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그머니 잠이 깼다. 눈꺼풀은 무거웠지만 억지로라도 눈을 뜨려고 애썼다. 새벽까지 마셨던 술이 아직도 깨지 않았는지 머리가 무겁다. 분명히 알람이 울려야 할 시간이 지났을 듯싶지만 알람 소리를 들은 기억이 없다. 자취하는 방 창이 좁은 데다 커튼까지 쳐있어 시간관념이 없는 몽롱한 상태가 이어졌다. 무거워진 몸을 일으키려는데 몸이 물먹은 솜처럼 무거워서 쉽지 않았다. 하지만 평일이라 출근 준비를 해야 해서 서둘러 몸을 일으켰다.
핸드폰을 찾았다. 한쪽 머리맡에 있어야 할 내 폰이 손에 잡히지 않는다. 조금은 '쎄'한 느낌에 깨지 않던 잠도 후다닥 달아났고, 서둘러 좁은 내 방에 유일한 빛인 형광등을 켜기 위해 스위치를 올렸다. 갑자기 환해진 형광등 덕에 잠시 눈앞 시야에는 아무것도 들어오지 않았다. 몇 초가 지난 후에 다시 부릅뜬 눈으로 들어오는 벽에 걸린 시계의 시간이 남아있는 졸음마저 안드로메다로 날려 버렸다.
12시가 넘었다. 이게 도대체 어찌 된 일인지 가늠이 되지 않는다. 서둘러 14인치 브라운관 TV를 켜봤다. 정오 뉴스가 나오고 있다. 남아있던 숙취가 사라졌고, 등 뒤로 식은땀이 흐른다. 어제 일이 기억에 없다. 정확히는 집에 찾아온 기억이 없다. 지금 상황에 대해 조금 더 확실히 깨닫기 위해 급하게 회사 동료에게 전화를 걸려고 핸드폰을 찾았다. 역시나 머리맡에도, 가방 안에도, 좁디좁은 내 방 어디에도 핸드폰은 없다. 아마 어제 술자리 이후에 어딘가 분실한 듯하다. 당연한 패키지 분실로 생각은 됐지만 막상 지갑까지 가방에 없으니 당황스럽다. 어떻게 해야 할지 판단이 서질 않는다. 현실감도 없고, 자꾸 도망가고 싶은 생각뿐이다. 이게 다 술 때문일까. 어렵게 회사에 입사하고 난지 삼 개월이 지났다. 이제 겨우 수습을 끝냈는데 다시 회사를 알아봐야 하나 싶은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간다. 2001년 이른 봄, 난 그 해 최고로 불행한 하루를 만났다.
금요일 오후 12시 5분, 마음은 어느새 조바심을 내고 있었다. 기쁨의 조바심. 울려온 카톡에는 아내의 반가운 메시지가 눈에 들어왔다.
'똑똑, 저기요'
'어디세요?'
'여기 5번 출구 앞인데 여기 아닌가요? 조금 쌀쌀한데 얼른 나와요'
'추운데 다시 지하도에 내려가 있어요. 3번 출구 나가는 곳이요. 지금 바로 나갈게요'
몇 주간의 과중한 업무에 몸도 마음도 많이 지쳐있었다. 하지만 그 끝도 얼마 남지 않았다. 오늘이면 최종 작성해야 할 제안서 작업이 모두 끝난다. 마침 내일이 생일이고 해서 아내는 해마다 그래 왔던 것처럼 두 시간 가까운 멀고 먼 길을 점심 한 끼 함께 하려고 달려왔다.
며칠 전 출근길부터 아내는 금요일은 시간이 괜찮냐고 몇 번을 물어왔다. 확신은 없었지만 목요일까지만 바쁜 일이 정리되면 금요일이면 잠깐 숨 돌릴 틈은 있다고 아내에게 전했다. 예상은 했지만 역시 예상대로다. 금요일 아침 출근하려던 날 붙들고 아내는 맛있는 점심 사주러 갈 테니 점심 메뉴를 골라놓으라는 기분 좋은 인사를 건넸다. 그렇게 기분 좋은 내 완벽한 하루는 시작됐다. 회사로 찾아온 아내와 함께 맛있는 점심과 커피 한잔으로 애피타이저 같은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짧아서 아쉽기는 했지만 단지 완벽한 하루의 시작일 뿐이었다.
