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냐하면 모가 났다는 거는 자기만의 스타일이 있다는 거고 자기만의 생각이 있다는 거니까. 그런 게 세상이랑 부딪히면서 점점 자기 모양새를 찾아가는 걸 좋아하지. 에지 있게!"
※출처 : SBS 『낭만닥터 김사부 2』 中
"오늘도 우리 지수 때문에 외출해야 할까 봐요"
"날 더운데 오늘은 어디로 가야 할까요?"
둘째 녀석 덕에 아내와 둘만의 데이트다. 아내와의 외출은 즐겁지만 오늘같이 무더운 주말에는 시원한 집에서 넷플릭스 시청이나 조용히 독서가 그립다. 둘째는 얼마 전부터 기말고사 시험 준비 중이다. 정확히는 느긋해하는 녀석보다 부모인 우리가 더 조급해하고, 가는 시간이 아쉽다.
둘째는 중학교 때까지 좀 느리긴 해도 성적이 잘 나오는 편이었다. 하지만 성격 자체가 조금은 게으른 편이어서 뭣 하나 진득하니 열심히 하는 걸 찾아볼 수 없었다. 하지만 그 보다 더 큰 문제는 과정 없이 좋은 결과를 바라는 마음이다. 한마디로 날로 먹으려는 심보가 다분하다. 이런 딸아이 때문에 아내와 난 늘 걱정을 달고 산다.
고등학교에 들어가고 처음 치렀던 중간고사의 결과가 녀석에겐 꽤나 충격이었던 듯싶다. 그런 결과와 반응은 아내와 내겐 이미 경험했던 일이다. 큰 애도 고등학교 첫 시험 결과로 충격을 받았었던 전적이 있다. 두 녀석 모두 중학교때와 다른 레벨의 시험문제와 범위로 당황한 건 똑같았다. 하지만 그런 결과를 대하는 태도는 둘이 달라도 너무 달랐다. 아들은 바로 자신이 부족한 과목을 분석해 자신의 의지로 사교육의 길로 입문했고, 딸은 공부가 적성에 맞지 않는다며 사춘기를 표명했다.
한동안 둘째는 집에 오면 무기력 그 자체였다. 어떤 일이든 다 귀찮아하고, 방에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았다. 중학생 때도 하지 않던 중이병 행세를 고등학생이 되어서야 실천 중이다. 방에 혼자 있으면서도 자는 시간도 많아졌고, 늘 피곤해하고 졸려한다. 집에서 이런 모습을 보기 안타까워서 아내와 난 녀석에게 '스터디카페'나 '독서실'을 권유하지만 돌아오지 않는 메아리였다. 집에서 공부하는 게 더 잘된다고 고집 피우는 녀석을 더 밀어붙이기는 역부족이었다.
가끔은 우리도 그렇게 할 거면 매달 들어가는 학원비라도 줄이자고 단호하게 말할 때도 있다. 말은 그랬지만 막상 '그러자'라고 하면 오히려 더 걱정인 게 아내와 내 솔직한 심정이다. 집에서 늘어져 무기력해하는 녀석을 보고 있기가 힘들어 아내와 난 주말 낮에는 무조건 외출을 했다. 그러기를 여러 차례 이제 시험도 코앞이어서 그런지 둘째도 태도를 전환하는 듯싶었다.
시험공부를 하겠다는 딸아이의 말에 아내는 아들을 붙들고 오늘도 사정이다. 과외비 챙겨줄 테니 동생 모르는 것 좀 알려주라는 부탁이다. 아들 녀석은 자기도 졸업한 지 일 년 몇 개월이 지나 가물가물하단다. 공대생 출신인 내게도 얘기하지만 난 아내의 시선을 피하기 급급하다. 2년도 안된 아들이 가물가물하면 30년이 지난 난 어떡하라고.
아내의 부탁에 아들은 못 이기는 척 주말에 동생 수학부터 봐주기 시작했다. 우리의 침묵을 강요했고, 딸아이에겐 무서운 호랑이 선생님이었다. 딸아이도 이런 오빠가 조금은 어려웠는지 고분고분이다. 나와 아내가 얘기할 때랑은 분위기가 다르다. 그러길 한 참, 딸아이가 아내에게 불만을 얘기한다.
'오빠가 알려주는 건 학원에서 알려주는 것보다 어려워. 선생님은 쉽게, 쉽게 가르치는데'
당연한 결과였다. 학원 선생님처럼 잘 가르치면 아들은 벌써 과외비 두둑이 받으며 지금 하는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때려치우고 진즉에 과외길로 나갔으리라. 우여곡절 끝에 아들은 딸아이의 과학만 전담하기로 결정했다. 이제 아내의 화살은 내게로 왔다.
