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혼에서 결혼을 결심한 에디터 이야기
가장 뜨거운 여름, J를 만났다
햇살이 안부를 묻는다. 언제 그랬냐는 듯이, 무더위를 쏙 감추고 찬란히도 빛난다. 하루하루를 붙잡고 싶은 축복 같은 날씨가 연일 이어진다. 우리나라 기상관측 이래 가장 뜨거웠다는 올해 여름, J를 만났다. 솔직히 난 연애 감정 따윈 잊고 산 지 오래고, 일 중독에 빠진 지 오래라 누군갈 만날 여력이 없었다. 아니, 없고 싶었다는 게 옳을지도 모른다. 바쁜 일상 속, 일이 끝나면 나는 무기력해졌으니까. 그런 와중에 누군가를 소개받는다는 건, 즐거움이긴 커녕, 소중한 주말 몇 시간을 투자해야 하는 아주 귀찮은 일이 된 지 오래였다. 별 기대감은 없었다. 카톡 사진이 없었던 J와의 문자는 마치, AI와 연락하는 기분마저 들었다.
“근데 카톡에 사진이 없으니깐 뭔가 AI와 대화하는 느낌이 드네요.”
“아..... AI...... 내일 사진 넣어볼게요.”
“아.. 네...”
“앞으로 계속 친해지면 좋겠네요. 그럼 안녕히 주무세요.”
“네..”
우리의 대화는 매트 했다. 별다른 설렘이나 말랑말랑한 감정선이 오가지 않는.
다음 날 아침 띵똥 문자가 울렸다. “저 이제 AI 아닙니다ㅎㅎ”.
허걱~귀여웠다. 사진 찍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라 카톡에 사진 한번 걸지 않았다던데, 소년 같은 귀여움이 있었다. 비로소 사람과 대화하는 기분이 들었다. J는 귀엽다는 칭찬에 내가 더 귀엽다며, 쑥스러워했다. 아직 만나지 않은 남자에게 귀엽다는 말. 내게는 큰 칭찬으로 한 말이었다. 그렇다고 남자다움이 배제됐다는 뜻은 아니다. 이제껏 이성적인 감정이 느껴지는 남자는 다 귀여워 보였으니까.
우리는 첫 만남에 밥을 먹었다
얼굴이 뒤집어졌다. J를 만나기 하루 전날, 평소 나지도 않던 뾰루지가 뺨 군데군데 피어났다. 피부가 뒤집어졌다는 내 말에 J는 궁금해했다.
“현지 씨 사진 처음 받아보는데.. 속상하네요.”
의도치 않게 J에게 처음 보낸 내 사진은 뺨에 가득 올라온 뾰루지 사진이었다.
“평소 안 먹던 거 먹은 건가요?, 약... 없겠죠?.”
더 나아가 J는 ‘피부 뒤집어졌을 때,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라는 기사까지 링크 걸어주었다. 만나기 전 내 뾰루지를 보여준 부끄럼보다는 진심으로 걱정해주는 J에게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J는 혹시 뾰루지가 가라앉지 않으면, 내일 집에 있을 거냐고 물었다.
“그래도 보죠. 괜찮아요!”
J를 만나는 당일. 내 피부는 더 뒤집어졌다. 하지만 J와의 만남에 큰 기대를 하고 있지 않던 터라, 뾰루지는 문제 될 거 없었다. 모처럼 밀린 잠을 푹 자고 나서, 5시 대학로를 나갔다. 가는 도중, J에게 문자가 왔다.
“늦잠 잔 거 같은데 오늘 뭐 먹었어요? 혹시 먹고 싶은 거 있어요? 아님 뭐 마실래요?^^”
“밥 먹고 싶어요.”
이렇게 답장을 보내고 나서, 나 스스로에게 흠칫 놀랐다. 혹시라도 밥 먹다 립스틱이 지워지면 어떡하지?, 예쁜 모습을 보여야 할 텐데란 우려에 여태껏 이성과의 첫 만남에 바로 밥을 먹은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나 정말 마음 비운 걸까?’, ‘이 만남, 왜 이리 편하게 느껴지지?’ 혜화역 2번 출구 앞에서 나를 보자 환히 웃는 J의 미소가 설렜다. ‘아. 괜찮다!’
