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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본재 Jul 15. 2019

사랑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다

장거리 연애, 그 불가능함에 대하여


그녀의 부모가 돈이 없는 사람들이라는 것은 그다지 큰 문제가 아니었다. 난 그녀를 사랑했고, 내 부모가 돈이 많았으니까. 그리고 무엇보다 나는 사랑만 있으면 모든 것을 극복할 수 있다고 믿었으니까. 그래서 그녀가 돈을 벌기 위해 부산으로 내려가야 한다고 했을 때, 그리고 그 얼빠진 롯데 팬들 사이에서 3년이 넘는 시간 동안 있어야 한다고 했을 때도 난 괜찮다고 말했다. 그렇게 연애를 시작한 지 2개월 만에 우리는 장거리 연애를 하게 되었다.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난 여자의 특징을 말하자면, 그녀들은 무엇보다도 굉장히 현실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녀들의 인스타그램은 매우 소박한 것들 – 맛있는 아이스크림, 귀여운 강아지, 맑은 하늘 등 – 로 채워져 있으며, 철없는 여자들의 주특기라고 할 수 있는 헛된 망상을 꿈꾸지 않는다. 즉,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난 여자들은 인스타그램에 사진을 올리기 위해 남자친구를 찍사로 부려먹지 않으며, 쉑쉑버거 같은 맛대가리 하나 없는 음식을 비싼 돈 주고 사 먹지도 않는다. 이렇게 바람직한 성격을 소유하고 있는 그녀들에게 단점이 있다면, 오래 겪어온 가난으로 인해 성격이 조금 까칠할 수 있다는 것이다.


자랑은 아니지만, 내 여자친구는 가난함에도 불구하고 성격이 까칠하지 않았다. 오히려 굉장히 귀엽고 사랑스럽다는 것이 그녀에 대한 정확한 분석일 것이다. 그녀는 우리 집 근처에 있는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어찌나 친절하고 싹싹하게 편의점 일을 해나가는지 손님이었던 나는 곧장 그녀에게 호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녀는 몇 번이나 나에게 거절의 의사를 표시했다. 하지만 그것은 예상 가능한 일이었다. 그녀는 현실적인 사람이니까. 잘 알지도 못하는 남자에게 쉽게 마음의 문을 열지 않는 것이 당연하다. 오랜 시간 동안 가난을 겪어온 사람은 세상에 ‘드라마틱한 사랑’ 같은 것은 없다는 사실을 일찍이 깨닫는다. 그녀들이 원하는 것은 안정되고, 믿음직한 사랑이다.


출처 : 영화 <초속 5센티미터> 스틸컷


나는 그녀에게 믿을 수 있는 남자라는 인상을 심어주기 위해 노력했다. 너무 대놓고 들이대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아예 편의점에 발길을 끊어버리지도 않았으며 가끔씩 그녀에게 아주 소박한 음료나 과자를 건네기도 했다. 이런 노력으로 나는 그녀의 남자친구가 되었고, 그녀는 나의 여자친구가 되었다. 여자친구가 직장 문제로 인해 부산으로 내려가게 되자 나 역시 한 달에 2, 3번 정도 그녀를 만나기 위해 KTX에 몸을 싣게 되었다. 나는 타카키를 생각했다. 초속 5cm에 나오는 그 남자아이를 생각했다. 그는 멀리 이사 가버린 첫사랑을 만나러 가기 위해 기차에 몸을 싣는다. 첫사랑을 만난다는 설렘, ‘혹시나 그녀가 나오지 않으면 어떻게 하지?’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을 잊게 만드는 사랑이 그의 마음속에 있다. 그리고 그건 부산행 기차에 몸을 실은 나도 마찬가지다. 역으로 마중 나온 그녀를 보자, 나는 세상을 다 가진 듯한 행복을 느꼈다.


사랑에 놀라운 점이 있다면 행복한 순간들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그 자리에는 피할 수 없는 고통들이 자리 잡는다는 것이다. 어느 순간부터 나는 부산에 내려가는 것이 너무 피곤하게만 느껴졌다. 나는 나에게 물었다. ‘왜 나만 부산에 내려가야 하고, 여자친구는 서울에 올라오지 않는 거지? 아무리 돈이 없고 일하느라 피곤하다지만 너무한 거 아니야? 그녀가 더 이상 나를 사랑하지 않는 것은 아닐까?’ 이런 생각 때문에 나는 그녀를 무의식적으로 까칠하게 대했고, 그녀는 이런 나를 달래기 위해 거짓된 웃음을 보이면서 감정을 소모했다. 우리의 통화는 형식적인 내용들로 가득 찼고, 어떨 때는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면서 전화기만 붙들고 있었다. 그렇게 쓸데없는 침묵으로 30~40분 동안 머물러 있으면 '도대체 내가 무슨 병신 같은 짓을 하고 있는 거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의 가난은 나까지 지치게 만들었다. 그녀는 돈을 벌기 위해 일에 매여 있어야만 했고, 그렇기에 사실상 돈뿐만 아니라 시간도 없었다. 나는 그녀와 제주도도 가고 싶고 페스티벌도 가고 싶었다. 한 달에 몇 번 만나서 부산에 있는 국밥이나 먹고 여자친구 집에 들어가 섹스를 하는 것에 질렸다는 소리다. 다른 여자, 그러니까 조금이라도 금전적 여유를 가지고 있는 여자를 만나면 이런 갈증이 해소되지 않을까? 다른 여자, 그러니까 서울에 있는 여자를 만나면 이런 쓸데없는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 내가 왜 이런 것들에 스트레스를 받아야 하고, 내 인생 하나도 제대로 살지 못하고 있는데 여자친구의 인생을 걱정해주면서 살아야 하는 걸까? 서로 힘이 되는 관계가 좋은 관계가 아닐까? 나는 다시 타카키를 떠올렸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첫사랑과 키스를 하고 나는 세상의 모든 것이 바뀐 느낌이 들었다.” 그렇게 그는 첫사랑에게 편지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출처 : 영화 <초속 5센티미터> 스틸컷


나는 이제야 타카키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는 사랑만으로는 모든 것이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지 않았을까? 이 세상은 서로 사랑에 빠진 사람들에게 수많은 시련을 주고, 그 시련은 결코 사랑만으로는 극복할 수 없다는 것을 그는 알지 않았을까? 돈, 시간, 집안, 학벌, 입맛… 어쩌면 이렇게 정해진 것들로 짝을 찾는 것이 더 옳은 선택이 아닐까? 나는 여자친구에게 문자를 보낸다. “이제 우리 그만하는 게 좋을 것 같아.” 12분 후 그녀에게 문자가 온다. “갑작스러워서 좀 당황스럽지만... 알겠어. 잘 지내고, 앞으로 네가 하는 일이 다 잘 되기를 바랄게.” 나는 바닥에 누워 이마에 손바닥을 올린다. 기분이 엿 같고 내가 쓰레기 같은 인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에디터 김세라

안녕하세요, 김세라입니다. 스튜디오 크로아상에서 소설과 예술 작품 리뷰를 하고 있습니다. 꾸준히 글을 써서, 언젠가 아마존에 상품 검색을 하듯이 스튜디오 크로아상에서 예술 작품들을 검색을 하는 날이 오도록 만들겠습니다. 제게 있어서 연애는 ‘잃어버린 시간’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한때 낭만적인 연애를 했던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절대로 그때로 돌아갈 수 없을 것만 같아, 소설로 이야기를 풀어나가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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