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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짓는약사 Mar 28. 2022

엄마가 좋으면 나도 좋아

엄마와 함께 한 1박 2일

퇴사를 앞두고 '하고 싶은 일 리스트'를 만들었다. 별거 아닌 소소한 일들이었지만 쓰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던 기억이 난다. 주 6일 출근, 연차도 없는 직장 생활 속에서는 꿈꿀 수 없는 일들이었기 때문이다. 시간적 제약에서 벗어나니 할 수 있는 일이 무척 많았다.


그렇게 나는 쉬는 동안 여유를 만끽하며 리스트에 있던 것들을 하나씩 지워나갔고, 한 가지 남은 것이 '엄마와 1박 2일 여행 가기'였다.


직장 생활을 할 때도 종종 가족들과 가까운 곳으로 여행을 다녔지만, 엄마와 단 둘이 여행을 간 기억은 손에 꼽을 정도다. 그래서 쉬는 동안 엄마와 둘이서 여행을 가고 싶었다. 비수기 평일에 여행을 갈 수 있으니 호텔 숙박비도 저렴할 것이고, 이런 혜택을 놓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특별히 하는 일은 없어도 시간은 잘 가고 편한 생활이 익숙해져서 그런지 새로운 뭔가를 계획하는 것이 귀찮았다. 그래서 엄마한테 여행 가자는 말만 던져놓고 구체적인 계획은 차일피일 미루고 있었다. 어디로 놀러 갈 거냐는 엄마의 재촉을 받고서야 비로소 장소를 검색해보기 시작했다.


'운전을 해서 가야 하므로 너무 멀지 않은 곳, 이왕이면 가볼 만한 관광지가 있는 곳, 그리고 괜찮은 호텔이 있는 곳'이 나의 조건이었다.


고민 끝에 결정된 최종 목적지는 '밀양'.


차로 2시간 정도 거리에 있으면서 유명한 관광지도 있고, 엄마도 나도 가보지 않은 도시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온천수가 나오는 호텔이 있어서 좋았다.




코로나가 오기 전 일주일에 한 번씩 목욕탕을 가는 것은 엄마와 나의 소확행이었다. 뜨끈한 탕 안에서 엄마와 수다타임을 가지고, 사이좋게 서로의 등을 밀어주고, 나오는 길에 바나나 우유를 사 먹으면 일주일의 피로가 풀리는 기분이었다.


그런데 벌써 2년째, 강제로 목욕탕을 못 가고 있다. 온천수가 나오는 호텔이라면 어느 정도 그 아쉬움을 달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 역시 온천수가 나온다고 하니 좋아하셨다.


장소를 결정하고 호텔을 예약하고 나니 나머지는 쉬웠다. 엄마의 취향과 나의 취향을 적당히 섞어서 대략적인 여행코스와 일정을 정했다.


출발하기 전날 엄마에게 간단한 브리핑을 했다. 엄마는 설레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들뜬 마음을 숨기지 않으셨다. 마치 소풍 가기 전날의 아이처럼 신난 목소리로 몇 시에 출발하냐고 묻는 엄마를 보 좋으면서도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이렇게 좋아할 줄 알았으면 진작 자주 다닐걸 그랬다.


핑계 같지만 직장에 다닐 때는 나의 주말에 엄마까지 넣을 여유가 없었다. 남자 친구가 있을 때는 데이트도 해야 되고, 각자 사는 것이 바빠 자주 못 보는 친구도 만나야 되고, 그도 아니면 평일의 피로를 풀기 위해 그냥 쉬었다. 그런데 퇴사를 하고 나니 시간이 많아졌고 마음의 여유가 생기자 비로소 엄마가 보였다. 항상 내 옆에 있었지만 우선순위가 아니었던 엄마에게 미안했다.


밥도 사 먹고 필요한 게 있으면 가다가 사면되니까 아무것도 챙기지 말라는 나의 말에도 불구하고, 엄마는 아침부터 과일을 깎아서 담고 텀블러에 마실 차를 챙겼다. 소풍 가방을 싸듯 간식으로 먹을 과자까지 야무지게 챙겨 쇼핑백에 넣고 출발했다.


집에 혼자 계실 아빠한테는 조금 미안하지만 솔직히 엄마와 둘이서만 여행을 가는 게 더 편하고 재밌다. 엄마와 나는 다소 무던한 성격인 반면 아빠는 꼼꼼한 편이고, 그래서 이런저런 잔소리도 많기 때문이다. 아빠의 잔소리와 일상을 벗어나 즐겁게 놀 생각을 하니 차에 탈 때부터 즐거웠다. 그건 엄마도 마찬가지인 듯했다.




첫 번째 목적지인 표충사에 들렀다가 점심을 먹고 영남루에 갔다. 영남루에 올라가니 밀양강과 밀양 도심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었다.