'철수 씨, 지수 뭐 봐줄 거예요? 한국사 어때요. 한국사 고급 자격증 소유자잖아요'
그렇다. 난 한국사 고급 인증자였다. 어떤 변명도 통할리 없는 '빼박'이다. 내겐 과외비가 따로 책정되지 않냐고 아내에게 물었다가 돌아온 대답은 맥주 사준다는 말뿐이다. 요즘 배 나온다고 집에서 술도 못 먹게 하니 그마저도 다행이라는 생각이다. 대가야 어떻게 되었든 딸아이 성적을 위해서면 족집게 과외선생이라도 자처해야 했다.
그렇게 난 아내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며칠 전 저녁식사 후 식탁에 앉아 아이의 교재, 한국사 중급 교재 등을 뒤져가며 시험범위 안에서 기출 예상문제와 요약서를 만들었다. 3시간이 넘는 긴 시간을 엉덩이도 떼지 않고 중노동을 했다. 아무리 시험범위가 조선으로 제한적이지만 시험에 나올 법한 건 차고 넘쳤다. A4 용지 5페이지를 빼곡히 정리하고 났더니 이미 시계는 새벽 1시를 넘었다. 밖에서 8시간 넘게 일하고 와 집에서도 일한 기분이다. 야근이 따로 없다. 그래도 둘째 녀석에게 도움만 된다면야 한두 번쯤은 더 해줄 용의가 있다. 난 녀석의 아빠고, 녀석은 너무 사랑하는 내 딸이니까.
막상 요약본을 전달해주고 나니 딸아이 감동의 시선이 스스로를 대견하게 만들었다. 요약본을 건네면서 족집게 과외선생처럼 신뢰가 갈만한 멘트도 잊지 않았다.
'사건에다가 연도 써놓은 거 있는데. 그건 사건을 연도별 순서 맞추라는 문제로 꼭 나오니까 암기해야 해. 특히 조선 후기, 말기의 사건은 당연히 나올 거야. 알았지?'
이건 뭐 내가 한국사 일타강사 이다지 샘도 아니고. 암튼 한국사 고급 인증자의 말이라 아내와 딸은 당장 시험문제라도 본 것처럼 눈을 반짝인다. 이러다 시험문제에 안 나오면 안 되는데 조금 걱정도 되지만 그래도 열심히 요약했으니 그걸로 된 거다. 그런 내 수고를 알 테니 녀석의 기말고사 한국사 성적은 중간보다는 오를 거라는 기대감이 든다.
드디어 딸아이 시험이 끝났다. 한국사 시험은 마지막 날이었다. 결과적으로는 한국사 시험공부를 내가 한 꼴이 됐다. 마지막 날 국어와 함께 있던 한국사는 둘째에겐 우순 순위가 후순위였다. 아내말로는 새벽까지 국어 시험을 준비하는 것 같다고 했다. 그래도 혹시나 내가 그렇게 열심히 요약해 줬는데 기본은 공부해 가겠지 하는 막연한 기대가 남아있었다. 퇴근하고 딸의 방으로 들어가서 한국사 시험 잘 봤냐는 물음에 돌아온 대답은 맥 빠지는 소리였다.
'미안, 아빠 요약해 준 거 제대로 못 봤어. 앞으로는 그렇게 요약해 달라고 안 할게'
'다음엔 잘할게'도 아니고 전혀 예상치 못한 대답이어서 그런지 대꾸할 말도 생각나지 않았다. 그냥 웃음만 날뿐. 하... 하...
딸! 넌 분명 두루뭉술한 돌은 아닐 거라는 확신이 들어. 아직은 잘 모르지만 분명 모난 돌의 형태일 거야. 난 그리 믿고 있어. 부모 마음이 그러길 바라는 건 아니지만 세상을 살면서 깨지고, 때로는 마지못해 스스로 다듬으면서 모양을 만들어 갈 거라고. 아직은 유연함이란 찾아보기 어려운 뾰족뾰족하고, 가끔은 날카로운 면도 있지만 그래도 자기만의 색과 모양을 낼 거라고 믿어. 그냥 예상 범위 내에서 만들어 가는 건 너무 뻔하잖아. 아빠를 들었다, 놨다 하지만 언젠간 우리 딸도 에지 있게 멋져 보이는 그런 날이 오겠지. 난 그런 딸의 모습이 상상이 가. 부모가 자식 믿어야지 누가 그런 신념 같은 믿음이 있겠어, 그러니 충분히 부딪치고, 잘 다듬어서 폼나게 에지 있게 잘 커야 해. 알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