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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겨진 자만 슬픈 게 아니고 떠난 자도 마찬가지야

어떤 선택이 누군가에겐 더없이 가혹하다고 느껴질 때가 있다

by 추억바라기

철수야, OO에 작은 아버지 아들 상철이가...


며칠 전 조부모님 기제사를 지내고 아버지께 제사를 잘 끝냈다고 전화를 드렸다. 조부모님 제사는 올해부터 나와 아내에게 늘어난 또 하나 숙제였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여태껏 조부모님 제사는 작은 집에서 지냈다. 하지만 올해부터는 우리 집에서 조부모님 기제사를 지내기로 했다. 이젠 작은 어머니도 연세도 있으시고, 원래부터 있었던 지병과 관절 곳곳의 통증으로 생각보다 이른 시점이긴 했지만 결국 조부모님 제사도 집안 장손인 나와 아내의 몫으로 넘어왔다.


주말 아르바이트에 지친 아내가 제발 조부모님 제사가 주말, 주일만 아니길 빌었지만 떡하니 받아 든 기제사 일이 가리키는 날은 일요일이었다. 늘 이런 일은 예상을 빗나가질 않는다. 갑작스럽게 넘긴 제사라 아버지는 미안한 마음에 제사상차림은 간소하게 지내라고는 했지만 막상 시작하니 이것저것 챙길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그래도 다행인 건 손 빠른 아내 지휘 아래 시키는 일만 착착했더니 제시간에 제사 준비가 끝났다. 짧은 시간에 아내와 손발을 맞춰 그럴듯한 제사상을 준비했다. 그렇게 숨 돌릴 틈 없이 제사까지 지내고 나니 어느덧 시간은 저녁 8시 20분을 넘어가고 있었다. 당연한 수순이었던 것처럼 제사를 지낸 후에는 지방에 계시는 아버지께 전화를 드렸다. 아직 코로나로 인해 지방에서 사람 많은 수도권으로 올라오는 걸 꺼리는 아버지는 할아버지 제사임에도 올라오시질 못하셨다. 제사를 마치고 나서 전화를 드렸다. 아버지는 수고했다는 말 뒤에 조금 심통한 목소리로 생각지도 못한 말을 전하셨다. 너무도 아픈 소식이 귀를 의심케 했다.


"제사 지내느라 고생했다. 식사가 많이 늦었겠네. 우리 손주들 배고프겠구나"

"간소하게 한다고는 했는데 막상 시작하니 그게 안되네요. 아버진 식사하셨어요"

특별히 생색내려고 한 건 아니지만 고생한 예쁜 며느리를 한 번 더 알아주셨으면 해서 아버지에게 평소보다 조금 더 앓는 소리를 해봤다. 하지만 내 귀로 돌아온 대답은 아버지의 칭찬 섞인 웃음이 아닌 친척 동생의 안타까운 소식이었다.

"그래. 먹었다. 참 철수야 OO 작은 아버지 알제? 작은 집 막내 상철이가 오늘 죽었단다"

"네? 늘 제사 지내러 다니던 그 상철이요?"


너무도 뜻밖의 소식이었고, 갑작스러운 조카의 죽음에 아버지도 많이 놀란 눈치셨다. 자세한 사정을 모르는 아버지도 '사고사'나 '자연사'가 아닌 '자살'이라는 정도는 들으셨다고 했다. 생각지도 못한 친척 동생의 죽음에, 그 이유가 자살이라니 더욱 놀랄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 사촌 동생의 아들이니 나와도 그리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애매한 관계였다. 그나마 몇 해전까지만 해도 할아버지 서열의 제사를 집안 제사로 지냈던 덕분에 명절 때마다 잠깐이긴 하지만 얼굴을 볼 수 있었고, 살갑게까진 아니어도 팔촌 지간치고는 안부 인사 정도는 편하게 할 만큼 적당히 가까운 사이였다. 죽은 친척 동생은 중학생 때부터 함께 제사를 지낸 기억이 있으니까 햇수로 십오륙 년 동안 매년 두 번씩은 얼굴을 본 것 같다. 조금 내성적이긴 했지만 그래도 볼 때마다 웃던 밝은 동생이었다.


