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말 오랜만에 혼자 계시는 아버지를 찾았다. 한 동안 주말 아내의 일 때문에 아내와 함께 가지 못했는데 아내의 아르바이트가 끝나기 무섭게 아버지 댁을 방문했다. 주말 이틀간의 방문이었지만 자주 찾지 못하는 탓에 어머니를 모셔둔 봉안당에도 들러야 했고, 아버지를 결에서 잘 챙기시는 작은 아버지, 어머니댁에도 들러 안부인사를 여쭤야 했기에 짧은 일정에 몸도 마음도 많이 바빴다.
그중에서도 평소에 하지 않던 중요한 약속을 하나 잡고 방문했던 터라 평소보다 시간 여유는 더 없었다. 그 약속은 집안에 가장 큰 어른이신 큰 당숙 어른과의 식사 약속이었다. 아내의 요청도 있었고, 내 마음도 아내와 크게 다르지 않아서 내려가기 전 미리 아버지께 두 어른들의 시간을 여쭤보고 식사를 함께 했으면 좋겠다고 약속을 잡아달라고 해놓은 터였다.
어머니가 계시는 봉안당을 들렀다 작은 아버지, 작은 어머니를 뵙고 나서 큰아버지(당숙), 큰어머니와 저녁 약속을 한 장소를 찾았다. 여섯 시 약속이었지만 조금은 서두른 탓에 우린 약속시간보다 조금 일찍 도착할 수 있었다. 십여 분이 지나 여섯 시를 조금 넘긴 시간이 되자 두 분이 식당으로 들어오셨고, 이내 마스크 위로 밝아진 눈만 봐도 우릴 반갑게 맞아주시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안녕하셨어요. 큰 아버지, 큰 어머니"
"그래 철수야. 넌 잘 지냈냐? 애기도 잘 지냈니?"
아내가 시집왔을 때부터 아내를 애기라고 부르던 큰 어머니는 여전히 아내에게 '애기'라고 부르며 친근함을 뽐내셨다. 잠깐 서로의 건강과 안부를 물으며 오랜만에 만난 반가움을 표했고, 미리 예약해놓은 자리에 아버지를 포함해서 다섯 명이 자리에 앉아 식사를 주문했다. 혼자 계시는 아버지와도 당연히 사촌형제 지간이니 사이좋게 지내는 게 당연했지만 늘 곁에 있지 못하는 자식으로서는 그 당연한 관계도 늘 고마울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오늘은 더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함께 시간을 가졌으면 했고, 두 분이 좋아하시는 쇠고기를 아내와 난 열심히 구워가며 두 분과 많은 대화를 나눴다.
"그래 애기야, 우리 효린이랑은 여전히 잘 지내지?"
"그럼요. 아가씨가 너무 바빠서 자주 보지는 못하지만 자주 연락하며 잘 지내요"
그렇게 두 분의 딸인 여동생 얘기가 나오면서 우린 여동생의 예전 얘기를 들을 수 있었다. 두 분의 말로는 여동생이 지금은 많이 부드러워졌는데 예전에는 고집도 셌고, 무엇보다 성격도 있어서 사람들에게 쉽게 곁을 내주는 성격이 아니었다고 했다. 학교를 다닐 때도 그랬지만 대학을 결정하는데도 자신의 소신을 꺽지 않았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중에서도 여동생이 직장을 다닐 때의 일화는 정말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여동생이 입사한 회사는 특정 솔루션을 납품하는 회사였는데 비서실이 있었을 정도로 제법 큰 회사였다. 처음에 기획실로 입사했던 여동생은 한 동안 근무했던 기획실에서 비서실로 부서가 변경됐다. 아마도 일처리가 깔끔하고, 영어 회화 능력 등을 인정받아 비서실로 전배 된 것 같았다. 비서실에서 한 동안 잘 지내는 듯싶던 동생에게 사건이 생긴 건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나서였다고 했다. 별 탈 없이 바쁘게 지내던 여동생에게서 큰 아버지에게 전화가 걸려온 건 늦은 밤 시간이었다.
"여기 XX 경찰서인데요. 김효린 씨 댁인가요?"
경찰서라는 얘기에 조금은 놀랐지만 큰 아버지는 놀란 가슴을 가라앉히고 무슨 일인지 물었다.
"네, 효린이가 제 딸인데 무슨 일이죠"
"다름이 아니라 김효린 씨가 쌍방 폭행으로 경찰서에 있으니 보호자 분이 오셔야 할 것같습니다"
큰아버지께서는 많이 놀라기는 했지만 전화를 끊고 서울에 사는 조카에게 전화를 걸어 XX경찰서에 가라고 전했다. 늦은 시간이라 큰아버지가 계시는 지방에서 서울까지 가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그렇다고 내일 아침까지 기다렸다가 가기에는 당신 딸이 걱정이 돼서 그냥 있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서울에 있는 나이가 있는 조카에게 동생에게 가보라고 부탁했고, 시간이 조금 지나 경찰서에 갔던 조카가 전화를 걸어왔다.