토요일이 생일이었지만 토요일 종일 아르바이트가 잡혀있는 아들을 배려해서 가족 생일 기념 외식은 금요일 저녁으로 잡았다. 미리 회사에 얘기하고 퇴근을 서둘렀고, 우리 가족은 그렇게 오랜만에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생일 기념 저녁 식사를 함께 했다. 맛있는 스테이크와 기분 좋은 샐러드를 곁들여서 행복한 만찬을 즐겼다. 그렇게 즐거웠던 식사를 마치고 아쉽지만 우린 내일을 기약했다.
생일 당일의 시작은 아내가 일하는 근처에서 점심을 모두 함께 하기로 했다. 주말 점심을 네 식구 모두가 먹은 게 얼마만이던가. 아내와 아들이 아르바이트를 시작한 2월부터 못했으니 2개월도 훌쩍 넘어서 3개월이 되어가는 시점이다. 다행히 아이들 모두 아빠 생일이라 의기투합하여 짧은 점심시간을 함께했다.
짧지만 즐거웠던 점심시간을 뒤로하고 아들은 3시부터 시작하는 아르바이트 때문에 일하는 곳으로 이동했다. 딸아이와 난 아내가 일하는 곳 근처 카페에서 아내가 끝날 때까지 티 타임을 갖기로 했다. 아내의 아르바이트는 두 시간만 지나면 끝나기 때문에 딸아이와 함께 시간을 보내며 아내를 기다렸다. 오붓한 두 시간이 순식간에 지나고 아내와 함께 근처 백화점으로 이동했다. 괜찮다고 했지만 아내가 굳이 생일 선물을 사주겠다고 하는 통에 내 재킷을 사러 백화점으로 갔다. 아낸 통 크게 또 한 번 지갑을 열었고, 덕분에 근사한 여름 재킷을 구매할 수 있었다. 쇼핑을 마치고 집에 들어가기 아쉬워 발길을 옮긴 곳은 호수공원. 갑작스럽게 오른 기온 탓에 늦은 오후가 되었음에도 조금은 덥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부쩍 늘어난 호수공원 인파들이 일상으로 복귀가 머지않았음을 느낄 수가 있었다.
공원 산책을 조금 즐기다가 아내의 제안으로 자전거를 타게 됐고, 자전거를 탈 수 있는 사람이 나 밖에 없다는 이유로 우린 난생처음 패밀리 자전거를 탈 수 있었다. 운전도 못하는 내가 아내보다 잘하는 운전이 그나마 자전거 운전이었는데 패밀리 자전거는 네 바퀴에 걸맞게 운전대도 자동차 핸들과 유사했다. 덕분에 페달을 저으면서 연신 아내에게 지도 편달을 받았다. 당연히 운전 경험이 없는 딸아이에게도 기회가 주어졌고, 그 뒤로는 내겐 두 다리의 동력만이 필요했다. 길진 않았지만 난생처음 패밀리 자전거도 타보는 호사를 누린 호수공원 데이트를 마치고 우린 조금은 허기져가는 배를 채우기 위해 식당으로 이동했다. 길어진 해 덕에 7시가 다되어 감에도 아직 깜깜하진 않았고, 호수공원 가던 길에 눈여겨봤던 대패삼겹살 식당으로 이동해 야외 같은 실내에서 즐거운 저녁식사로 하루를 마무리했다.
최근 한 달 가까이 가족과 시간을 많이 갖지 못했다. 늘 아내와 아이들에게 미안했지만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으려는 욕심을 아직도 포기하지 않는 날 두고 늘 '괜찮아', '너무 애쓰지 마' 같은 말로 응원하던 아내도 요즘에는 내 건강이 걱정이라는 말이 부쩍 늘었다. 살면서 다툼 한 번 하지 않는 사이가 없겠지만 우리 부부는 그 사소한 다툼조차 감사해하고, 가끔 찾아오는 이벤트 정도로 생각할 때가 많다. 그만큼 다툴 일도 없지만 다퉈도 감정은 빼고 대화를 하려고 하고, 긴 시간을 감정 소모로 서로를 괴롭히는 것을 거부해 욌다. 최근 갖지 못했던 가족의 시간을 이틀간 몰아해서 그런지 밀린 이자 받은 생각에 부자 된 기분이다. 내일이 오늘보다 더 좋아지면 좋겠지만 이런 일에 큰 욕심이 없는 우리다. 왜냐하면 우린 지금도 충분히 행복하니까.
'인생의 어느 날, 난 날 가장 행복하게 해 줄 수 있는 사람을 만났다. 여전히 우린 사랑하고, 날 행복하게 해주는 사람과 난 여전히 오늘을 잘 살아가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