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월말. 올해도 어김없이 찾아온 녀석을 마주했다. 가을의 끝자락이면 난 바람이 난다. 일 년에 한 번이지만 거스르기 힘든 무서운 바람이 든다. 춤바람도 아니고, 치맛바람도 아닌 제주바람이 든다. 그래서 시월이 반가울 수밖에 없다.
시월말만 되면 역마살이 낀 거처럼 난 이틀간의 일탈 여행을 나선다. 매년 홀로 찾던 제주를 올해는 둘이서 찾았다. 매년 혼자 다니다 작년 아내에게 '제주도 함께 갈래요' 하고 물었다. 몇 년을 혼자 다니던 여행이어서 아내가 조금 의아하게 생각할지도 몰랐지만 싫지 않은 눈치였다. 이렇게 아내와의 여행을 계획하고 서둘러 출발 몇 달 전에 비행기표 예약을 마쳤고, 출발 한 달 전에 숙소를 예약했다. 둘이 가는 여행이 워낙 오랜만이라 설레기까지 했다. 하지만 우린 여행을 갈 수 없었다. 출발 하루 전 코로나가 친구 하자는 통에 제주도 여행은 일 년 뒤로 미뤄야 했다. 그렇게 시간은 지났고, 다행히 올해는 별일 없이 출발할 수 있었다. 드디어 시월의 마법에 걸릴 시간이 왔다.
그렇게 아내와 떠난 제주도 1박 2일 여행의 시작은 가파도부터였다. 수년을 제주도에 다녔지만 나도 가파도는 처음이었다. 긴 거리의 올레길을 걷기에는 아내의 발목 상태가 좋지 않아 이번 여행은 조금 다르게 계획했다. 그 첫 번째 방문지가 바로 섬 속에 섬이었다. 모슬포항에서 5.5Km 떨어진 제주 남단의 작은 섬이다. 섬의 모양이 가오리를 닮아 가파도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배를 탔을 때만 해도 배를 가득 채운 승객들 때문에가파도 여행이 관광지같이 북적되는 아쉬운 여행이 될까 걱정도 됐다. 하지만 배 도착 후 십여 분도 되지 않아 선착장을 벗어나면 제대로 된 가파도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그렇게 우린 가파도의 힐링 여행을 시작했다.
가파도는 올레 10-1 코스이기도 해서 언제고 한 번 찾으려고 했던 곳이다. 이번 가파도 여행은 제주도 여행의 취지와 맞게 슬로를 표방했다. 그래도 왕복 배시간을 예매했기에 걷는 것보다는 자전거를 빌려 타고 섬전체를 둘러보는 여행을 계획했다. 다행히 오르막이 없는 전형적인 평지섬이라 자전거를 타기에는 최적이었다. 게다가 우리 둘 모두2인용 자전거는 처음이라 가파도 추억이 더 오래오래 기억될 듯싶었다.
자전거에 올라 처음 페달을 저었을 때만 해도 가파도의 풍경보다는 하선한 승객들로 붐비는 사람풍경뿐이었다. 하지만 불과 20여 미터를 벗어나 그제야 들어온 가파도의 풍경에 감정이 벅차올랐다. 뒷 좌석에 앉은 아내는 '아, 좋다'는 탄성을 연신 쏟아냈다. 그렇게 기뻐하는 아내의 목소리가 들리니 함께 오길 정말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시원한 바닷바람 맞으며 달리는 자전거는 10월이어도 조금은 더운 날씨에 송골송골 이마에 맺힌 땀을 식히기에 충분했다. 그렇게 자전거를 몰다, 쉬다를 반복했고, 섬 전체를 돌고서도 든 시간이 고작 2시간이 전부일 정도였다. 선착장 근처 카페에서 시원한 청보리 맥주와 에이드 한잔을 즐기며 우릴 태울 배를 기다렸다. 천천히 흐르는 가파도의 시간을 뒤로하고 우린 다시 제주도로 돌아갔다.
숙소가 한림 협재 해수욕장 근처여서 수평선의 낙조는 우리에겐 덤이었다. 오후 5시 30분이 되자 자연이 만든 멋진 광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일몰을 보기 위해 해수욕장으로 모인 사람들은 어느새 노을빛에 붉게 물들어 갔다. 스마트폰 카메라는 연신 터졌고, 뒤질세라 우리도 카메라를 들고 작품 촬영에 매진했다. 하지만 정작 눈에 담는 모습에 미치지 못하는 스마트폰의 화면이 조금은 야속했다. 10여분 상간으로 쇼는 최고조에 이르렀다. 바다 위로 떨어지는 붉은 태양이 마치 주변 모든 풍경을 집어삼키듯 지켜보는 사람들 마음도 빨려 들어갈 기세다.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는 탄성이 아름다운 자연의 선물에 대한 당연한 보답인 듯 들렸다.
제주 2일 차, 숙소를 나서면서 오늘의 테마를 추억이라고 이름 붙였다. 찾았던 한림공원, 금산공원이 모두 오래전 아이들과 함께 찾은 첫 제주 올레길에서 만난 곳이기 때문이다. 물론 당시 아내가 감동했던 곳으로 일부러 계획했던 코스다.
