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끌고 오기는 누가. 나야. 그냥 헛소리 해가면서 일만 뻥뻥 쳤던 거지. 진짜로 이렇게 올릴 수 있었던 거는 전부 니들 힘이지. 미쳤니? 세상 사람들이 다 우리 진심을 알아줄 순 없어. 그 정도로 우리한테 뭐 관심 있지도 않고 그러니까 우리가 얼마나 열심히 살았는지 또 얼마나 최선을 다했는지 그거 뭐 일일이 설명하려고 애쓸 필요 없어. 우리는, 우리가 그냥 해온 대로 살아온 대로 누가 뭐라건 묵묵히 가. 쭉 묵묵히 산다고 그거 절대로 사라지는 거 아니거든. 정 선생 진짜로 의미 있는 거는 절대로 사라지지 않는다. 알지?"
-글/이미지출처: 『낭만닥터김사부 3』中에서-
"팀장님, 이번 BMT에는 제가 함께 갈 수 없을까요?"
"철수 씨, 열심히 하는 건 아는데 준비가 되면 내가 어련히 투입시키지 않겠어? 아직이야, 아직"
*BMT(Benchmark Test) : 실존하는 비교 대상을 두고 하드웨어나 소프트웨어의 성능을 비교·시험하고 평가하는 것. 일반적인 성능 테스트와는 달리 실제와 동일한 시험 환경에서 한 개 또는 여러 개의 대표적인 비교 대상과 비교 시험을 반복하여 성능을 평가한다. - 출처 : 네이버 사전 -
입사한 지 일 년이 되었을 무렵이었다. IT 엔지니어로서 당찬 포부를 안고 신입으로 입사했지만 일 년이 다되어 가는 동안 혼자 기술지원을 다닐 수가 없었다. 선배를 동반한 고객사 지원이나 내부 업무 테스트가 고작이었다. 기술 보고서 작성이나 내부 세미나는 종종 있는 일이지만 성에 차지 않았다. 정작 내가 생각하는 회사에 인정받는 일은 사업 수주를 위한 BMT나 파일럿 업무였다. 당장은 욕심이 났지만 좀처럼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조바심도 생겼고, 한편으론 잘할 수 있는데 평가절하되는 느낌으로 마음도 상했다.
속상한 마음에 여러 선배들에게 팀장님의 업무 할당에 불만을 얘기하곤 했다. 하지만 선배들 중 열에 아홉에게 돌아온 대답은 '팀장님이 어련히 알아서 하지 않겠냐', '나중에 하기 싫다고 해도 할 일인데 서두르지 마' 등의 조언이었다. 와닿지가 않았지만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답답했지만 수긍하며 묵묵히 맡은 일을 할 수밖에 없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묵묵히 일하다 보니 티를 내지는 않았지만 개인적으로 성장했다는 느낌도 받았다.
그렇게 몇 개월이 더 갔고, 원하던 업무로 보직 할당이 됐다. 외부의 성과와 평가도 시간이 가면서 굳이 표를 내지 않아도 달라졌다. '요즘 고생이 많아요', '일 잘한다는 소문이 우리 부서에도 들려', '살살하세요. 다른 부서 신입들도 먹고살아야죠' 등 기분 좋게 오가는 말들이 늘었다. 그렇게 몇 년을 회사에서 성장을 거듭했고, 좋은 조건으로 스카우트 제의도 받았다. 마음 졸이며 조급해하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해 오던 업무 성과는 나보다 주변에서 더 알아준 느낌이었다.
직장생활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는 내가 한 일을 선배에게, 상사에게 알리고 싶은 마음이 컸었다. 어렵게 입사해서 그런지 빨리 업무 능력을 인정받고 싶었다. 초보자나 아마추어라는 딱지를 한시라도 떼고 싶었고, 함께 입사한 동기들보다 한 발짝은 더 앞서나가고 싶었던 마음이 컸다. 맡겨진 업무가 아님에도 알아서 조사하고, 회의 때 사전에 준비한 의견을 얘기했다. 단순 업무보다는 누가 들어도 폼나는 업무를 받고 싶어서 어필한 적도 많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서 내가 선배나 상사의 입장이고 나서야 많은 게 보였다. 어느 곳에나 자신의 역량이상을 어필하려고 나서는 직원들이 있었고, 대부분 일을 어설프게 알고서 달려드는 경우가 많았다. 자신이 꽤 잘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오랜 시간을 준비했겠지만 그래봤자 1~2년 차였다. 아직까지 신입사원이었고, 아마추어 딱지를 떼고 있는 중이라는 걸 당사자만 모른다.
조금 더 높이 올라가 있다 보면 빠르게 올라온다고 무조건 좋은 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빨리 올라올수록 주변을 살피지 못한다. 빨리 올라가려면 위만 보고, 넘어지지 않으려고 앞만 봐야 하기 때문에 옆을 살필 겨를이 없다. 천천히 오르더라도 묵묵히 올라오는 사람이 오랜 시간 머문다. 빨리 오르는 사람보다 오랜 시간이 걸리겠지만 그만큼 믿음도 오래갈 수밖에 없다. 그런 사람은 내려갈 때도 '묵묵히'는 여전하다.
누구나 자신의 자리에서 주어진 일만 묵묵히 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이렇게 묵묵히 하는 사람의 가치는 언제가 되었건 인정받는다. 아니 정확히는 주변 사람들이 더 잘 안다. 티 내지 않아도 주변에 사람이 많을 수밖에 없다. 굳이 일일이 어필하거나, 설명하지 않아도 내가 한 일을 누군가는 알고 있다. 굳이 설명하고, 이해시키려 애쓰지 않아도 된다. 알 사람은 알게 되니까 굳이 몰라도 되는 일에 힘을 빼지 말아야 한다. 하고 싶은 일이 넘치는데 관심도 갖지 않는 사람을 붙들고 이해를 구하는 건 불필요한 에너지 소비다. 인생은 짧고, 세상 즐거운 일은 넘쳐난다.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말이 있다. 굳이 감출 일이 아니지만 그렇다고 너무 드러내는 것도 보기 좋지 않다. 아무리 자기 피알 시대가 된 지 오래지만 자신이 하는 일을 굳이 주변사람에게 하나하나 설명하려고 애쓰지 않아도 된다. 얼마나 피곤한 삶인가. 내 주변에도 타인을 지나치게 신경 쓰고 살며 자신을 괴롭히는 사람들이 있다. 남의 생각이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사는 것도 힘들지만 모든 일이 지나치면 독이 된다. 스스로에게 떳떳하고, 당당하면 그걸로 족하다. 차곡차곡 이룬 것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내 오른손이 한 일을 왼손은 모를지언정 다른 누군가는 알고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