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아내에게서 곧 아들의 상담 주간이라는 얘기를 전해 들었다. 고등학교 3학년인 아들은 작년부터 본인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으로 학업에 전념하고 있다. (내가 생각하기에) 이례적이기까지는 않지만 지켜보는 부모 입장에서 수험생임을 제대로 느끼는 요즘이다.
작년부터 시작된 큰 아이의 열공 모드는 저러다 지치면 어쩌나 걱정하는 부모 마음을 비웃듯 1년이 넘게 달려오고 있다. 물론 가끔씩 옆에서 보는 우리가 위태위태할 정도로 지쳐 보이는 날들은 있었지만 자신의 페이스를 잘 유지하며 지금까지는 잘해오고 있는 것 같아 대견한 마음이 든다.
지난겨울 아들이 고등학교 3학년을 올라가기 전 겨울방학은 그 어느 시기보다 중요했다. 코로나 사태의 거리 두기나 방역지침에 귀 기울여가며 학원과 독서실을 열심히 쫓아다녔던 수개월이었다. 아이의 몸 고생, 마음고생을 조금이라도 함께 응원하려고 아내가 덩달아 수험생 부모 모드로 돌입했던 것도 그 시기였다. 당시에는 아이의 체력과 기분 등 밸런스에 아내도 촉각을 세우는 하루하루였다.
그렇게 방학을 보내고 난 후 아들은 드디어 고등학교의 마지막 일 년인 3학년이 되었다. 개학을 하기 전까지만 해도 조바심을 내지 않던 아들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들은 잔뜩 어두운 표정으로 집으로 돌아왔다. 걱정스러운 표정과 풀이 죽은 목소리로 아내와 내게 학교 얘기를 꺼냈다.
"애들이 칼을 갈았나 봐요. 분위기가 작년하고 너무 달라요"
"왜 지금 반 분위기가 많이 어색해? 걱정 마 아들. 너도 방학 동안 칼 갈았잖아"
"내가 간 게 그냥 칼이면 애들은 옛날 사극에 망나니들이 쓰던 참수도를 갈았어요"
"에이 그럼 우리 아들은 관우의 청룡언월도쯤 간 걸로 하면 되지"
말은 이렇게 했지만 많이 걱정하는 아들을 보며 난 다시 자신감을 찾기를 마음으로 응원하고, 응원했다. 우리의 바람이 들렸는지 아니면 학업에 매진하다 보니 이런 생각조차 잊어버렸는지 아들은 원래의 제자리 마음 상태로 돌아왔다. 이렇게 평소와 같이 학교, 집, 학원, 독서실을 오가며 일상생활로 돌아왔다.
며칠 뒤 아들은 다음 주가 담임 선생님과 진학 상담주간이라고 얘기해 주었다. 또다시 며칠이 지나고, 아들의 진학 상담일임을 알았지만 아이가 부담을 가질까 봐 난 출근할 때도 별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출근 후 하루가 어떻게 갔는지 모르게 바삐 흘렀다. 퇴근하는 지하철 안에서 아들 진학 상담 결과가 궁금해졌지만 집에 갈 때까지 꾹 참고 퇴근길을 서둘렀다. 그렇게 서둘러 집에 들어가자마자 물어보기도 전에 아내는 아들의 상담 결과에 대해 먼저 말을 꺼냈다.
"오늘 민수 학교에서 상담받고 왔는데 기분이 썩 좋지는 않은 거 같아요"
"왜요? 선생님에게 안 좋은 소리 들었데요?"
"딱 부러지게 얘기는 안 하는데 아마도 기대했던 학교에 진학하려면 더 노력해야 한다고 했나 봐요"
"실망이 컸겠네요. 우리 아들. 그래도 지금까지만 해도 충분히 잘했는데 너무 기운 빼지 않았으면 좋겠네요"
"그러게요. 철수 씨가 아들한테 직접 얘기해 줘요. 아무래도 아빠가 얘기해 주면 아들이 더 용기를 얻는 거 같더라고요"
"그래요? 그렇다면 당연히 그렇게 해야죠"
저녁시간 아들은 독서실에 갔다가 늦게 귀가하기 때문에 밤늦게까지 기다리는 건 아내의 몫이었다. 다음날 내 출근을 고려한 아내의 배려다. 그 바람에 얘기 나온 밤에는 아들과 얘기할 시간이 없었다. 그래서 아들과는 다음날 아침 밥상에서 마주했다. 밥 먹고 있는 아들에게 다가가 이제는 나보다 넓어진 아들의 등을 어루만지며 조심스레 물었다.
"아들, 어제 선생님하고 진학 상담 잘했어?"
"...... 네, 아빠"
"아빠가 엄마한테 들었는데 선생님이 희망하는 대학 가려면 더 열심히 해야 한다고 했다며"
"네, 아무래도 지금 성적으로는 A나 B 대학 정도밖에 못 간다고 그러더라고요"
"아들, 작년만 해도 A, B 대학이 목표였잖아. 아빠는 지금까지 해온 것만 해도 충분히자랑스러운데. 아들정말 잘하고 있는 거야.지금처럼만 열심히 하면 돼. 자신감 가지고 알았지?"
"네~, 아빠"
기분 탓인지 모르겠지만 아들은 조금 전까지와는 다르게 조금 더 밝은 모습이 된 것 같았다. 아침부터 얘길 하는 게 조금 걱정됐지만 얘기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들의 기분도 한결 좋아 보이고, 아침 내 출근길도 한결 가벼워졌다.
누군가에게 꼭 필요한 사람이 된다는 건 매우 설레고 기분 좋은 일이다. 그게 부모, 자식 간이라고 할지라도. 물론 필요에 의해서 사람 간의 관계가 매듭지어지는 것은 경계해야 할 일이다. 하지만 기왕 관계를 맺어 지낼 거면 누군가에게는 꼭 필요한 존재이길 바라고, 그 누군가가 나였으면 하는 생각을 해본다. 오늘 나의 한마디가 아들에게 얼마나 위로와 응원이 되었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그 얘기를 하는 내가 아들에게 위로와 응원을 받은 느낌만으로도 충분히 의미 있는 대화였다는 생각이 든다. 난 아들에게, 아들은 나에게 그런 존재라는 게 그냥 기분 좋은 아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