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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추억바라기 May 28. 2021

힘든 아내를 위해 딸아이가 한 특단의 조치

아내가 3 만원으로 아주 특별한 회원제에 가입을 했어요

퇴근하고 왔더니 조금은 가라앉은 집안 분위기가 몸으로 느껴졌다. 아침부터 고3 아들과 감정 소모로 아내의 기분은 저기압인 듯 보였다. '다녀왔습니다~'하고 큰 소리로 인사했던 내가 다 무안하게 아내의 '네, 그래요'하는 대답은 풀 죽은 아이 목소리처럼 기운이 전혀 없다. 이런 날이면 딸아이나 난 아들과 아내의 눈치를 보느라 늘 조심스럽다.


얼마 지나지 않아 독서실에 있던 아들이 저녁을 먹기 위해 돌아왔다. 아들의 표정을 보니 아침에 내려앉은 기분에서 크게 나아지지 않았음을 알 수 있었다. 고3이라는 벼슬(?) 탓에 평소에도 아내나 난 많은 부분 아이를 위해 양보하며 가급적이면 아이에게 맞추려고 애쓰는 편이다. 하지만 가끔은 아들의 잘못된 습관이나 태도를 보면 참고 참았다 조금은 참견을 하곤 했다. 이럴 때마다 사소한 언쟁이 아들과 우리 간에 조금은 벌어질 수밖에 없는 사소한 틈이 되곤 했다.


그래도 아들의 기분을 조금이라도 가볍게 해 주기 위해 쌓인 감정은 먼발치로 걷어차 버리고 언제 그랬냐는 듯 평소의 모습으로 아들을 대했다. 하지만 아들의 감정은 고3이라는 특수성 때문인지 금세 원위치로 돌아오지는 않았다. 저녁 식사 후 아들은 아침보다 조금 나아진 정도로 다시 독서실을 가기 위해 집을 나섰다.


아들이 가고 나서 아내는 김 빠진 콜라처럼 퇴근 때보다 더 내려앉은 얼굴로 소파에 멍하니 앉아 있었다. 한 참을 앉아있던 아내는 조금 지친 표정으로 내게는 와인 한 잔을, 딸아이에게는 화장을 닦아달라는 부탁을 했다. 금세라도 터질 것 같은 아내의 기분도 조금 누그러트릴 겸 난 와인과 와인잔을 바로 식탁 위에 꺼내놓았고, 딸아이는 아내 기분을 풀기 위한 특단의 상황극을 연출하기 시작했다.


 "어서 오세요, 손님. 저희 알랄라 샬라 뽕뽕 샵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다른 곳보다 저렴하게 손님을 모실게요" 

 "흥, 무면허 업소면서 당연히 저렴해야죠. 그래서 얼만데요?"

 "오늘 처음 오시는 손님이니 오십 퍼센트 할인해서 삼천 원에 모실게요"

 "무면허면서 비싸기도 하네요. 하는 거 봐서 입금할게요"


그렇게 시작한 상황극은 평소와 똑같이 아내와 딸아이의 티키타카로 계속되었다. '제대로 닦아주셔야죠', '서비스가 이게 뭐냐고요', '제 값 받고 하는 게 아니어서 오십 퍼센트만큼 하는 겁니다', '손님 여기서 이러시면 곤란합니다' 등. 그렇게 5분여를 딸아이와 씨름하던 아내는 이내 했던 화장이 다 닦였다는 걸 깨닫고 세안을 하러 욕실로 갔다. 딸아이는 이런 아내를 쫓아 욕실로 들어가 아내의 세안을 돕고, 세안 후 기본적인 케어를 위한 스킨과 로션 서비스까지 해줬다. 이런 딸아이의 서비스에 만족한 아내는 흔쾌히 딸아이 통장으로 삼천 원을 입금했다. 입금을 확인한 딸아이는 아내에게 90도로 감사 인사를 하더니 조용히 소파에 앉아 폰으로 어디론가 카톡을 보냈다. 잠시 뒤 아내의 폰에서 '카톡'하고 알림음이 울렸고, 카톡의 내용을 본 아내는 그 내용을 소리 내어 읽어 주면서 연신 웃음을 멈추지 않았다.