잠시 멋진 풍경을 감상하고 아래쪽으로 내려가니 강변을 따라 걸을 수 있는 산책로가 있었다. 바람은 조금 불었지만 햇살이 따뜻해 걷기 좋은 날씨였다. 엄마와 팔짱을 끼고 여유롭게 걸으며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눴다. 특별할 거 없는 이야기를 하다 문득 강을 바라보니 별이 빛나는 것처럼 물결이 반짝였다.


윤슬


"엄마, 저걸 뭐라고 부르는지 알아? 물에 반짝이는 거."

"몰라, 저게 뭔데?"

"윤슬. 순우리말이래. 이름도 예쁘지?"

"그러네 이쁘네, 윤슬.. 윤슬.."


엄마는 강을 바라보며 잊지 않겠다는 듯 윤슬을 되뇌었다.


산책을 마치고 강이 보이는 카페에 들러 잠시 여유를 즐기고 저녁을 먹으러 갔다. 저녁은 밀양에 오면 먹어봐야 한다는 돼지국밥이었다.


"나는 이렇게 누가 차려주는 밥 먹는 게 제일 좋더라, 여행 체질인가 봐."


내 입에는 그저 그런데도 맛있다고 말하며 먹는 엄마였다. 그 모습에서 결혼하고 3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매 끼니 가족의 식사를 책임져온 엄마의 고단함이 느껴졌다. 같이 살면서도 오늘은 또 뭘 해 먹나, 하는 엄마의 끼니 걱정에 무심했던 과거를 반성다.




알찬 하루 일정을 마친 후 호텔에 체크인을 했다. 온천수라서 그런지 확실히 물이 다른 느낌이었다. 엄마도 씻고 나오더니 얼굴이랑 몸이 매끈매끈하다고 좋아하셨다.


잠옷으로 갈아입고 침대에 비스듬히 기대었다. 새하얗고 깨끗한 호텔 침구는 언제나 좋다. 뽀송뽀송한 촉감, 움직일 때 나는 사각사각 소리, 적당히 묵직한 이불을 덮으면 이내 포근하게 감싸주는 느낌도 좋다. 이번에는 일부러 트윈 베드가 아닌 더블 베드로 선택했다. 조금 불편할 수도 있지만 엄마랑 나란히 누워 자고 싶었기 때문이다.


근처 편의점에서 사 온 새우깡을 안주 삼아 맥주를 마시면서 엄마가 좋아하는 트로트 프로그램을 함께 봤다. 집이라면 과자 부스러기 떨어진다고 뭐라 했을 엄마도 마음이 편안해보았다. 집이라는 공간에서 벗어나 오랜만에 즐겁고 편안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맥주, 새우깡, 티브이만으로도 충만한 모녀의 시간이었다.
 

맥주엔 새우깡!


티브이를 보며 한참을 놀다가 불을 끄고 잘 준비를 했다. 잠자리가 바뀌면 쉽게 잠들지 못하는 나와는 달리 엄마는 이내 잠들었다. 그리고 들려오는 코 고는 소리... 깜박 잊고 있었다. 엄마는 피곤하면 코를 곤다..!! 끊어질 듯 이어지는 엄마의 코 고는 소리에 잠 못 이루는 밤이었다.




다음날 정해진 일정을 마치고 돌아오는 차 안에서 엄마가 물었다.


"언제부터 다시 일할 거야?"

"글쎄, 아직 잘 모르겠는데.. 왜?"

"한 번 더 놀러 가자고..ㅎㅎ"

"난 또 빨리 일하라는 말인 줄 알았네..ㅎㅎ 그래, 또 가면 되지."


엄마도 이번 여행이 좋긴 좋았나 보다. 예전에는 어디 가자고 하거나 맛있는 걸 먹자고 해도, 내가 힘들게 번 돈을 쓴다는 생각에 괜히 거절부터 하던 엄마였다. 그런데 요즘은 좋으면 좋다고 말하고, 또 가고 싶다고 말하는 솔직한 엄마가 되어서 기쁘다. 엄마가 좋아하니 나도 좋았다.


비록 1박 2일이지만 일상을 벗어나 새로운 곳을 여행하며 엄마와의 추억을 또 하나 쌓고 왔다. 어릴 때는 마냥 크게만 보였던 엄마가 요즘은 친구 같기도 하고, 가끔은 아이 같아 보이기도 한다. 그만큼 내가 나이가 들고 엄마는 늙었다는 뜻이겠지.

 

아껴두었던 나의 퇴직금 일부를 호텔 숙박비를 포함한 여행 경비로 써버렸지만, 엄마가 행복해하니 충분히 가치 있는 소비라고 생각한다.


엄마 말처럼 엄마가 더 나이 들고 다리가 아파 잘 걷지도 못하는 날이 오면 이렇게 같이 다니는 것도 힘들 테니까. 둘이서 자유롭게 여행을 갈 수 있는 날이 그리 많이 남지 않았다는 생각을 하니 갑자기 코끝이 찡했다. 시간이 있을 때 엄마와 더욱더 많은 것을 함께해야겠다고 다짐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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