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나 답게 하는 건 걷기, 그중에서도 길 위의 여행을 무척이나 좋아한다. 언제부터였는지는 모르지만 아마 내가 운전을 못하기에 이 걷기에 더 집중했었던 것 같다. 아내와 세 번의 고양 누리길 세 코스 완주. 가족을 이끌고 처음으로 도전했던 2박 3일간의 올레 세 코스 도전기, 그리고 혼자만의 힐링을 목적으로 훌쩍 떠났던 두 번의 올레길. 모두 그 시간들 속에 다른 의미들은 있겠지만 공통적인 생각은 늘 즐겁고, 무언가 얻어가는 느낌이 들었다는 것이다.
평소에도 가끔씩 산책은 하지만 여행이라는 이름의 걷기는 평소 걷는 행위와는 또 다른 의미가 있다. 걷다가 만나는 꽃들, 사람들, 그리고 이런 길 위의 여러 풍경들은 평소엔 그냥 지나치기 쉬운 아주 평범한 것들이라도 이렇게 훌쩍 목적을 갖고 길 위에 설 때 시선에 들어오는 풍경들은 멋지게 입힌 CG처럼 근사하고, 신비로운 모습을 보여주는 듯하다.
길 위에서 만나는 식당들은 평소 먹던 음식들인데도 그날만은 특별하게 다가온다. 고양으로 이사 오고 처음 길을 찾은 아내와의 고양 누리길 여행에서도 그런 특별한 식당을 만났었다. 이른 봄이었지만 날씨는 적당히 따뜻했고, 그 날따라 황사와 미세먼지도 없는 쾌적한 공기 상태였었다. 지하철로 출발지점까지 이동했던 아내와 난 처음 맞았던 고양 누리길의 설렘 가득한 길 위에서 나이 있는 중년부부의 여유로움도, 젊을 때 기분도 낼 겸 손도 가끔 잡아가며 한 껏 둘만의 시간을 즐겼다.
한 낮이 되어서 출출했던 우린 가끔씩 나오는 식당을 그냥 지나치기를 반복하고 만났던 어느 식당으로 허기를 채우기 위해 들어갔다. 자리를 잡고 나서 둘러본 식당은 이렇게 길 위 여행객을 맞기에 조금은 규모가 큰 식당이었지만 그 규모에 비해 오래된 느낌 때문인지 아늑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몇 가지 되지 않는 차림표에 큰 고민 없이 우린 산채 비빔밥에 막걸리를 시켰고, 조금은 이른 봄이었지만 한낮에 걷고 들어선 곳이라 적당히 땀에 젖은 등을 식히려고 기댄 벽이 시원하게 느껴졌다. 적당히 맛난 나물과 구수한 청국장으로 밥 한 공기를 뚝딱하며, 아내와 잔을 맞댄 막걸리 한잔까지 천국이 따로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기분 좋은 식사시간이었다.
이렇게 길 위에서 만난 식당들은 굳이 다시 가려면 가겠지만 그냥 길에서 만난 식당으로 남기고 싶다. 아마 그냥 밥을 먹기 위해 찾아가면 그 느낌은 살아나지 않을 것 같다. 아내와 찾았던 고양 누리길 두 번째 길 위에서도 특별하지 않은 중식당이었지만 모르고 나선 코스여서 점심시간이 훌쩍 지나도 만나지 못했던 식당을 오후 3시가 다되어서 만났던 중식당이 그리도 반갑고 좋았다. 조금은 많이 칼칼했던 짬뽕에 5월의 한 낮 더위를 시켜줬던 시원한 맥주 한잔은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이렇게 주변 길을 걷는 여행도 좋지만 내게 최고의 걷기 장소는 제주 올레길이다. 사실 내가 길 위의 여행을 좋아하게 된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도 이 제주 올레길에 대한 지인의 극찬을 자주 들으면서부터다. 이렇게 시작된 제주 올레길에 대한 동경은 나날이 다르게 커져만 갔고, 뭉게뭉게 커진 그 소망만큼 실행에 옮기고자 하는 의지는 더 커졌다. 그렇게 꿈꿔왔던 올레길 첫 도전은 가족들과 함께했고, 그때엔 아이들이 어렸지만 2박 3일간의 세 코스 정복으로 난 자신감도 얻었고, 길 위의 즐거움과 감동을 모두 얻었다. 하지만 모든 걸 얻고만 가는 것은 아니었다. 우리 아이들은 내 생각과는 달리 길 위의 여행을 싫어하게 됐고, 제주 올레길을가자고 하면 아직도 눈에 불을 켜고 반대를 하곤 한다.