이른 아침 식사 후 9시 30분도 되지 않아 찾은 한림공원은 고요함 그 자체였다. 드 넓은 주차장에 주차된 차라고 해봤자 대여섯 대가 고작이었다. 매표를 하고 들어간 한림공원의 내부는 조용한 아침 산책길처럼 한산하게 우릴 맞았다. 관람객이 없어서인지 고요함 때문인지 이국적인 공원이 마치 무인도처럼 느껴졌다.
'조용하고, 한산해서 너무 좋네요. 천천히 둘러보며 사진도 많이 찍을 수 있겠어요'
하지만 곧 뱉은 말이 씨가 됐다. 조용해서 좋다는 내 말 한마디가 떨어지기 무섭게 입구 쪽에서 울리는 '왁자지껄' 소리에 정신이 퍼뜩 든다. 이, 삼분도 되지 않은 시간만 흘렀을 뿐이다. 언제부터 들어오기 시작했는지 한 무리의 어린이들이 끊임없이 입구로 밀려들어 왔다. 자세히 보니 초등학교 체험학습처럼 보인다. 우릴 지나쳐가며 '안녕하세요' 인사하는 아이들도 있고, 아내가 여덟, 아홉 살쯤 돼 보인다는 말에 '여덟 살이에요'라고 당당하게 나이를 밝히는 아이들까지 다양한 모습으로 우릴 반긴다. 너무 예쁘고, 귀여웠다. 한창 그럴 나이다. 아이들을 보내고 났더니 바로 이어서 단체 효도관광 오신듯한 어머님 무리들에, 고등학생 단체 관람까지. 조용했던 수목원이 어느새 관광지처럼 북적인다. 그래도 아내와 함께여서 좋고, 날씨가 너무 좋아서 더 좋고, 이곳이 제주도라는 사실에 더, 더 좋다.
높게 솟은 야자는 이국적인 풍경을 자랑했고, 가을 계절에 맞게 한라 구절초는 야생화 특유의 자연스러움과 청초한 아름다움이 돋보였다. 안내 책자에는 관람시간이 1시간 30분 정도 소요된다고 설명됐지만 우리는 3시간 가까이 이 공원에 머물렀다. 그만큼 우린 아주 천천히 몸으로, 눈으로, 코로 마음껏 즐겼다. 여유 있는 제주여행이라고 마음먹은 만큼. 식물을 좋아하는 아내에겐 이곳이 천국이지 않을까 싶었다.
출출해진 배도 채울 겸 가을에 찾으면 좋을 것 같은 카페를 찾았다. 입구부터 아기자기한 소품들이 있고, 카페 내부는 작지만 주인장이 직접 그린 그림과 사진이 잘 어우러져 조화로워 보였다. 하지만 카페의 본모습은 내부 안쪽 마당에 있었다. 크진 않지만 동화 속에 튀어나온 핑크뮬리 전경과 3미터는 족히 돼 보이는 팜파스 글라스까지 사진을 찍지 않고 그냥 지나칠 수 없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우린 여기저기 스폿에서 폼 잡아가며 추억을 남기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음식 먹으며 사진도 찍고, 여행의 느낌을 공유하며 이야기 꽃을 한 참 피웠더니 두 시간이 훌쩍 갔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찾은 곳은 십여 년 전 갔었던 애월읍에 있는 금산공원이었다. 원래 난대림 보호지역이지만 십여 년 전에는 비도 오고 안개까지 있어서 그랬는지 더욱 열대우림 분위기가 났었다. 하지만 오늘은 날씨도 쾌청했고, 시월말이라고 하기에는 조금 덥기까지 해서인지 그냥 나무 가득한 조용한 숲길 같았다. 하지만 입구에서 한 참을 들어가다 보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나무는 뻗어있고, 사람까지 없는 고요한 공원이라 두려움마저 들었다. 아내는 공원 안쪽을 한참을 돌며 십여 년 전 느꼈던 그 이국적이고, 웅장한 감동의 스폿을 찾느라 분주했다. 아쉽게도 아내가 느꼈던 그 추억의 장소는 찾지 못했다. 하지만 공원에서 우연히 만난 고양이 한 마리가 애교를 부려 아쉬움을 달래줬다. 고양이와 나란히 사진 한 장 건졌으니 이 또한 추억으로 남았다. 계획대로 되지 않았어도 귀여운 변수 하나만으로도 여행은 이렇게 웃을 수도, 추억할 수도 있다는 걸 새삼 느꼈다.
조용히 금산공원을 내려와 애월항을 거쳐 우리의 종착지인 제주시로 들어왔고, 맛있는 저녁식사 후에 공항으로 출발했다. 우리의 이틀간 제주여행은 이렇게 끝이 보였다. 발목이 불편한 아내를 위해 조금 덜 걷는 여행을 계획했으나 이틀간 걸은 거리가 이만 삼천보를 넘었다. 몸은 피곤했지만 마음만은 행복 가득 제주도에서 안고 가는 기분이다. 아내에게도 이틀간의 제주여행이 어떤 면에서든 힐링 포인트가 된 것 같다. 내게 여행은 터닝 포인트가 아니다. 다만 일 년을 잘 살아온 내게 주는 선물 같은 힐링포인트다. 올해부터 아내에게도 나와 함께 하는 여행이 힐링 포인트가 되길 빌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