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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추억바라기 Sep 25. 2023

높은 외국 회사 연봉에도 주눅 들지 않을 이유

이유가 있었고, 후회도 없으니까 그걸로 된 거다

취직해 보니까 말야,

성공이 아니고

문을 하나 연 느낌이더라고.

어쩌면 우린 성공과 

실패가 아니라,

죽을 때까지 다가오는 

문만 열어가며

살아가는 게 아닐까 싶어.


 - tvN 드라마 '미생' 중에서 -




'철수 씨도 외국계 기업 지원해 봐. 그 정도 실력이면 지금보다 훨씬 좋은 대우받으며 직장 생활할 텐데.'

'아쉬워서 그러지. 다들 외국계 다니는데. 형으로서 안타까워서 그러는 거 알지?'


첫 직장을 퇴사하고 십칠 년 하고도 구 개월이 지났다. 시간이 지났어도 그 시절 동기들, 선배와는 꾸준히 모임을 통해 인연을 이어가고 있다. 사회 초년생 때 만난 인연이라 그런지 친구 같은 마음으로 정이 듬뿍 든 사이다. 요즘도 일 년에 두, 세 번은 꼭 자리하며 그 시절을 함께 추억하곤 한다.

 

동기들 포함해서 모임에 함께 하는 선배까지 모두 IT 관련 직군이라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결혼도 했고, 아이들도 있어서 만나면 일 얘기부터, 가족 얘기까지 할 얘기가 차고 넘쳤다. 단지 나를 제외하고는 모두 외국계 기업을 다닌다는 점이 가장 큰 차이점이다. 서로 얘기할 때 눈치를 보는 사이는 아니지만 유독 연봉 얘기에는 민감했다. 그도 그럴 것이 외국계 회사를 다닌 지 짧게는 십 년부터, 길게는 이십 년이 넘었다. 급여가 차이 나는 건 당연할 수밖에 없다. 특히 나와는 더 그랬다.


선배 한 명을 제외하고 동기들과 난 시작이 같았다. 그래서 첫 직장에서는 굳이 연봉을 숨기지 않아도 시작 연봉이 같으니 말하지 않아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하는 일도 비슷하다 보니 몇 년간 같거나 차이가 있어봤자 아주 적은 금액 수준 일수 밖에 없었다. 큰 회사도 아니었을뿐더러 당시 다녔던 회사의 신입사원에 대한 연봉 인상 규정은 정해진 규칙이 없었다. 그러다 보니 큰 성과나, 실수가 없는 한 같은 인상률일 수밖에 없었다.


당시 IT관련 중소기업 신입사원 연봉이야 뻔했지만 적다는 생각 없이 즐겁게 다녔다. 그럴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회사 일에 대한 진심 어린 공감, 위로를 해 줄 수 있는 마음 편했던 동기들 덕이었다. 우린 그렇게 긴 시간 함께할 거라는 묵인된 자기 암시속에 이직은 남의 일처럼 이야기하며 그 시절을 보냈다.


모든 일이 영원한 게 없듯이 시간이 흘러 회사 생활도 능숙해지고, 보는 시야도 트이고 나니 이직은 현실이 되었다. 그렇게 하나, 둘 서로를 떠나서 새로운 회사로 자리를 옮겨갔다. 나 또한 다른 곳으로 회사를 옮겼고, 작은 연봉 인상이었지만 만족하며 직장생활을 이어갔다.


그렇게 이직 후 다시 모임을 하기 시작한 것은 오, 육 년이 지나서부터였다. 그 사이 한 번 이직한 동기부터, 여러 차례 이직한 동기까지 다들 자신의 입맛에 맞거나, 처우가 좋은 곳으로 자리를 잡은 상태였다. 첫 모임에서 서로 어느 회사에 있는지는 알고 있었지만 몇 년 만이라 우린 옮긴 곳의 명함을 돌리며 인사에 열을 올렸다. 자연스레 자신이 현재 하고 있는 업무부터 회사의 상태 그리고 자신의 처우, 대충의 연봉까지 궁금해할 만한 얘길 시작했다. 어느새 우린 예전 첫 직장 때처럼 모든 벗어놓고 이야길 하고 있었다.


