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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추억바라기 Aug 07. 2023

날 이용해 먹던 회사가 어느 날 날 애용하기 시작하면

오늘은 더 많은 간절함으로 살아온 과거의 내 하루를 위한 건배입니다

"나 때문에 말이다. 전공의 말년에 해오페리에서 반패까지 다 했어. 그 교수님 어시에 에센테리 그거 하나 달랑 잡은 걸로는 아~휴 명함도 못 내밀었지. 그때는"

"선생님도 라떼 파셨구나."

"야 사람은 누구나 다 나만의 라떼가 있는 법이야. 그 시절에 라떼를 뺀다면은 어찌 지금의 내가 있겄냐 안 그래? 그러니까 잘 기억해 둬. 오늘이 너의 라떼 중에 하루가 될 테니까"


 -/이미지 출처: 낭만닥터 김사부 3』 中에서-


"A야 정말 반가워. 잘 지냈어? 이게 얼마만이야"

"안녕하셨어요. 팀장님! 정말 뵙고 싶었어요. 와, 6년 만이네요"


얼마 전 십 년 전에 함께 근무하다 해외로 이민 갔던 후배에게서 연락이 왔다. 이민을 간 이후에도 두어 번 후배가 한국에 들어와 만나긴 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코로나에 여러 가지 경제적 사정이 함께 엮여 오랜만에 만남이었다.


해외 이민 간 후배와 함께 팀을 이뤘던 동료까지 모여 역전의 용사가 모두 모인 자리였다. 중년 남자들의 수다는 끊이지 않았다. 그 시절 우린 죽이 맞아도 너무 잘 맞았다. 업무적 용어로 말하면 '팀워크'가 좋았고, 선후배 같이 개인적인 호감에서 얘기하면 '의리, 우애'가 깊었다. 직장 생활을 하면서 가장 재미있고, 즐거웠던 시절이었던 것 같다.


6년이란 시간의 무게만큼 알지 못했던 시간을 채우기 위한 안부를 묻는대도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건강부터 가족 그리고 근황까지 어느 하나 궁금하지 않은 게 없었다. 게다가 길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2년이란 시간을 빼곡히 채웠던 우리의 추억 보따리도 만만치 않은 화제의 중심이었다. 제대로 알지도 못하고 떠안았던 해외기술팀이며 남아공이나 태국 출장까지 얘기는 차고 넘쳤다.


과거 모여서 함께 일하던 시절만 해도 한 팀이어서 당연히 같은 업무를 했었다. 업무에 대한 설명도 필요하지 않았고, 해결하기 어려운 업무도 함께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젠 서로 다른 업무로 지금 하고 있는 일을 이해시키기 위해서는 설명이 필요했고, 그건 동료나 후배도 마찬가지였다. 영원히 함께 수는 없었지만 너무도 좋은 동료들이었기에 조금 시간을 함께 일했으면 좋았겠다는 생각은 든다.


 "팀장님, 그거 아세요? 지금 와서 딱 한 가지 후회하는 게 있다면 함께 일할 때 좀 열심히 배워둘걸 하는 아쉬움이 커요"

 "A는 알아서 '척척' 잘해서 딱히 알려줄 것도 많지 않았는데. 늘 열심히 했잖아. 그래서 B 부장님이나 내가 A를 좋아했고"

 "아녜요. 저 팀장님 밑에 있을 때 그냥 시늉만 했는걸요. 지금 생각해도 B부장님이나 팀장님 회의 때나 업무 얘기할 때 얼마나 폼났는데요. 조금 더 함께 했으면 마인드도 좀 바뀌었을까요"


한창 웃으며 떠들던 분위기에서 진심 가득 묻어있는 후배의 아쉬움을 마주했다. 후배는 지금 다른 업무를 하고 있다. 하지만 아마도 함께 일할 때 커리어를 더 쌓고, 기술력을 높였으면 이민 후에도 IT관련 직군에 일했을 거라는 게 후배의 설명이었다.