우리는 밥을 먹었다. 정확히는 쌀국수를 먹었다. 쌀국수를 먹으며, 많은 이야기를 나눴는데, 조곤조곤 참 다정한 말투가 듣기 좋았다. 중저음 목소리도 좋았지만 무엇보다 좋았던 건, J의 말속에는 배려가 서려 있었다. 첫 만남에 잘 보이려, 연기하는 말투가 아닌 건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평소 생각하는 배우자를 그려보다
J는 평소 내가 생각하고 꿈꿨던, 배우자의 모습과 비슷했다. 놀랍도록 많은 점에서 닮아있었다. 재미있고, 매력 있는 이성에 끌렸던 이십 대를 지나 서른이 넘어가며 내 이상형 1순위는 몸과 마음이 건강한 사람이었다. 이는 외모, 재력, 학력 등 그 어떤 조건보다 제일 중요한 요소였다. 또, J는 아주 외향적인 사람은 아니지만, 언제나 유쾌했으며 무엇보다 마음이 따뜻한 사람이었다. 한날은 일에 지칠 대로 지친 무거운 몸을 이끌고, 밤길을 걱정하는 J와의 통화 중이었다.
“오늘 무슨 일 있었어? 발걸음이 너무 슬퍼 보여.”
J는 물었다. 수화기 너머로 오버스럽지 않은, 따뜻한 온기가 전해졌다.
‘발걸음이 슬퍼 보인다...’ 태어나 처음 들은 말이었다. 누군가 내 걸음걸이로만으로도 슬픔을 인지할 수 있다니. 지난 몇 년, 일밖에 모르고, 어쩌면 이대로 살다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텁텁한 생각 끝에, 우울하기까지 했던 일상의 서러움이 터져 버린 걸까. J의 말에, 나도 모르게 펑펑 눈물이 쏟아져 나오고 말았다. 그렇게 서러움이 밀어낸 자리에 터져 나온 울음 끝에는 카타르시스까지 느껴졌다. J는 매사 그렇게 따뜻한 사람이었다. 이번 생은 망했다며, 오래 전, 결혼을 포기했던 내가 ‘이 사람 아니면 난 결혼 안 할 것’이라는 생각을 하기까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누군가는 두 번의 부케를 던져가며 새로운 출발을 했고, 누군가는 진흙탕 같은 싸움이 계속되는 결혼생활을 이어가고 있었다. 나의 시야에는 소소하게 결혼 생활을 잘 해나가는 사람들보다 그런 안 좋은 모습이 더 부각돼 들어왔다. 그럴수록 점점 결혼에 대한 의구심도 함께 커져갔다. 도대체 사람들은 어떻게 결혼을 생각하는 걸까? 주변 결혼한 지인에게 수도 없이 물었지만, 그때마다 대단한 계기들은 없었다. 단지, 공통점이라면 ‘이 사람이다’란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과연 그럴까? 결혼을 포장한 이야기 아니야? 마냥 의심했던 일이, 내게도 벌어졌다.
이 사람이다
어쩌면, 나는 더 이상 누군가를 만나는 것이 즐거움이 아닌, 소모적인 일이 되어버렸을 때도, 마음 한편에 나만의 소울메이트를 찾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웬만하면 천성적으로 잘 맞는 사람, 함께 있으면 유쾌한 사람(일명, 쿵짝, 유머 코드), 사랑을 많이 받고 자란 사람, 학창 시절을 성실히 보냈고, 일에 자부심을 느끼는 사람 등
어찌 보면, 언급한 내용이 그리 대단해 보이는 것은 아닐지 몰라도, 삼십 대 중반이 넘어가면서도 위 내용에 맞는 사람을 만나기란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물론, 외모가 출중하거나, 스펙이 뛰어난 사람은 흔치 않게 찾아볼 수 있었음에도 말이다.
혹시라도 이 글을 읽는 독자 중, 좋은 사람을 만나고픈 생각이 간절한 그 누군가를 위하여! 평소 꿈꾸는 이상형이나 배우자를 구체화해볼 것을 조언한다. 단, 막연한 기대나 바람이 아닌, 현실 가능한 조건 중에 우선순위를 나열해 보는 것이 중요하다. 이런 내용을 설계하고, 계속 그리다 보면 신기하게 내가 우선순위를 생각하는 것들이 더욱 명확해지고, 그런 사람을 만났을 때 알아볼 수 있는 경험을 할 수 있다.
물론, 나는 늘 영화 ‘어바웃 타임’의 대사를 가슴 깊이 새기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