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구본재 Jun 14. 2021

계약으로서의 연애에 대한
소심한 변명

사랑은 인간의 언어로 담을 수 없지만 계약은 말할 수 있다.


해가 하늘에 오래 떠 있는 계절, 여름이 오고야 말았다. 나는 여름을 맞아 이사를 했다. 사실 거짓말이고 어쩔 수 없이 독립을 하게 되었다. 사실상 집에서 쫓겨난 것이다. 부모 없이 함께 자란 형제자매는 부모와 함께 자란 형제자매보다 사이가 더 돈독하다고 한다. 나는 부모 없이 자란 세 자매 중 막내다.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싸웠고 지금도 싸우고 있으며 앞으로도 싸울 것 같다. 우리는 왜 이렇게 자주 싸우는 걸까? 엄마 아빠에게 물어보고 싶지만 그들은 아주 옛날에 우리를 떠나버렸기 때문에 물어볼 수가 없다. 


우리 세 자매는 세계 2차 대전에 버금가는 전쟁을 치렀고 나는 패배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언니들은 동맹을 맺어 나를 쫓아내기로 결정했던 것이다. 그들이 치사한 인간이라는 걸 태어날 때부터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로 졸렬한 성품을 가지고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나는 돈이 없기 때문에 독립을 한다는 것이 꽤나 부담스러웠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그녀들에게 항복했고 그들이 원하는 바를 들어주겠다고, 그러니 제발 집에서 쫓아내지만 말아달라고 무릎을 꿇고 빌었다. 사실상 식민통치를 받아들인 것이다. 이 악랄한 인간들 앞에 무릎을 꿇으며 나는 과거 우리 조상들이 일본인들에게 패배하며 느꼈던 굴욕감과 똑같은 감정을 느끼고 말았다.


나의 굴욕적인 사과에도 불구하고 언니들은 기어코 나를 쫓아냈다. 나는 이를 갈며 집을 나왔고 가지고 있는 돈으로 집을 구할 수 있는 동네로 떠났다. 글을 쓰는 지금도 이가 부들부들 갈리고 손가락 마디마디가 떨리며 머리카락은 중력을 거부한 채 하늘로 솟구쳐 있다. 언니들은 2차 세계대전이 어떻게 끝났는지를 기억해야 할 것이다. 나는 아직 죽지 않았으며 기필코 집을 되찾고야 말 것이다. 



새로운 동네로 혼자 오게 된 나는 동네 친구를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하며 네이버 카페, 어플, 그리고 당근 마켓에서 활동을 시작했다. 동네에 있는 빵집, 밥집, 카페 등과 관련된 정보를 얻기 위해서였다. 돈이 많지 않기 때문에 최대한 효율적으로 지출을 하고 싶었고 동네 친구가 나의 이 효율적 지출에 도움을 줄 수 있기를 바랐다.


동네 친구 만들기는 의외로 쉽게 이루어졌다. 강아지와 산책하는 사진을 올린 한 남자에게 먼저 연락했다. 그는 동네 이곳저곳을 강아지와 함께 돌아다니며 사진을 올렸는데, 이 동네에서 안 가본 데가 없는 것 같았다. 강아지를 좋아하지도 않고 싫어하지도 않는 나였지만 그에게는 강아지를 좋아한다고 거짓말을 하며, 동네 친구 하지 않겠냐고 메시지를 보냈다. 그는 좋다고 했고 우리는 그가 정한 카페에서 만나기로 했다.


이 첫 만남을 시작으로 우리는 우정을 쌓았고 결국에는 연인이 되었다. 어떻게 연인이 되었는지 쓰려면 많은 이야기를 해야 하기 때문에 여기서는 생략한다. 다만 내가 그에게 솔직하게 내 상황을 말했다는 것만 분명히 밝히고 싶다. 


