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언젠가 죽으니까요. 그래서 생은 더 아름다운 거고. 그래서 기억 돌아오고 처음 든 생각이 오늘이 마지막이라면 이 기억이 내 사랑하는 사람의 마지막 기억이다. 그러니 매 순간 죽어라 살고 사랑해야겠다 그랬어요.
- tvN 드라마『도깨비』 중에서 (2016년)
오랜만에 팀 회식이었다. 일이 많다 보니 스트레스도 많고, 할 말도 많을 수밖에 없었다. 십여 명의 무리가 한꺼번에 이야기를 하니 소리를 쳐야 들릴만큼 식당 안은 시끄러워졌다. 부서장 포함해서 사업본부 책임자까지 함께 한 자리다 보니 그간 쌓였던 불평, 불만 등이 여기저기서 쏟아졌다. 술의 힘을 빌리기 위해선지, 아니면 답답했던 속을 술로 위로하려고 했는지 늦은 시간도 아닌데 다들 술이 건아하게 오른 지 오래다. 술병이 빠른 속도로 테이블 위에 하나, 둘 늘어나더니 빈병을 놓을 수 없을 만큼 술병이 늘었다.
술잔이 연거푸 채워지고, 비워지기가 여러 차례다. 보통 회식은 팀워크를 더 돈독히 하고, 쌓였던 피로와 팀원들 사기진작을 위한 목적이 가장 크다. 하지만 현실은 늘 그렇기 못하다. 그날의 술자리도 마찬가지였다. 회사 얘기는 회식자리에서 '불문율'처럼 금지의 대화로 말은 했지만 일하는 사이끼리 회사 얘길 빼면 무슨 얘기가 남겠는가.
오늘도 회식 목적에 역행하는 회사 얘기가 주를 이뤘다. 처음 회식 시작할 때와는 다르게 술이 들어갔더니 얘기가 조금씩 거칠어지고, 이젠 대놓고 훈계다. 분위기가 냉탕과 온탕을 번갈아 오갈 때쯤 난 자리에서 일어났다. 벽에 걸린 식당 시계는 9시가 되기 10분 전이다.
'저 먼저 들어가겠습니다'
'어? 얌마 너 또 아들 목욕시킨다고 내빼냐?'
'헤헤, 어젠 못 시켰으니 오늘은 꼭 제가 해야 합니다. 죄송합니다'
막상 편하게 일어나 자리를 벗어났지만 이렇게 익숙한 모습이 되기까지 꽤나 어려움이 많았다. 대리라고 직함을 단지 얼마되지도 않았지만 팀에 실질적 막내 시절이었다. 선배들에게 넉살 좋게 행동은 했지만 처음에는 '빠졌다', '나 때는'이란 말을 가장 많이 듣고 퇴근길에 올랐다. 그래도 회식자리에서조차 이렇게 여러 차례 뺐더니 팀장도, 부서장도 처음과 다르게 포기하는 모습이었다.
큰 아이 목욕은 특별히 야근이 있지 않고는 꼭 내가 시키려고 애썼다. 이젠 스무 살도 훌쩍 넘은 아들 녀석이지만 우수게 소리로 가끔 아빠가 널 그렇게 키웠다고 너스레를 떤다. 아들 반응이야 그냥 싱겁게 웃고 말지만 난 그 시절 내 행동에 나름 자부심이 있었다.
가족 내 부부의 역할은 각각 다르다. 가부장적인 과거 가족사회를 보면 오히려 명확히 구분 지어진다. 아버지는 경제적인 책임을, 어머니는 육아와 가사를 전담했다. 하지만 시대가 변하고, 세대가 바뀌면서 가족 구성원의 역할은 크게 구분되지 않게 되었다. 집안의 경제를 맞벌이라는 체계 아래 부부가 함께 공동으로 책임지고, 가사도 적절히 분담하는 게 현실이다. 막상 경제권을 남편이 전담한다고 하더라도 육아와 가사를 혼자서 부담하기에는 아내의 부하가 심할 수밖에 없다. 슬기로운 직장생활만큼이나 유연하고, 현명한 가정생활을 꿈꾸는 남편이라면 당연히 육아와 가사를 분담하고 있을 것이다.
1인 가구비율이 34퍼센트가 넘는 요즘 결혼을 했어도 햇가족이 일반적이다. 아이가 둘이 있으면 '다복'하다는 소리를 들을 정도이니 가족의 의미가 더욱 단순해졌다. 아직은 아니어도 인구절벽은 멀지 않은 미래다. 예전에는 아이 중심의 가족이었다면 이젠 부부 중심의 가족이다.
내 주변에도 결혼하고 아이 없이 둘이서 지내는 부부가 제법 있다. 늦게 결혼한 것도 이유이지만 아이를 낳아서 키우는 것보다 둘이서 행복하게 사는 걸 원하는 부부가 더 많다. 인식의 차이이지만 가장 원초적인 종족 번식의 본능보다 '나'를 중심으로 생각하는 자기애가 더욱 중요해졌다는 생각이 든다.
난 아내에게 사랑과 신뢰를 아직까지 받고 있는 편이다. 결혼 23년 차임에도 이런 사랑과 신뢰는 어디서 나오는 걸까 생각해 봤다. 아내는 입버릇처럼 얘기하는 한 가지가 연애때와 결혼 후가 크게 달라진 게 없다는 게 그 첫 번째다. 물론 연애 때만큼 뜨겁지는 않지만 아내에 대한 배려와 사랑은 스스로도 크게 다르지 않음을 알고 있다. 이런 일관된 마음이 아내에게는 신뢰를 주지 않았을까 싶다. 게다가 앞의 이야기는 소싯적 내 이야기다. 큰 아이를 낳고 혼자 육아하는 아내를 위해 적어도 몇 가지는 꼭 내가 전담해야겠다는 주의를 갖고 있었다.
예를 들어 위의 에피소드처럼 목욕이나 새벽에 아이가 깨면 다시 재우는 것 등은 꼭 내 몫이었다. 이렇게 서로를 믿고, 의지하다 보면 어느샌가 육아의 행복한 단면도 볼 수 있게 된다. 더 시간이 가면 언제 지났나 싶게 육아의 끝이 보인다.
가장 이상적인 가족의 첫 번째는 서로 간의 신뢰다. 특히나 역할의 구분을 두지 않고, 서로가 힘들고 어려워하는 일들은 분담하고, 스스로 부담하는 일을 서슴지 않아야 한다. 스스로에게 한두 가지 약속을 세워보면 어떨까. 시간이 지나면 변하지 않는 게 없다지만 가족끼리는 약속을 어기는 행동은 하지 않아야 한다. 영원불변까지는 아니어도 스스로가 세운 규칙만큼은 어기지 말아야 한다. 이상적인 가족은 말뿐인 사람보다 어느 순간 행동하는 당신에게 더 어울리는 말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