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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추억바라기 Dec 14. 2020

작지만 행복한 소란

자연 생태계에도 있듯이 우리 집에도 천적 관계가 있어요

두부에 무슨 짓을 한 거예요. 정말 최악의 두부 반찬이에요


우리가 사는 생태계는 육식 동물도 있고, 초식 동물도 있고 이것저것 가리지 않는 잡식성 동물도 있다. 이런 생태계의 질서가 유지되는 것은 개체가 많은 동물은 천적이 있기 마련이고, 상위의 포식자는 개체수가 적다. 이런 놀라운 생태계의 섭리로 우리가 사는 세계는 어느 정도 균형을 잃지 않고, 오늘도 자연스럽게 굴러간다.


이런 생태계의 천적 관계가 우리 집에도 존재한다. 평소 우리 집은 화목하고, 단란한 가정이다. 하지만 어떤 이벤트가 있거나 가족 간의 사소한 다툼이 생기면 어김없이 자연 생태계와 같이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균형을 이루기 위해 여기저기 평소같이 않은 모습들이 연출되고는 한다.




아내는 라면을 너무 좋아한다. 하지만 약한 소화기관이 문제가 되어서 아내는 올해부터 라면을 가급적 먹지 않으려고 애쓴다. 이렇게 거리를 두다가도 가끔씩 너무 라면이 먹고 싶으면 슬쩍 내 옆구리를 찔러 라면을 먹자고 꼬드기곤 한다. 특히 아들이 점심을 먹지 않는 토요일에는 이런 유혹이 더 강하게 오나 보다. 왜냐하면 아들은 보통의 고등학생들과는 다르게 라면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래서 아들 점심을 챙기지 않아도 되는 날 중 라면이 무척 생각나는 바로 그런 날 라면을 먹자고 한다.


 "철수 씨, 오늘 점심 라면 먹어요. 지수까지 세 개 끓이면 되겠네요."

 "나야 좋죠. 안 그래도 점심으로 뭘 먹을까 고민했었는데. 금방 끓여서 대령하리다."

 "오~빠!!! 내 스타일 알죠? 라면 불으면 안 돼요."


아내는 내게 무언가 부탁을 하거나 기분 좋을 때 이렇게 코에 비음을 조금 섞어 '오빠'를 외치곤 한다. 듣기 좋은 호칭이라 거절할래야 거절할 수가 없다. 서둘러 파 썰고, 계란 풀고, 김치까지 꺼내서 식탁 위에 젓가락까지 놓으면 기본 세팅은 끝난다. 하지만 난 이렇게 완벽하게 사전 준비를 해도 결정적인 실수를 반복한다. 그것도 매번. 난 20년을 넘게 라면을 끓여왔지만 늘 라면이 불어서 아내의 원성을 산다. 오늘도 예외 없이 그런 날이다.


 "아 진짜, 오~파! 또 불렸어요? 2주 만에 먹는 라면인데 이렇게 협조를 안 해요."

 "이상해요. 이 정도면 되겠다 싶어서 오늘은 조금 빨리 불을 껐는데도 또 불었네요."

 "다른 요리는 잘하면서 라면은 왜 매번 불려요. 일부러 그러는 건 아니죠?"


이렇게 라면을 불린 날은 난 라면 먹는 내내 아내의 눈치를 봐야 한다. 꼭 호랑이 앞에 여우, 고양이 앞에 생쥐처럼 난 라면 앞에서는 한 없이 작아진다. 매번 불리면서 늘 할 말이 없다. 오늘은 아내가 나의 천적이다.



퇴근 후 아들을 뺀 아내와 딸아이 그리고 내가 앉아 저녁 식사를 하고 있었다. 아들은 오늘 저녁  학원 수업이라 먼저 일찍 먹고 학원에 가고 없었다. 밥을 먹으며 아내와 오늘 하루에 대한 이야기를 하던 중 대뜸 아내가 오늘 점심 도시락 반찬에  대해서 물었다.


 "오늘 점심 도시락에 두부 반찬 어땠어요?"

 "응? 어땠냐니요. 괜찮았는데. 맛있었어요. 왜요?"

 "오늘 아침에 두부 붙인 것 밥상에 내어 놓았다가 아들이 어찌나 면박을 주던지요."

 "난 맛있던데, 무슨 문제가 있었나요?"

 "한 입 먹더니 두부에 무슨 짓을 했냐며 최악의 두부 반찬이라고 혹평을 했어요."

 "헐, 아들 요즘 공부한다고 늦게 자서 너무 예민한 거 아닌가."

 "몰라요. 두부에 소금 조금 쳤다고 저렇게 나오니 내가 정말 아들 겁나서 반찬 제대로 하겠어요?"


아들은 평소에는 한 없이 아내와 친구같이 잘 지내다가  밥상 앞에서는 나도 하지 않는 반찬 투정을 원 없이 한다. 이런 아들이 가끔은 조금은 심하다 생각될 때도 있지만 맛있는 반찬은 또 특급 칭찬으로 보답하니 뭐 아내에겐 천당과 지옥을 밥상에서 왔다 갔다 한다고 할까. 암튼 오늘 아침 밥상에서는 아들은 아내의 천적이었다.




코로나로 가을부터 둘째 딸아이는 학교 수업보다 온라인 수업이 더 잦다. 이렇게 집에 늘 있는 시간이 많다 보니 아내와 딸아이는 사소한 걸로 부딪치곤 한다. 늘 사이가 좋다가도 한 번씩 딸아이가 아내의 말을 듣지 않으면 아내는 아들에게 하지 않는 잔소리를 딸아이에게 하곤 한다.


 "지수야, 엄마가 영어 미리미리 해 놓으라고 했잖아. 오늘 영어 선생님 오시는데 아직까지 붙잡고 있으면 어떡해."

 "..................... 네, 알겠어요."

 "수학은 어디까지 했어. 수학도 조금씩 해야지 미루면 한 번에 해야 할 양이 많아서 힘들어."

 "..................... 네."

 "아휴, 철수 씨 지수는 말을 안 들어도 너무 안 들어요. 누구 닮은 거예요?"

 "(당황해서) 저.. 인가요."


퇴근하고 집에 들어오다 이런 상황을 가끔씩 마주한다. 딸아이는 정말 강적이다. 내가 생각해도 너무 예쁘고, 착한 딸이다가도 이럴 때 보면 정말 말을 안 듣는다. 그렇다고 아내의 잔소리를 두려워하지도 않는다. 딸아이는 생태계 교란종(?)이다. 어디에도 굴하지 않고, 그렇다고 누구도 위협하지 않는 그런 특별한 종.  


가끔 있는 작은 소란들이지만 난 이런 일들이 있을 때마다 조금 이상하게 읽히겠지만 더 화목하고, 돈독한 우리 가정을 느낀다. 믿기지 않겠지만 악의가 없는 불평, 불만으로 웃음도 주고, 너무 조용하고, 밋밋할 수도 있는 일상에 기분 나빠지지 않을 정도의 긴장으로 활력을 불어넣는다. 매번 같은 이유로 당하면서도 기분 좋게 웃는 건 나뿐이지 않기에 작은 잡음과 소란이 반가운 듯하다. 가끔 일어나는 소란이 있는 이런 우리 집이 너무 좋다. 난 내 가족이 너무 사랑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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