걷는 사람, 하정우에서는 배우 하정우는 하와이가 자신의 제2의 고향이라고 한다. 아무래도 걷기를 그렇게 좋아하는 배우가 우리 나라안에서는 연예인으로서 자유롭지 못한 영혼이다가 하와이에서는 평범한 우리와 다를 바 없이 편안한 생활을 할 수 있는 게 매력적이었을 거란 생각이 든다. 내겐 배우 하정우와 같이 이런 마음이 드는 곳이 제주도이다. 물론 금전적 여유가 되면 나도 하와이가 좋았을 수도 있겠지만 영어가 그다지 편하지 않은 나에겐 적당히 이국적이고, 늘 갈 때마다 새로움을 주는 제주도가 힐링의 대표적 메카와 같은 곳이다.
난 제주도만 가면 걷고 싶은 욕구가 샘솟는다. 예전 출장길을 나섰을 때에도 3일간의 짧은 일정이었지만 마지막 하루는 아침부터 걷기 위해 출장 때 미리 만반의 준비를 해갔다. 신발도 운동화에 걷기 좋은 복장들도 가방 구석에 챙겨 넣었다. 며칠을 걷는 게 아니라 가방 속에 노트북도 들어있었지만 지금 생각해봐도 걷기에는 적합하지 않은 가방의 무게였다. 그래도 그 짧은 하루가 그간 쌓였던 일상에서의 스트레스를 날려버리기에 충분했고, 길을 가다 만난 작은 카페에서 아아(아메리카노 아이스) 한 잔은 그렇게 시원할 수가 없었다.
그 날 이후 정식으로 혼자만의 시간여행을 꿈꿔왔고, 작년 드디어 혼자 나선 제주 올레길은 내게 이틀간 힐링의 메카로서 진수를 톡톡히 보여줬다. 10월의 올레길은 형형색색 꽃들의 화려함과 이국적인 길 위의 신비로움 그리고 자연 그대로의 포근함, 아늑함과 제주 자연의 웅장함을 그대로 눈에 담고 갈 수 있게 해 줬다. 일출봉에서의 일출은 해가 떠오르는 그 순간이 가슴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흥분 그대로의 감정을 감출 수가 없을 정도로 내게 잊히지 않는 마음속 그림 한 점을 선물했다. 이렇게 이틀간 길 위의 여행은 매년을 기약하는 연례행사로 또 하나 스스로와의 약속을 만들었다.
난 올해도 10월 말에 나만의 힐링 여행을 떠날 예정이다. 난 이렇게 길 위에 설 때면 나를 더 들여다 보고, 다른 건 모두 잊고 길과 나에게만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을 갖는다. 이렇게 주어진 시간을 충분하게 누리고 나면 내게는 얻을 건 얻고, 잊어버릴 건 길 위에 놓고 오는 기분이다. 이렇게 길 위의 여행을 다녀오면 난 조금 더 일상에 충실해지고, 다음을 꿈꾸며 더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다시 찾게 될 올레 10월이 기다려지는 이유이기도 하다. 나를 더 나 답게 하는 길 위 여행의 동경과 계획은 그렇게 오늘도 계속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