안녕하세요! 이영희 고객님. 서비스 회사 [알랄라 샬라 뽕뽕]입니다~
고객님에 입금이 정상적으로 완료되었음을 알려드립니다 ^^.  
※저희 사이트에 회원 가입을 하시면 정규 고객이 되실 수 있습니다.
회원 가입을 하시고 저희 회사를 더 자주 이용해 주신다면 등급이 올라가고,
등급이 올라가면 더욱더 저렴한 가격으로 저희 서비스를 이용하실 수 있습니다^^~
지금 당장 회원 가입을 원하신다면 010-1253-3333으로 연락 주세요~


아내가 읽어준 이 카톡 내용 때문에 허리가 아파 찜질을 하려던 나도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결국 터져 나온 웃음으로 아픈 허리가 더 아팠지만 기분만큼은 좋다 못해 상쾌하기까지 했다. 아내는 이런 상황극에 제대로 몰입하기 위해 딸아이 카톡에 답을 했고, 또 한 번 딸아이의 답변으로 우리 집은 웃음 폭탄에 초토화가 되고 말았다.

지금 당장 회원 가입을 하겠습니다.
010-1253-3333으로 연락해 보니 없는 번호로 나옵니다.
자세한 사항을 알려주시면 당장 회원 가입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고객님~ 아직 말씀 못 드린 게 있는데요^^
회원 가입을 하시려면 회원 가입비가 별도로 3만 원 정도가 들어요.
근데 저희 서비스를 이용하시려면 회원 가입하시는 게 훨씬 이득이시거든요~^^
회원 가입하시려면 010-xxxx-xxxx로 전화 주세요. 저희 인턴 번호입니다~


여기까지 카톡을 주고받더니 아내는 어디론가 전화를 걸기 시작했고, 이내 내 전화에 진동이 울리기 시작했다. 회원가입을 위한 인턴번호가 내 번호였음을 직감했고, 폰 화면에는 아내의 번호가 떡하니 떴다. 


 "김 인턴님, 고객님이시니까 회원 가입할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네~? 하하. 여보세요. 안녕하세요 회원님~"


딸과 아내의 상황극에 나도 함께 출현하게 됐고, 결국 아내는 딸아이의 통장으로 거금 3 만원을 입금했다. 딸아이는 아내의 기분을 풀려고 시작했던 상황극에서 실제 아내가 입금하자 놀라움과 감사함의 중간쯤 되는 표정이 되어 있었다. 그러고선 급하게 회원 가입 축하 메시지를 아내에게 보냈다. 이 카톡을 받은 아내는 평생 우려먹을 거니까 각오하라며 말과는 다른  애정 어린 시선으로 딸을 지긋이 바라봤다. 

이영희 고객님 입금이 정상적으로 완료되었습니다~  
정규 회원이 되신 것을 진심으로 축하드려요!


아내와 딸의 카톡 메시지

사실 오늘 아내의 일진은 아침부터 사나웠다. 아들과의 감정 소모부터 시작해서 자신을 위해 차려놓은 엄마표 아침밥상을 아들은 손도 대지 않고 학교에 등교해 버렸다. 게다가 화요일마다 찾는 텃밭에서는 아들과의 오전 감정 때문이었는지 함께 하는 지인들에게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며 서운할 수도 있는 표현들을 뱉어냈다고 했다. 게다가 늘 가는 꽃집에서는 항상 반갑게 맞이해 주시는 사장님이 왠지 모르게 자신을 반기지 않는 기분이 들었다고 했다. 이런 감정을 고스란히 안고 집에 온 아내는 저녁때까지 감정이 회복되지 않아 힘이 들어했다. 하지만 눈치 빠른 딸아이의 상황극에 감동받아 '울컥'했고, 딸아이와 티키타카로 웃을 수 있어서 하루를 기분 좋게 마무리할 수 있게 되었다고 했다.


아내에게 오늘은 아침 시작부터 좋지 않은 감정 상태여서 하루가 모두 그렇게 느껴진 하루였을 것이다. 텃밭의 지인들은 오래 함께해 온 분들이라 아마 아내의 그런 감정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을 테고, 꽃집 사장님은 기분이 좋지 않은 일이 있어서 그럴 수도 있는 것이니 자신의 탓을 하지 말라고 아내를 위로했다. 그냥 일 년에 한두 번 올까 말까 하는 아내에게 운이 없는 그런 하루로 생각하라고.


저녁 늦게 감정이 조금은 풀린 것 같은 아들도 아마 내일이면 평소의 다정한 아들로 돌아올 것이다. 어제의 그런 하루는 우리 가족의 하루에서 아무렇지 않은 날로 기억될 것이다. 살다 보면 사소한 문제로 감정도 상할 수도 있는 것이고, 이렇게 따뜻한 웃음으로 그런 상한 감정도 날려버릴 수 있는 게 아닐까. 그런 면에서 우리 집에는 상한 감정을 오래 묵힐 수 있는 상황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것 같다. 상황극의 달인과 티키 타카하는 유쾌한 가족들이 있어서. 오늘 우리 가족의 하루도 그렇게 저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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