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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짓는약사 Mar 16. 2022

잉여인력의 쓸모

조카에게 배우는 이모

연일 코로나 확진자 수가 예사롭지 않다. 오미크론의 전파력이 엄청나다는 것을 느낀다. 서울에 사는 조카의 어린이집도 비상이라, 열이 나거나 약간의 호흡기 증상만 있어도 등원시키지 말라는 조치가 취해졌다고 한다. 얼마 전 갑자기 콧물이 좀 흘러서 일찍 하원한 조카는, 당장 다음날부터 어린이집에 못 가는 상황이 되었다.


결혼해서 서울에 살고 있는 여동생은 맞벌이인 데다 친정과 시댁 모두 지방이라서 이럴 때 조카를 봐줄 사람이 없다. 갑자기 연차도 못 쓰는 곤란한 상황일 때, 최후의 구원자는 역시 엄마. 여동생이 그날 저녁 늦게 엄마에게 SOS를 쳤다. 집에서 저녁을 먹다가 갑자기 연락을 받은 엄마는, 부리나케 저녁 식사를 마치고 피난 가듯 최소한의 짐만 싸서 서울로 올라갔다. 집에서 놀고 있는 잉여인력인 나도 물론 따라갔다.  




다음날 아침, 동생네는 출근을 하고 조카는 일찍부터 일어나서 이 방 저 방 헤집고 다녔다. 전날 늦게 자서 피곤했던 나는 좀 더 누워있다가 8시쯤 겨우 일어났다.


그때부터 '조카와 놀아주기 미션' 스타트!


오랜만에 봐서 서먹해하던 것도 잠시, 아침을 먹고 기운이 넘치는 조카는 내 손을 붙잡고 미끄럼틀로 갔다. 시범을 보이듯 먼저 미끄럼틀을 타고 내려가더니 나한테도 타보라고 한다.


내가 올라가면 무너지지 않을까 잠시 걱정하며 발을 디뎌보니, 다행히 꽤 견고해서 내 무게를 지탱해주었다. 용기를 얻어 약간 두근대는 마음으로 신나게 미끄럼틀을 타고 내려왔다.(오랜만에 타 본 미끄럼틀은 무척이나 재밌었다...!!) 까르르 웃으며 좋아하는 조카, 조카만큼이나 신난 나, 엄마는 대체 누가 놀아주는 건지 모르겠다며 웃었다.


그 후로 이어진 상어 가족 노래 부르기, 색깔별로 상어 가족 분류하기, 공놀이, 자동차 놀이, 요리하기 놀이, 그림책 읽어주기까지..(동생의 교육열 덕분에 그림책도 정말 많았다! 하나씩 다 읽어주느라 목이 쉴 뻔..) 같은 놀이를 몇 번이고 계속하면서도 마냥 즐거워하는 조카였다. 열 번쯤 똑같이 반복하면 지칠 법도 한데, 매번 처음 하는 것처럼 재밌게 하는 놀라운 능력이 있었다.


그렇게 잠시도 쉴 틈 없이 오전을 보내고 점심시간이 되었다. 조카의 밥과 감기약을 먹이고, 양치질도 해주고, 드디어 낮잠시간이다. 그런데 졸린 게 분명한데, 눈에 졸음이 어리고 하품을 하면서도 '낸내'하러 가자니까 안 잘 거라고 입을 비죽거린다. 방에 자러 가자고 이끄는 내 손을 뿌리치고 장난감을 들더니, 나중에는 울고 불고 난리였다.


결국 엄마가 안아서 방에 데려가 눕히고 나랑 엄마도 양 옆으로 누웠다. 처음에는 뭐가 그렇게 서러운지 내 품을 파고들며 울다가, 토닥토닥 등을 두드려 주니 어느새 쌕쌕거리는 숨소리를 내며 잠들었다. 이렇게 잘 자면서 대체 왜 안 자려고 한 건지 모르겠다.


"이렇게 잘 자면서 왜 안 자려고 그러는 거야?"

엄마에게 소곤소곤 물어보았다.

"더 놀려고 그러는 거지, 노는 게 재밌어서."

겨우 잠든 조카가 깰까 봐 엄마도 조용조용 대답했다.


'이모는 자려고 누웠을 때 정말 행복한데 너는 안 그런가 보구나... 하긴 겨우 두 돌이 지난 너에게 세상은 신기한 것들로 가득 찬 곳이겠지.'


조카는 자는 시간이 아까울 정도로 노는 게 좋은가 보다. 이제 세상에 신기한 것도 거의 없고 그래서 큰 감흥 없이 하루하루를 보내는 나와는 달리, 똑같은 놀이를 반복하면서도 너무나 재밌게 잘 노는 조카가 신기할 따름이다. 동시에 세상 모든 엄마들이 존경스러웠다.  조카랑 놀아주는 건, 출근해서 일하는 것보다 몇 배는 힘든 일이었다.


잠시 후 세상모르고 잠든 조카 옆에서 살며시 빠져나와 나도 옆방에 가서 낮잠을 청했다. 원래 잠자리가 바뀌면 잘 못 자는 편인데 거의 기절하듯이 쓰러져 잤다. 열정을 다해 아이랑 놀아주면 불면증 같은 게 생길 수가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나는 '조카와 놀아주기 미션'을 성공적으로 완수했고, 퇴근 후 돌아온 동생은 내가 일을 그만둬서 정말 좋다고 말했다.(응...?!) 엄마도 예전에는 혼자 올라와서 밀린 집안일 하랴 조카랑 놀아주랴 힘들었는데, 내가 조카랑 놀아주기를 전담해줘서 집안일만 하니 한결 수월했다고 한마디 덧붙였다. 잉여인력이었던 내가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저녁을 먹으며 동생이 조카에게 물었다.

"윤이는 엄마가 좋아, 이모가 좋아?"

하루 종일 놀아줬으니 이모라 답할지도 모른다는 기대 안 조카를 바라보았다.(우리 오늘 좋았잖아, 그치?)

잠시 고민하는 듯 망설이던 조카가 이내 대답했다.

"아.. 빠!"

나도, 동생도, 예상치 못한 대답에 웃음이 터졌다.

"아유, 우리 윤이 정말 똑똑하네~~!!"




조카는 이미 세상은 양자택일이나 흑백논리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이것이야말로 우문현답 아닌가.


30년을 넘게 살았지만 여전히 사는 일이 서툰 이모는, 30개월도 안된 조카에게 삶의 태도와 인생의 이치를 배워 왔다.


나도 매일 주어지는 하루하루를, 처음 살아보는 것처럼 신기한 눈으로 바라보며 재밌게 살아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인생에는 선택지가 다양하다는 사실도 잊지 말고 다짐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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