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러포즈의 본질은 그 어디로 가버렸을까
나이를 먹을수록 실감하는 게 있다. 바로 마음이 담기지 않더라도 형식적으로나마 챙겨야 하는 것들이 늘어난다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어릴 때는 마냥 즐겁고 기다려지기만 했던 것들이 이제는 부담 때문에 꺼려지기도 한다. 예를 들면 누군가의 생일이라던지 기념일 같은 것들을 챙기는 일이 대표적이다. 어릴 때는 받기만 하는 입장이고 또 받은 만큼 줘야 한다는 생각을 하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성인이 되면 적어도 받은 것만큼 돌려주어야 하고, 상대방으로부터 무언가를 받지 않았더라도 챙겨야만 하는 것들이 생기기 마련이다. 이처럼 살면서 의무감을 가지는 것들의 종류는 매우 다양하지만, 그중에서도 내게는 특히 이해하기 힘든 게 있다. 바로 '프러포즈'다. 그것도 결혼을 앞두고 행해지는 ‘형식적인’ 프러포즈.
내가 생각하는 프러포즈는 서로에 대한 신뢰를 쌓아온 연인 중 한쪽이 "나랑 결혼해줄래? 우리 남은 인생, 같이 행복하게 살자!"라고 하며 삶을 함께 꾸려나가자고 제안하는 것이다. 또 구속받지 않는 상태에서 사람 그 자체만 보고 일생을 함께 할 것을 제안하고 받아들이는(물론 거절할 수도 있지만) 것이 프러포즈의 참의미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요즘 주변에 결혼을 준비하는 커플들을 보면 식장과 스드메, 청첩장 제작을 거친 후 양가 상견례까지 마치고 나서야 결혼을 몇 주 혹은 며칠 앞두고 프러포즈를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프러포즈'라 함은 말 그대로 '제안'을 하는 것인데, 이미 제안이 수락되어 양측이 결혼에 대한 합의를 보고 준비까지 완벽하게 마친 상태에서 다시 또 '결혼 제안'을 하는 모습이 굉장히 낯설고 모순적으로 느껴졌다. 심지어 프러포즈를 할 때 예비 신랑은 예비 신부에게 이미 확인받은 가방과 구두 같은 것들을 준비해놓고 그 앞에서 반지를 끼워주며 "나랑 결혼해줄래?"라고 말한다. 그럼 여자는 감동받은 눈빛과 전혀 예상치 못했다는 듯 얼떨떨한 표정으로 너무나 당연하게도 "응"이라고 대답한다.
도대체 프러포즈의 모습이 왜 이런 식으로 고착화되어버린 걸까? 아무리 생각해도 쉽게 이해가 되지 않는 이런 모습은 아마도 실패하고 싶지 않은 사람들의 심리와 '프러포즈를 받지 않고 식장에 들어가는 건 말도 안 된다'라는 요상한 관행이 혼합되었기 때문이 아닐까. 그리하여 당신 마음이 내 마음 같지 않을 수 있다는 것에서부터 비롯된 걱정 때문에, 모든 것이 결정되어 'NO'라는 대답을 들을 리 없는 상황에서의 프러포즈로 변질된 게 아닐까. 나아가 다른 친구들은 전부 프러포즈받고 결혼하는데 나만 그 어떤 감동 이벤트 하나 없이 결혼할 수 없다, 나에게도 자랑할 거리와 추억할거리 하나쯤은 있어야 한다라는 생각은 내가 언제, 어디에서, 무슨 선물과 함께 프러포즈를 받을지 알고 프러포즈를 받는 기괴한 상황으로 변해버렸다. 어떤 면에서 보나 본질은 흐려지고 고리타분한 형식만 남은 꼴이다.
나 또한 여자이기에 프러포즈와 결혼에 대한 환상이 있던 때가 있었다. 나이 탓인지 현실적인 성격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그런 환상이 사라진 지금, 이런 내가 형식적인 프러포즈의 요상함에 대해 말한다면 그건 한낱 질투로 비춰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꼭 한 번은 짚어보고 싶다. 우리는 무얼 위해서 프러포즈를 하고, 어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그런 거창한 이벤트에 목매는지 말이다.
물론 화려하면서도 빈틈없이 완벽한 이벤트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고, 소박하면서도 예측 불가한 이벤트를 좋아하는 사람도 있기에 프러포즈도 당사자들 좋을 대로 하면 그만이다. 제3자가 왈가왈부할 건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안다. 그럼에도 때론 우리가 과도하게 본질을 잊고 있는 건 아닌지, '일생의 한 번'이라는 허례허식 담긴 말의 독에 빠져있는 건 아닌지 생각해볼 필요는 있다고 생각한다. 뱁새가 황새 쫓다 가랑이가 찢어지듯, 내가 원하는 건지 아닌지도 알지 못한 채 세상의 방식만을 쫓다 지쳐 나가떨어질 수도 있으니 말이다.
앞으로 여러분들께 저의 지나온 연애사를 비롯해 제 주변 지인들로부터 들었던 현실감 있으면서도 공감 가는 사랑, 연애, 결혼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를 들려드리고 또 여러분들로부터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사랑하고 연애하며 그 과정에서 결혼을 고민하고 가끔은 비혼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는’ 수많은 보통 사람 중 한 명의 이야기, 기대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