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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추억바라기 Aug 28. 2020

아내가 빡쳤다

삼일 만에 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래도 꽃은 뽑지 마세요

 "철수 씨, 뭐가 좀 허전하지 않아요?"

 "글쎄요, 뭘 파헤쳐간 거 같네요."

 "파헤쳐간 거 맞는데 그게 우리가 써놓은 푯말을 뽑아갔어요."




과거 글에도 소재로 나오던 이야기지만 아내와 난 3년 전부터 우리가 살고 있는 아파트 화단이나 아파트 입구의 인도 자투리 땅을 활용해 게릴라 가드닝을 한다.


게릴라 가드닝(영어: Guerrilla gardening)은 정원사가 사용할 법적 권리나 사적 소유권을 갖지 못한 땅에 정원을 가꾸는 활동이다. 여기서 땅이란 방치된 땅, 잘 관리되지 않는 땅을 말한다.

  

  - 출처 : 위키 백과 -


  시작은 아내가 정원에 관심을 갖고, 취미를 가지면서 여러 책들을 보게 되며 공부하고, 여러 사람들과 함께 의견을 나누는 블로그 활동을 하면서부터였고, 실천을 하게 된 건 아들이 중학교 때 학교 가는 길이 꽃길이면 등굣길이 조금 더 기분이 좋아지지 않을까라는 생각에서부터였다.


  아내의 생각과는 달리 아들은 등하굣길에 꽃이 피거나 말거나 눈여겨보지도 않고, 크게 신경을 쓰지도 않는 눈치였다. 하지만 아내는 이렇게 시작한 활동이 아파트 주변을 예쁘게 가꾸고, 좀 더 밝게 만드는 듯하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아내와 난 3년 동안 이렇게 아파트 입구 인도의 자투리 땅에 봄만 되면 씨를 뿌리고, 물을 날라 열심히 가꾸기 시작했다.


  하지만 작년에는 열심히 꽃을 보이던 예쁜 녀석들이 공공 근로하시는 분들의 손에 안타깝게 뽑혀 나갔고, 작년 농사는 그렇게 막을 내려버렸다. 이런 전철을 밟고 나서 아내는 그 인도 옆 자투리 땅을 포기할 줄 알았다. 하지만 나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아내는 올해도 씨 뿌리고, 물 주고 예쁘게 꽃 필 날을 기다리며 공을 들였다. 하지만 무럭무럭 자라나던 꽃들은 채 송이가 터지기도 전에 공공 근로 분들에게 뽑혀 나가 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내는 포기하지 않고, 다시 한번 꽃이 뽑혀나간 자리에 키우던 채송화와 천일홍을 심기 시작했고, 한 동안 꽃이 피기 시작해 어느 정도 보람도 있고, 출퇴근 길에 혹시나 사라진 녀석들이 없는지 찾아보는 재미도 있었다.


  지난번 글에 댓글을 주신 독자 중에 꽃말 표시를 해 놓으면 어떻겠냐는 제안을 주신 분의 의견을 참고하여 우린 푯말을 꽂는 것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우리의 이런 고민을 미리 알기라도 하듯이 푯말을 꽂기 전에 아래 사진에 있던 너무도 예쁘고, 곱게 꽃을 피우던 과꽃이 뿌리째 뽑혀 사라져 버렸다.

꽃송이도 많아서 제대로 폈으면 꽃이 정말 예뻤을 미니 백일홍, 이걸 뽑아갔어요

  "철수 씨, 여기 백일홍 자리였죠? 아이 속상해. 누가 뽑아갔나 봐요."

  "헐, 그러게요. 그 사람 정말 못됐네요. 그 예쁜 걸 자기만 보겠다고 뿌리째 뽑아갔네요."


  너무도 아쉬웠고, 안타까웠다. 우리가 조금 더 일찍 푯말을 꽂았어야 는데 하는 아쉬움이 남았다. 그래도 남아있는 꽃들이라도 지켜야겠다는 신념으로 아내와 난 정성스레 만든 안내성 경고 푯말을 꽂았고, 일주일이 넘는 시간 동안은 큰 문제가 없는 듯 보였다.


  며칠 전 퇴근 준비 중에 아내에게서 깨톡이 왔다. 깨톡의 내용은 사진 한 장을 찍어서 보낸 것이었다. 유심히 사진을 들여다보고 있을 때 아내에게서 전화가 왔다.

처음 푯말을 꽂았던 자리에 우측 사진과 같이 감쪽같이  푯말이 사라져 버렸다

  "철수 씨, 뭐가 좀 허전하지 않아요?"

  "글쎄요, 뭘 파헤쳐간 거 같네요."

  "파헤쳐간 거 맞는데 그게 우리가 써놓은 푯말을 뽑아갔어요."


  정성스레 만든 푯말을 누군가가 뽑아간 사건이 터졌고, 아내는 그 주변에 누가 푯말을 버리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에 주변을 열심히 찾아봤다고 했다. 하지만 아내의 생각과 달리 푯말은 주변에 보이지 않았고, 이내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내게 톡을 보내고 전화로 어이없는 마음을 토로한 것이었다.


  이렇게 우린 푯말을 가져간 그분이 아마도 과꽃을 가져간 분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찍어놓은 사진을 보니 이미 이틀 전부터 푯말이 없었던 것으로 확인되었다. 에고, 그 양반 정말 심보가 고약하다는 생각이 절로 들 수밖에 없었다.


  오늘은 태풍으로 아침 일찍 서둘러 출근길에 나섰다. 늘 지나가던 아파트 후문 길을 걷다 난 원래 푯말이 있던 자리에 쓰러져 있는 푯말을 발견했고, 쓰러진 푯말의 정체가 우리가 잃어버렸던 그 푯말인걸 보고 바로 원래 있던 자리에 꽂아 놓았다. 아내에게 그 사실을 출근길에 알리고 나서 며칠 전 말을 뽑았고, 그리고 며칠 뒤 다시 가져다 놓은 그 사람의 심리를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다시 돌아온 푯말을 조용히 원래 위치에 다시 꽂았다


 '과꽃을 가져간 걸 질책하는 듯 한 푯말 내용에 화가 나 뽑아버렸지만, 3일 만에 양심이 찔려 슬그머니 가져다 놓았나 보다'  


  그래, 그렇게 나쁜 사람은 아닐 거야.

  함께 보는 꽃이라고 생각하고 앞으로는 뽑아가지 않겠지.  난 이건 아내의 끈질긴 집념의 승리라고 생가했다.


https://brunch.co.kr/@cooljhjung/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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