갑작스러운 죽음에 멀리 지방에서 장례를 치러 직접 가보지 못하는 안타까움도 컸지만 장례를 치를 작은 아버지, 작은 어머니의 상심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 같아 더 마음이 무겁고 아팠다. 전화를 걸어 어떻게든 위로의 말을 전하고 싶었지만 할 수 있는 말이 '얼마나 상심이 크세요'가 고작이었다. 전화기 너머로 들리는 작은 아버지의 흐느낌에 당신의 마음이 이미 깊이 무너졌음을, 어떤 말로도 위로가 되지 않음을 알았다. 더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고, 조용히 다음에 내려가서 인사드리겠다는 말을 끝으로 통화 종료 버튼을 눌렀다. 상철이의 죽음. 장례식을 다녀온 아버지를 통해 전해 들은 그의 죽음의 원인은 극심한 우울증으로 인한 자살이라고 했다. 삼십 대 중반 한창일 녀석의 그 어마어마한 선택에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지막 순간까지도 자신의 선택에 두려움이 무척 컸을 것이다. 작은 어머니에게 마지막 작별 인사 같은 짧은 문자만을 남기고 그는 길지 않은 생을 마쳤다.


얼마 전부터 즐겨보는 드라마 중에 웹툰이 원작인 '내일'이라는 드라마가 있다. 내용은 사람들이 죽고 사는 경계에서 죽음을 관장하는 저승사자들의 이야기다. 하지만 일반적인 저승사자 이야기가 아닌 사람을 살리는 저승사자의 이야기다. 두 주인공 구련(김희선)과 최준웅(로운)은 인생의 끝에서 너무도 힘겨워하는 사람들이 마지막 극단적인 선택인 자살을 선택하려 할 때 이들을 구원을 하기 위해 자신의 일을 하는 저승사자이다. 이런 저승사자들이 자살을 하려는 사람들을 구하고, 다시 살아갈 수 있는 용기를 준다는 게 주요 스토리다. 재미있게 보는 드라마지만 얼마 전 한 장면에서 안타까운 대사를 듣게 되었다. 인연의 붉은 실로 연결되어 있는 사람들은 몇 번을 다시 태어나도 결국 다시 만나게 되어 있지만 자살을 하게 되면 서로 이어져있던 그 붉은 실이 끊어져 앞으로는 두 번 다시 그 인연을 만나지 못한다는 이야기였다. 자살이 얼마나 크고, 무겁고, 무서운 일이라는 경각심을 알게 해주는 대사였다. 하지만 막상 그 현실에 맞닿은 사람의 입장에서는 현실의 무게가 얼마나 무섭고, 두려웠으면 그 끈을 자를 생각을 했을까 하는 마음에 더 짙은 안타까움이 내 머릿속을 괴롭힌다. 곁을 떠난 동생을 생각하며 제발 다음 생에는 조금 더 좋은 인연으로 좋은 삶을 살았으면 하는 마음을 가져본다.



"몇 번을 다시 태어나도 결국은 다시 만나게 될 거라는 거지. 서로 인연인 사람들은 영혼 너머에 붉은 실로 연결되어 있어. 스스로 그 실을 끊지 않는 한 몇 번을 거듭 태어나도 다시 만나게 돼"

"스스로 끊는다는 건 자살인가요?"

"그래 자신과 관련된 모두와의 인연이 끊기는 벌을 받는 거지"

"너무 가혹하네요. 모든 인연이 끊기고 다음 생에도 만나지 못한다는 게..."

"너도 봐서 알겠지만 남겨진 사람만 슬픈 게 아니야. 떠난 자도 마찬가지야"


『MBC 드라마 ‘내일’ 중에서』




자신이 선택할 수 있는 게 있고, 선택할 수 없는 것이 있다. 내가 생각하는 인간의 죽음은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는 선택이 아닌 결정의 영역이다. 하지만 이 죽음에도 예외라는 것이 있다. 자신의 선택으로 생을 마감하는 게 바로 그것이다. 신의 영역으로 운명이라는 포장 아래 대부분의 사람들은 조금이라도 건강하고, 행복한 삶을 오래오래 영위하다가 그 마지막 결정을 신의 선택에 조금의 아량을 기대하곤 한다. 하지만 이런 죽음과는 별개로 자신의 의지로 운명을 밀어내고 생을 마감하는 이들이 종종 있다. 그리 선택할 수밖에 없는 이유야 저마다 다르겠지만 모두 결코 행복한 선택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들의 무게를 가늠할 수는 없지만 그 절망에서 벗어날 또 다른 선택도 있지 않을까 감히 전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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