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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본재 Jun 21. 2021

전혀 다른 종인 우리가
사랑에 빠질 수 있을까

불가능과 가능의 경계에서 사랑을 외치다.


저기 한 사람이 걸어가고 있다. 뒷모습을 보아하니 머리부터 발끝까지 내 스타일이다. 나란히 섰을 때 적당히 어울릴 법한 키와 내가 좋아하는 스타일로 쫙 갖춰 입은 모습에서 눈을 뗄 수가 없다. 길에서건 대중교통에서건 살면서 이제까지 단 한 번도 모르는 사람에게 먼저 관심을 표한 적은 없었다. 물론 연락처를 물어본 적도 없다. 나는 숫기라고는 찾아볼래야 찾아볼 수 없는 사람이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에야말로 3n년 인생에서 처음으로 용기를 내야 하는 때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사람을 놓치면 왠지 평생 후회할 것 같다는 예감이 강력하게 들었기 때문이다. 지하철 역 입구로 들어가는 그 사람에게로 가볍게 뛰어가 다짜고짜 명함을 내밀었다. 내 선택이 옳았다. 앞에서 본모습은 훨씬 더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다. 뒷모습에 한 번, 앞모습에 두 번 반했다.



연락처를 달라고 하면 꺼려할 거라고 생각했기에 역으로 내 연락처를 먼저 건넸다. 커피 한 잔이라도 가볍게 마실 생각이 있으면 꼭 연락해줬으면 좋겠다고 말하면서. 진심을 담아 호소력 있게 이야기하면서도 상대방이 부담스러워하지 않을 정도로만 나를 어필했다. 상대방은 옅은 미소와 함께 명함과 나를 번갈아 보더니 고개를 끄덕이고는 마저 계단을 내려갔다. 그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왠지 기분 좋은 예감이 들었다.


며칠 후, 메시지가 한 통 도착했다. 전혀 모르는 아이디로부터 온 메시지였다. 의아해하며 프로필 사진을 확대해보니, 그제야 정체를 알 수 있었다. 그 사람이었다. 며칠 전 지하철역에서의 그 사람! 놀란 마음과 기쁨, 당혹스러움이 한데 뒤엉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던 그때, 메시지가 한 통 더 도착했다.


“시간 되시면 내일 만나는 거 어때요? 같이 저녁 먹어요.”


속으로는 망설임 없이 1초도 안 되어 “좋아요!”를 외쳤다. 하지만 바로 답장을 하지 않았다. 왠지 당신의 연락을 기다렸다는 티를 팍팍 내는 것만 같아서 텀을 두는 게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10분쯤 후에 간단한 인사말과 함께 약속 장소와 시간을 담은 메시지를 전송했다. 모태솔로는 아니지만 그간의 연애사가 녹록지는 않았다. 그래서 내일의 만남이 걱정되지만, 일이 여기까지 진행된 걸로 보아 이번만큼은 운명의 여신이 내 편인 것 같아 자신감이 샘솟는 듯하다. 침대에서 일어나 내일 입을 옷을 미리 골라둔다. 빠듯한 출근 준비 시간 안에 괜찮은 옷을 코디하기란 쉽지 않으니 지금부터 미리 준비해둘 필요가 있다. 오늘 밤, 잠이 안 올 것만 같다.



모든 게 완벽했다. 약속시간 3분 전에 예약한 식당에 도착했고, 곧바로 그 사람도 도착했다. 평일 저녁이었기에 다행히 전망 좋은 창가 자리로 예약할 수 있었고, 도심 속 쭉 뻗은 하이웨이 위 차들이 뿜어내는 빛과 도시의 야경이 분위기를 더해주었다. 자주 방문하는 단골 레스토랑이었지만 오늘따라 유독 음식이 맛있었고 와인은 향기로웠으며, 흘러나오는 재즈 음악은 분위기를 돋우는 데 크게 한몫했다. 이대로만 쭉 이어진다면 우리가 연인이 되는 건 식은 죽 먹기보다 쉬운 일이라는 생각이 들 때, 그녀가 폭탄 고백을 했다.


“저… 혹시 제가 사람이 아닌 건 알고 계신가요?”


그렇다. 이 사람은, 아니 ‘이것’은 <인류와 고도로 인간화된 AI 로봇의 공생을 위한 가설 A-52 증명을 위한 연구>에 따라 생산되어 세상으로 나온 로봇이었던 것이다. 인간만큼이나 자유롭고 부드럽게 관절을 사용할 수 있고, 의심의 눈초리로 자세하게 뜯어보지 않는 이상 실제 사람과 다르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없을 정도로 고도로 인간화된 로봇이다. 연구 목적으로 사회에 심어졌다는 사실을 뉴스를 통해 알고는 있었지만 이런 식으로 마주하게 될 줄은 몰랐다. 나는 당연히 매우 놀랐고 동시에 ‘이것’이 나를 계획적으로 속이려 한 게 아니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불현듯 속았다는 생각이 들며 매우 화가 났다.


내 앞에 있던 ‘이것’은, 그 행동이 알고리즘에 의한 것인지 뭔지 기술 문외한인 나는 잘 모르겠지만, 내 표정을 빠르게 읽고는 내가 굉장히 당황스러워하고 있다는 사실에 유감을 표했다. 잠시 포크와 나이프를 들고 어안이 벙벙한 채로 아무런 말도, 행동도 취하지 못하고 멈춰있던 나는 다시금 정신을 차린 후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다는 뻔한 변명과 함께 자리를 박차고 나왔다.



일반인인 나 또한 언젠가는 고도로 인간화된 로봇과 함께 사회에서 살아가게 될 것이다. 이는 사회의 변화와 발전에 따라 발생하는 피할 수 없는 운명과도 같은 일이기에 한 명의 인간일 뿐인 나는 이것을 거부할 수 없다. 하지만 로봇과 사랑에 빠진다? 이건 정말 상상도, 아니 꿈에서조차 생각해본 적 없다. 하물며 머릿속에 그려본 적도 없는 일인데 이렇게 나의 현실에 훅 들어오다니…… 나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할지 정말 모르겠다.


확실히 ‘그것’은 내 스타일이다. 외모도 나의 이상형에 부합했지만, 무엇보다도 우린 말도 잘 통하고 웃음 코드가 똑같았다. 취향이 비슷했고 좋아하고 싫어하는 게 같았다. 이렇게 잘 맞는 이를 또 만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할 정도로. 하지만 이렇게 잘 통했던 우리의 대화가 전부 누군가 심어놓은 알고리즘에 의한 것이었다고 생각하면 소름이 돋는 것도 사실이다. 아까 와인을 마실 때까지만 해도 기분 좋은 취기가 올라왔지만, 지금은 되려 속이 메슥거린다. 이제 난 도저히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정말 모르겠다.




짧게는 몇십 년, 길게는 몇 세기 후에 우리에게 이런 일이 닥친다면, 우리는 어떤 결정을 내리게 될까? 인간과 인간과의 관계만이 ‘진짜 사랑’일까? 로봇을 사랑하는 건 미친 짓일까? 미래의 인류가 어떤 모습으로 사랑하며 살아가게 될지, 어떤 결정을 내리게 될지 몹시도 궁금해진다.




에디터 푸들

앞으로 여러분들께 저의 지나온 연애사를 비롯해 제 주변 지인들로부터 들었던 현실감 있으면서도 공감 가는 사랑, 연애, 결혼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를 들려드리고 또 여러분들로부터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사랑하고 연애하며 그 과정에서 결혼을 고민하고 가끔은 비혼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는’ 수많은 보통 사람 중 한 명의 이야기, 기대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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