“우리가 연인이 된다는 건 당연히 서로 사랑하겠다는 걸 뜻해. 하지만 난 우리 관계가 사랑이라는 추상적 대상에 몰두하기보다는 좀 더 실용적인 것에 몰두했으면 좋겠어. 실용적인 게 뭐냐고? 정신적 안정과 물질적 안정이지. 연인이 된다는 것은 서로가 서로에게 정신적 안정과 물질적 안정을 갖는 데 도움을 주는 거라고 생각해. 이 험난한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 둘이 힘을 합치자는 계약을 맺는 거지. 난 지금 돈이 없고 서울에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해. 우리가 동거를 하게 되면 한 명이 월세를 아낄 수 있을 거야. 그리고 아낀 월세를 생산적인 일에 투자할 수 있겠지. 내가 지금 살고 있는 집은 두 명이 살기에는 너무 좁아. 그러니까 너네 집에서 함께 동거를 시작하는 게 어때? 너에게도 손해는 아닐 거야. 난 요리를 잘하거든. 매일 아침 정말 맛있는 식사를 제공할게. 그러니까 너는 나에게 집을 제공해줘. 네가 이 조건에 찬성한다면 너와 사귈게.”


그가 나에게 고백했을 때 나는 이렇게 말했다. 그리고 우리는 그렇게 한 집에서 살게 되었다.



누군가는 내게 어떻게 조건을 제시하며 연애를 할 수 있냐고 비판할 수 있다. 연애는 서로에게 순수한 애정을 가지는 것이라고 말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순수한 애정은 신의 것이지 인간의 것이 아니다. 인간은 외모나 몸매나 재력이나 지성을 보고 누군가에게 애정을 느낄 수밖에 없다. 내가 부모 없이 자랐기 때문에 이런 생각을 한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이건 부모의 유무와는 상관없는 것이다. 신의 영역을 인간에게 강요할 수는 없다.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조건 없는 사랑을 행하고자 끊임없이 노력하는 것뿐이다.


사랑은 실체를 알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사랑에 대해서는 그 어떤 말도 할 수 없다. 따라서 나는 사랑에 대해 쓸데없는 장광설을 늘어놓는 것보다 나와 남자 친구의 관계가 언제든지 파기될 수 있는 계약임을 인정하고, 어떻게 하면 계약 조건을 두 사람 모두에게 이득이 될 수 있는 조건으로 만들 수 있는지를 고민할 뿐이다. 


끊임없는 노력만이 계약 유지를 가능하게 한다. 나는 그에게 내가 계속해서 매력적인 여자 친구이기를 원한다. 외모 관리와 몸매 유지는 필수이며, 그에게 맛있는 음식을 해주기 위해 노력할 수밖에 없다. 그 역시 나에게 매력적인 남자 친구로 남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우리는 쥐꼬리만큼 들어오는 지금의 수입을 어떻게 늘릴지 함께 고민하고, 좋은 운동 방법을 서로 공유하며, 서로가 정신적으로 힘든 일이 있을 때 옆에서 위로를 해주는 계약을 충실하고도 효과적으로 이행해야 할 것이다.


사랑은 말할 수 없는 것이며, 단지 추구될 수 있을 뿐이다. 따라서 내가 말할 수 있는 것은 계약으로서의 연애뿐이다. 충실하고도 효과적으로 계약을 이행하겠다는 마음가짐이 단순히 ‘사랑하며 살겠다’는 추상적인 마음가짐보다 내게는 더 진실하게 다가온다.


그렇기에 소심하게 우리의 계약으로서의 연애에 대해 이렇게 변명을 해본다.




에디터 김세라

안녕하세요, 김세라입니다. 스튜디오 크로아상에서 소설과 예술 작품 리뷰를 하고 있습니다. 꾸준히 글을 써서, 언젠가 아마존에 상품 검색을 하듯이 스튜디오 크로아상에서 예술 작품들을 검색을 하는 날이 오도록 만들겠습니다. 제게 있어서 연애는 ‘잃어버린 시간’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한때 낭만적인 연애를 했던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절대로 그때로 돌아갈 수 없을 것만 같아, 소설로 이야기를 풀어나가고자 합니다.



<결혼에 대한 좋고 나쁨의 단상> 목차 보러 가기

스튜디오 크로아상 콘텐츠 보러 가기


▼ 웨딩해 콘텐츠 더보기 ▼

연애도 충분한데 왜 결혼을 할까?

연애의 시작에서 권태로움을 생각해야 하는 이유

딩 호구 탈출방! 결혼 준비 함께 나눠요!



매거진의 이전글 그가 제시한 혼전 계약서, 흔쾌히 사인하시겠습니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