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가 아니라더라도, 명절 분위기는 확 바뀌었다
하단 글의 가족 모임은 '5인 이상 집합 금지' 방역 수칙을 지키며 진행했습니다.
어릴 적 명절 시즌에 우리 집 풍경을 돌이켜 보면 엄마는 분명, ‘명절증후군’을 앓고 계셨다. 명절을 앞두고 엄마는 몸져눕거나 잔뜩 예민해져 있어서 말을 걸기도 어려웠다. 당시 도로 사정이 좋지 않은 것도 있겠지만, ‘명절 = 귀성’이라는 공식만이 존재하던 시절이라 연휴가 시작하는 날에는 차가 심각하게 막혔다. 멀미를 해가며 12시간 이상 걸려 도착한 아빠의 고향에서 엄마는 부엌으로 걸어 들어가 연휴 끝나고 집으로 돌아갈 시간에야 겨우 해방될 수 있었다. 쉴 틈 없이 음식을 만들거나 설거지를 하셨기에 할머니 댁에서 엄마는 늘 ‘뒷모습’이었다. '라떼는 말이야' 같은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문득 이번 설 명절에 우리 집이 만들어낸 풍경과 새삼 비교가 되어서다.
이번 설은 시국이 시국인지라 최대한 조촐하게 보내고 싶었다. 뵈러 가기 며칠 전부터 엄마에게 연락해 “어떤 것도 준비하지 마세요.”라고 신신당부했다. 가족이 모이면 사실상 먹는 게 가장 큰 일인데, 두 끼는 배달이나 포장으로 해결했다. 내가 미리 보낸 고기만 같이 굽고, 해산물이나 찜을 포장 혹은 배달해서 먹는 식으로 대체했다. 그랬더니 누구도 불 앞에서 희생하지 않아도 됐고, 오히려 가족끼리 둘러앉은 시간이 길어지면서 더 돈독하게 보낼 수 있었다. 명절 가족사 중 가장 역사적인 해가 아닐까 생각한다.
사실, 우리 집은 제사를 지내지 않은 지 오래됐다. 엄마가 할머니 댁 부엌 가스불 앞에서 녹아내렸던 명절은 꽤 먼 기억이다. 가족끼리만 명절을 보내기 시작한 몇 년 간은 하던 대로 제사를 지내지 않더라도 명절 음식을 하루 날 잡고 하고, 남은 며칠 동안 만든 음식을 먹으며 시간을 보냈다. 시간이 흐르고 언니가 시집간 후, 그 집 제사를 지내고 남은 음식을 나눠먹기 시작하면서 우리 집에서는 더 이상 명절 음식을 만들지 않게 됐다. 뚝 끊은 것은 아니고 서서히 줄였다. 엄마가 반찬으로 나물 요리 정도는 하는 식이었다. 하지만, 이번 명절에는 언니네도 제사를 지내지 않기로 했고, 정부의 ‘5인 이상 집합 금지’ 방침을 지키다 보니 일부만 모여 더 간소해졌던 것이다. 여자의 노동으로 얼룩진 과거의 명절에서 배달 어플로 시작해 끝난 현재의 명절까지. 극과 극을 달리는 변화를 시간의 흐름대로 체감했다.
결혼한 친구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이번 설에 시댁에 간 케이스는 많지 않았다. 부모님이 오지 말라 만류해서 그렇게 한 집도 있었지만, ‘가지 않겠다.’ 먼저 선언한 친구네도 있었다. 대신 공평하게 시댁-친정 둘 다 가지 않는 걸로 했다고. 물론 이유는 코로나 19다. 뉴스에 따르면 올 설에 귀경길 대신 ‘호캉스’를 많이 선택해서 웬만한 호텔은 매진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 사실을 아는가. 코로나 19가 오기 직전까지 명절에 인천공항 이용률은 역대 최대를 매번 갱신했다는 것을. 귀성길 열차표 예매율은 해마다 떨어져 역대 최저치를 기록했다는 것을. 전염병 시국이 아니더라도 명절 분위기는 분명 바뀌고 있고, 우리는 그 변화를 받아들이는 중이다. 코로나 19를 계기로 이전보다 더 단순하고 조용한 명절을 경험한 사람들이 앞으로 명절 문화를 어떻게 변화시켜나갈 지도 심히 궁금하다. 이후 세대는 ‘제사’라는 단어를 역사 교과서에만 배울 수도 있고, ‘여자들이 불 앞에 녹아 없어졌던’ 시절의 이야기를 구전 괴담으로 접할 수도 있겠다.
이번 설에 느낀 건 명절을 그야말로 ‘가족애’를 깨닫는 시간으로 바꾸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 그러기 위해서는 가족 누구도 부담이 없어야 하고, 케케묵은 형식이 있다면 바꾸거나 버리는 결단도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의미는 지금보다 더 퇴색되어 버리고 휴일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닐 테니. 다시 한번 깨닫지만, 코로나 19가 여러모로 큰 일을 해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