"삼촌, 사건 경위가 좀 어이가 없네요. 효린이한테 따귀를 맞았다는 녀석이 효린이 직장 선배고요. 그 녀석이 먼저 따귀를 때려서 효린이도 같이 따귀를 쳤다네요"
얘기는 여동생과 쌍방폭행을 한 사람은 다름 아닌 같은 비서실의 선배였고, 회식이 있던 그날 집이 같은 방향이란 이유로 함께 택시를 탔다가 아마도 시비가 붙었다고 했다. 함께 근무할 때부터 동생에게 마음에 있었던 동생의 직장 선배는 택시 이동 중에 동생에게 고백, 회유, 협박 등을 일삼으며 이동했고 동생이 이를 듣다가 거절, 대화, 무시 등을 하면서 폭행까지 가게 된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그 얘기를 듣고서 큰아버지는 한동안 말이 없었고, 잠깐의 시간이 지난 후 조카에게 그 직장선배라는 사람을 전화 통화할 수 있게 바꿔달라고 했다. 처음에 불편한 기색으로 전화받기를 거부하던 그 남자는 이내 결심이 섰는지 전화를 받았다. 하지만 한 소리 들을 거라는 걱정과 심하면 자신도 큰소리를 내보려던 결심의 중간쯤 어딘가의 표정은 금세 무너졌고, 조금은 어이없어하는 표정으로 전화를 다시 조카분에게 넘겼다.
큰아버지가 전화를 받고 그 선배에게 한 얘기는 이러했다고 했다.
'이보게. 내가 딸 가진 부모로서 한 마디 하려는 게 아니고 같은 남자로서, 인생 선배로서 한마디 할까 해. 아니 마음에 있는 여자를 꼬이려면 자네와 같은 행동으로는 절대 호감을 받을 수 없네. 게다가 남자가 못났게 여자에게 손찌검이 뭔가. 방법을 달리해보게'
대충 이런 내용이었다고 했다. 얘기를 듣고 있던 난 동생의 쌍방폭행도 놀라웠지만 자신의 딸을 때린 사내에게 감정을 내리고, 이성적으로 얘기해서 사과와 함께 사건을 일단락시킨 큰아버지의 재치 있는 대화법이 신기하기고, 놀랍기도 했다.
큰아버지는 항상 책을 많이 읽으라고 하신다. 나이가 여든 살이 훌쩍 넘기셨음에도 아직까지 현역은 아니지만 한 회사의 고문으로 일하시며 컴퓨터와 독서를 놓지 않으시는 열정적인 분이시다. 독서는 늘 많은 지식을 채워준다고 하신다. 책을 많이 읽으면 그만큼 견문도 넓어지고, 다른 사람과의 대화에서도 못 알아듣거나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들이 해소된다고 말씀하신다. 지금은 나이가 들어 오랜 시간 책을 보는 게 어렵지만 50, 60대까지만 해도 일 년에 칠십여 권의 책을 읽으셨다고 할 정도로 많은 책을 읽는다.
"철수야, 예전에 내가 책을 살 때는 항상 두 권씩 책을 샀어. 왜 그런지 아니? 그렇게 두 권을 사면 책을 빨리 읽을 수 있어서 좋아. 첫 번째 잡은 책을 보면서 항상 같이 샀던 다른 책을 생각하거든. 그 책을 빨리 읽으려면 지금 책을 빨리 봐야 하니까"
대화를 잘하는 사람들은 저마다 방법이 있다. 뛰어난 화술을 바탕으로 많은 말을 쏟아내지만 정작 지겹지 않고, 오히려 긴 대화에 빠져들게 만드는 사람이 있고, 방대한 지식의 양으로 분야마다 적당한 지식의 방출을 통한 언변의 대가도 있다. 하지만 정작 내가 가장 대단하게 생각하는 대화를 잘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고, 필요할 때마다 적당한 공감과 필요한 자기주장을 하는 대화법이라는 생각이 든다.
살면서 다양한 사람들과 많은 대화를 하면서 산다. 조금은 주도적으로 대화를 이끌어가야 할 때도 있다. 업무 때문에 해야 할 대화가 그렇다. 고객을 설득하고, 이해시켜야 영업도 조금 더 효과적으로 할 수 있고, 내가 갖고 있는 기술력이나 제품의 신뢰도도 쌓일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누군가의 얘기를 주로 들어야 할 때도 있다. 단지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대화를 충분히 리드할 수 있음을 종종 배우고는 한다. 꼭 말을 많이 해야 대화를 이끄는 사람은 아니다. 충분히 들어주고, 공감해주며 필요에 따라 위트 있게 혹은 진솔하게 자신의 생각을 얘기하는 대화법 또한 좋은 대화의 자세임을 알아야 한다. 쉽지는 않지만 그런 대화법은 나이가 들면 더 익숙해져야 하는 대화법임을 절실히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