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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추억바라기 Jul 16. 2024

아내가 몰래 연애를 시작할 거 같다

필요한 건 이성적 판단이 아닌 무조건적인 공감일 때도 있다

결혼 23년 차. 아내와 난 만 22년 10개월을 함께 살았다. 이 정도 세월이면 보통은 남보다 못한 사이가 됐거나 남과 다름없는 관계가 됐을 시간인데 난 아직까지도 아내가 좋다. 물론 아내도 내 매력(?)에 푹 빠져 산다. 어떤 면에서 내가 대체 불가라고 하니 뭐 그 정도로 생각하기로 한지 오래다.


우리 부부의 지인들은 이런 우리 관계를 알고 있은 지 오래다. 처음엔 '설마' 하는 의심으로 시작했다. 시간이 지나며 '대단해', '멋지다' 등의 부러움과 응원을 보냈다. 하지만 이젠 '아직이냐?', '이젠 헤어져' 등 포기했거나, 지쳐하는 태도를 보인다. 그래도 아내와 난 아랑곳하지 않고 서로에 대한 표현을 아끼지 않는다.


얼마 전 아내가 활동하는 텃밭에서 팜파티를 할 때였다. 감자 수확 기념 삼겹살 파티였다. 올해는 새 식구들이 많아 아직까지 나와 아내의 깊은(?) 관계를 알지 못하는 분들도 여럿 있는 걸로 알고 있다. 고기에 약간의 낮술이 들어간 시점에 평소보다 밀도 있는 개인사들이 오갔다.


'아, 술도 한잔했겠다 비도 오고 날씨도 꾸물하니 기분이 좀 그러네요. 아, 얼마 전에 나왔던 '선업튀(선재 업고 튀어) 보셨어요? 그건 연애하는 사람들이나, 연애가 하고 싶은 사람들이 딱 봐야 할 드라마인 거 같아요. 지금 제 나이에도 이러니 젊은 친구들은 오죽할까요'

텃밭지기 한 분이 최근 인기리에 종영한 드라마 얘기를 하며 공감을 유도했다. 몇몇 분 들은 방송을 보지 못해 크게 관심이 없었지만 몇 번 시청했던 아내는 조금 공감하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전 그 드라마 완주해야겠네요. 이미 연애를 하고 있으니까요'

오히려 말을 꺼냈던 분이 아닌 다른 분이 크게 놀란 눈으로 아내를 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선생님 연애하세요? 누구랑요?'

몇몇 분은 아내의 입에서 나올 답을 아셨는지 음식을 먹으며 빙긋이 웃으셨다. 하지만 올해 새롭게 들어온 텃밭지기 몇 분은 얼굴까지 들이밀며 아내 입에서 나올 대답을 궁금해했다.

 '아~, 신랑이요. 저 남편이랑 쭉 연애하고 있는걸요'

 '...... 에이 뭐예요 선생님. 농담도 잘하시네요 호호'

처음엔 잘못 들었나 싶어서 눈만 꿈뻑이며 있던 텃밭지기들도 기대했던 답이 아니었는지 한바탕 놀리고 웃어버렸다.


그날 저녁 퇴근하고 돌아온 내게 아내는 오늘 텃밭에서 했던 얘기들을 해줬다. 늘 듣는 얘기지만 식상하지 않은 우리 얘기였다. 한바탕 둘이서 웃고는 우리가 알콩달콩 사는 모습을 지켜보는 분들이 늘어난다는 생각에 또 한 번 웃음이 났다. 우린 그들의 '뭐예요', '어이 지겨워!' 하는 소리들이 앞으로도 잘살라는 격려와 응원이라는 걸 너무도 잘 안다. 그래도 이젠 나이도 있어서 주책이란 소린 조금 민망하긴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장난 삼아 아내에게 제안을 했다.


'영희 씨, 우리 남들 몰래 연애할까 봐요. 너무 많이들 아니까 이젠 남들 앞에서는 티도 덜 내고, 우리 얘기도 안 하고 하면서요. 어때요, 나랑 몰래 연애하는 거?'


'몰래'라는 단어에 아내와 난 다시 한번 웃었다. 무엇이든 함께 할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하며 우린 늘 오늘같이 대화하며, 별 일도 아니지만 웃을 수 있는 하루를 보낸다. 그 하루하루가 매일 같이 쌓이다 보니 주변의 든든한 시기와 질투를 받지만 오히려 그들의 응원이 '우리 잘살고 있구나' 하는 격려가 되는 것 같다.

부부간에 가장 필요한 덕목 중 하나는 공감이라는 생각이 든다. 사랑은 기본이라는 전제하에 상대방에게 공감할 수 있다면 둘 사이가 나쁠 일이 없다.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지만 많은 분들이 공감보다는 사리분별을 내세워 이성적 판단을 얘기한다. 시시비비를 가리는 것은 직장, 학교, 기타 사회적인 활동에서 중요한 일이지만 가정 특히 부부관계에서는 크게 중요치 않다.


우린 아무 일도 아닌 일에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종종 상처를, 때로는 위로를 받는다. 일상에서 생긴 속상한 일 때문에 상처받은 마음을 털어놨지만 공감은커녕 이성적 판단을 앞세우곤 한다. 마치 직장일처럼 조목조목 따져서 잘잘못을 얘기하는 '사고(?)' 많은 사람이다. 마치 자신이 현명하고, 경험이 많은 사람인 것처럼 '객관화'를 운운하며 현실을 직시하라고 조언한다.


하지만 상처받은 아내나 남편에게 당장 필요한 것은 조용히 들어주는 것이다. 그렇게 듣다가 '그러게', '정말' 같은 작은 리액션이면 충분하다. 잘 들어주는 것만으로도 큰 공감과 위로가 된다. 작은 실천이지만 평소 행하지 않았던 실천이라면 쉽지는 않을 있다. 하지만 서로사랑해서 시작했고, 사랑해서 지켜나가는 관계라정도 작은 노력은 실천해 봐야 되지 않을까.




지난주 김제동 작가의 북 콘서트를 다녀왔다. 이번 책은 '내 말이 그 말이에요'라는 에세이다. 늘 그의 재치 있는 입담이, 따뜻한 생각이 좋았다. 8년 전 그의 책도 좋았지만 이번 책은 일상의 위트 속에 더 어른스럽고, 성숙한 느낌이 들었다. 북토크 내내 웃었고, 아내와 함께여서 더욱 행복한 시간이었다.


북 콘서트가 끝나고 점심을 먹으려고 한 식당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점심때를 지나서인지 식당은 한산했지만 식당 밖 거리를 지나는 사람들은 생각보다 많았다. 무더위도 아랑곳하지 않고 연인 또는 삼삼오오 무리 지어 다니는 모습이 활기차게 보였다. 음식이 나오기 전이라 조용히 식당 밖 거리를 구경하던 아내가 먼저 입을 뗐다.


'홍대라서 그런지 우리가 이 거리에서 제일 나이 많은 사람 같네요. 젊음이 좋긴 좋네요'

'많은 게 나이뿐이겠어요? 우리만큼 오래 연애한 사람도 없을걸요'


내 말에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하는 아내를 보며 난 기분 좋게 웃었다. 우린 늘 같은 마음으로 함께 다른 하루를 살고 있다. 앞으로도 꾸준히 오늘 같은 마음에 다른 하루가 채워지길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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