 조금 떨어져서 세상을 바라볼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나 역시 저 세상에 속하던 사람이었는데, 열심히 나만의 쳇바퀴를 돌리며 살고 있었는데, 우연히 쳇바퀴에서 내려와 보니 이것도 나름대로 괜찮다는 것을 느끼는 요즘이다.


그의 삶에 퍼즈(pause) 버튼이 강제로 눌리고, 그렇게 멈추어 뒤를 돌아보니 그는 그동안 그가 낼 수 있는 정상 속도보다 1.6배속쯤으로 살아온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소 <회사원 서소 씨의 일일>


한참을 달리다가 잠시 멈춰보니, 그동안 나도 스스로를 다소간 몰아붙이며 정상 속도보다 빠르게 살려고 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반드시 그렇게 살지 않아도 괜찮다는 것 깨달았다.


언젠가는 다시 그 쳇바퀴 위로 올라가야겠지만, 당분간은 이 여유를 즐겨보자고 마음먹는다. 종종 이렇게 카페에 와서 새삼스런 기쁨과 행복을 느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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