마지막으로 봤을 때만 해도 아내와 자신 둘 뿐이었던 후배는 당시 하는 일에 후회가 없었다. 또 직장 선택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자유분방함이 있었다. 하지만 한 아이의 아빠가 되어있는 이젠 나이 마흔을 넘어선 후배의 어깨가 가벼워 보이진 않는다.


십 년 전만 해도 같은 일을 하던 셋, 몇 달 뒤면 함께 했던 동료도 IT가 아닌 다른 일을 찾아 떠난다고 했다. 후배에 이젠 동료였던 친구까지 다른 길을 걷게 되는 것이다. 물론 모든 사람들은 자신에게 맞는 각자의 삶이 있다. 과거했던 일이 천직이라고 생각하며 일했던 나조차도 이젠 과거와는 조금은 다른 일을 한다. 하물며 입버릇처럼 하고 싶은 일을 해야 한다는 동료도, 잘하지 못하는 일을 하고 있다던 후배도 다른 일을 하는 건 당연한 수순이다.


처음 입사를 하고 오랜 기간 직장에서 했던 업무는 네트워크 통신 분야였다. 이런 통신을 업무로 일했던 내가 이직한 회사가 보안 소프트웨어 개발 업체였다. 처음 이직해서는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 분야가 아닌 통신 분야의 전문가가 입사해서 너무 반가워했다. 고객사 지원부터 인프라 구성, 소프트웨어로 해결되지 않은 다른 여러 가지 문제까지 내게 도움을 구했다. 입사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인지 도움을 마다하지 않았고, 실제 많은 문제점을 해결해 나갔다. 이런 시간 속에서도 내가 알고 있는 통신 지식이나 경험을 통해서 얻은 기술들을 교육하고, 문서로 작성해서 공유도 했다. 처음엔 교육 수강에 열의도 있어 보였고, 공유한 문서도 고마워했다. 하지만 그게 전부였다. 시간이 지나서도 바뀌지 않았다. 도움 요청은 끊이지 않았고, 오히려 해당 업무가 당연히 내 업무인 것처럼 여겨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보안 소프트웨어 회사의 주 업무가 아닌 사이드 '잡' 같아서 일을 하고도 짜증이 올라오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일들이 하나, 둘 늘어나면서 회사에서 보는 시각도 조금씩 달라졌다. 오히려 내가 없는 빈자리를 생각하기 어려워진 듯 보였다. 통신 관련 제품도 개발됐고, 제품을 팔기 위한 설계 단계부터 이젠 사이드가 아닌 메인 업무로서 직원들이 질문하기 시작했다. 교육 요청도 하고, 제품 문의도 꾸준했다.


지금도 그때부터 꾸준히 갈고닦아왔던 통신과 보안이라는 경험과 기술력이 업무에 많은 도움이 된다. 긴 시간 쌓여온 지식과 노하우는 이젠 작다고 할 수가 없을 정도로 내겐 큰 자산이자 오늘의 내가 있게 해 온 자양분이 됐다. 처음 몇 년은 모자람을 채우기 위해서, 이직하고 몇 년은 새로운 업무에 뒤처지지 않기 위해 애썼다. 당시를 돌아보면 열심히라는 단어보다는 오히려 절박함, 간절함이라는 단어가 어울렸다. 그렇게 지나온 시간이 결국은 해를 거듭할수록 쌓이고, 쌓여 오늘의 나를 있게 한 듯싶다.


사람들에겐 저마다 성공이라는 '잣대'가 있을 것이다. 억대 연봉, 대기업 임원, 공기업 정년 채우기, 사업가로서 성공 등 일반적 성공의 지표가 아니다. 획일화되거나 일반화되지 않은 나만의 성공 잣대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난 성공이라는 워드에 크게 의미를 두지 않아 왔다. 가족의 건강과 행복 정도가 아마 평소에 생각하는 성공일 듯싶다. 하지만 굳이 따져보자면 이십 년이 훌쩍 넘은 시간을 돌아보며 '켜켜이' 쌓여온 나의 간절했던 하루하루가 지금의 내게 스며들어 오늘처럼 마음의 여유가 있는 걸로 충분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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