 "전 직장보다 그래도 많이 올랐지. 대충 XX케이 받는데 아직이야. 내년엔 좀 더 받을 수 있겠지."

 "난 영업들하고 똑같이 PS(Profit Share) 하기 때문에 30퍼센트는 유동적이라 정확한 금액은 얘기하기 그래. 그래도 굳이 얘기하자면 평균적으로 A 씨하고 비슷하게 받아. 철수야 넌 그래도 O천만 원은 받지?"

 "응? 어 그냥 대충 그 언저리."

   ※케이는 1,000을 의미함. 예를 들어 칠 케이는 칠천.


동기들과 아무리 편한 사이라도 자존심이 상했다. 동기들을 만나며 처음으로 부러웠고, 시기심도 생겼다. 같은 일, 같은 급여를 받고 다닐 때만 해도 서로에게 위로와 응원만 되어주는 존재일 줄 알았다. 하지만 그들의 자연스러운 대화가 내게 상처가 될 수 있음을 깨닫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들도, 나도 의도하지 않았던 일이었다.  


처음엔 그냥 서로 다른 직장으로 이직했다는 생각만 했다. 하지만 막상 급여 차이를 듣고 나니 조바심이 났다. 시간이 지나면 오히려 더 차이가 생길 거라는 불안감에 휩싸였다. 그 뒤로도 여러 번 자리 때마다 신경이 쓰였다. '차를 바꿨다', '미국 가족여행을 다녀왔다', '주식을 받았다' 내가 지금 다니는 회사에서는 일어날 것 같지 않은 말들이 오갔다. 그냥 부럽고, 불편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며 부러움과 불편함은 그런 마음을 가졌던 스스로에 대한 부끄러움으로 남았다. 서로에게 좋은 인연임을 알기에 당시 처우나 연봉은 인연을 이어가는데 조건이 되지 않았다. 첫 직장에서 우린 서로를 인정했고, 이해했고, 응원했다. 때로는 존재만으로도 위로가 되는 날도 있었다. 지금도 자주는 아니지만 만날 때마다 드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서로 이해하고, 응원하는 마음은 한결같다. 그 순간을 기억하고, 추억하는 한 우리 모임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살면서 무언가에 대한 욕심을 갖는 건 당연한 마음이다. 누군가를 부러워하다 보면 그렇게 되기 위해 목표를 세우고,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 노력하게 된다. 욕심을 갖는 게 나쁘지만은 않다고 생각하이유다. 하지만 모든 노력이 최고의 결실을 맺는 것은 아니다. 노력한 만큼 좋은 결과로 이어질 수도 있지만 노력이 수포로 돌아갈 수도 있다. 그럴 때마다 번번이 좌절이 올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 좌절도 용기 내어 시작해 본 사람만 경험할 수 있는 일이다. 시작해보지도 않은, 실패가 두려워 포기한 누군가보다는 자신의 행동이 충분한 가치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미 여러 번의 이직을 경험한 나에게도 한두 번 큰 연봉 상승의 기회가 있었다. 그건 바로 외국계 회사의 인터뷰 제안이었다. 인터뷰에 응하지 않아 최종 입사제안을 받아보지는 않았지만 마음먹고 도전했으면 지금 다니는 회사가 외국계 기업이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막상 여러 가지 이유로 인터뷰 제안을 거절했다. 내겐 급여, 처우 이외에 우선시하는 다른 조건이 있다. 내가 하고 싶었던 일, 그리고 함께 하는 사람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래서 지금 회사에서도 힘은 들고, 스트레스도 꽤 있지만 기대감과 흥미를 갖고 일을 할 수 있는 것 같다.


꾸준히 좋은 성과를 내면 더 좋겠지만 아직까지는 결실이 미흡한 상태다. 하지만 난 좌절하지 않을 생각이다. 아니 좌절하더라도 내 선택에 충분히 가치 부여를 할 것이다. 결국 내게 맞는 옷을 선택한 건 나였고, 그 선택에 후회는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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