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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추억바라기 Jul 02. 2024

그날 밤 아내를 위협하는 누군가가 있었다

더 이상 그들을 마주하지 않아서 좋다

'야, 너네 아버지가 벌어다 준 돈으로 학교 다녔으면 아버지 채무도 네가 책임져야지'



야근 중에 아내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최근 바쁜 업무를 이유로 며칠 째 야근이란 걸 이미 아내도 알고 있어서 걸려온 전화가 조금은 의아했다. 통화 버튼을 누르고 입을 떼려는 순간 전화기 너머로 아내의 목소리가 먼저 들려왔다.


'철수 씨... 어떡해. 지금 밖에, 밖에...'


전화기 너머 아내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소리 자체는 속삭이듯 너무 작게 들렸고, 긴장감이 잔뜩 묻어난 소리였다. 놀란 나머지 무슨 일이냐고 물었지만 수화기 너머에는 어린 아들의 칭얼대는 소리를 달래는 아내의 소리뿐이었다. 눈앞이 노래졌고, 전화기를 붙들고 있던 손이 떨렸다.


'영희 씨, 왜 무슨 일이야? 너무 걱정되니까 말 좀 해봐요'

'쉬~, (나지막이) 잠시만요!'


수화기 너머로 잠시 침묵을 요구하는 아내의 소리가 들렸고, 긴장감에 숨소리는 거칠어졌지만 아내의 말대로 잠시 입을 닫았다. 잠깐의 침묵이 지나고 귀에 붙여놓은 전화기 너머로 아내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철수 씨, 밖에 아주버님들이 와 있는 거 같아요. 너무 무서워서 민수 데리고 안방으로 들어왔어요. 아무 생각이 안 나 집에 없는 척하며 전화한 거예요. 지금은 조용한 거 보니까 그냥 건물 밖으로 나간 거 같아요'


상황을 듣고서야 난 전화를 끊을 수 있었다. 강도나 수상한 사람의 침입은 아니어서 다행이지만 머릿속이 복잡한 건 마찬가지였다. 이대로 있어봤자 어차피 알아낸 집이니 마주칠 때까지 몇 번이고 찾아올게 불을 보듯 뻔했다. 전화기를 다시 들었고, 통화목록에서 집에 찾아온 사촌 형에게 전화를 걸었다. 목소리가 차갑다 못해 위협이 느껴졌다. 당연히 그럴 거라 예상은 했지만 조금은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집 밖에서 만나 어떻게든 해결을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전화로 내가 아직 퇴근 전임을 설명한 뒤 집 근처 주점에서 만나기로 약속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렇게 그들을 만난 건 한 시간이 지난 뒤였다. 한쪽 자리에 앉아있는 세명의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친척 형 둘을 제외하고도 험악한 인상의 한 남자가 동석을 하고 있었다. 난 눈인사를 하고 그들의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우습게도 세 명이 나란히 앉았고, 나 혼자 그들을 마주 보고 앉아있는 모양이 됐다. 꼭 재판정의 판사석 앞에 피고인을 부른 자리 배치였다.


반갑지 않은 얼굴을 마주하고 있자니 속에선 쓴 위액이 느껴졌다. 시켜놓은 맥주로 올라오는 위액을 눌렀지만 효과는 없는 듯싶었다. 현재의 문제상황과 해결 등에 논의를 하자는 자리였지만 막상 이야기의 주 맥락은 아버지의 채무를 내게 떠안으라는 위협적인 분위기의 자리였다.


'형님, 이건 아니잖아요. 왜 아버지 채무를 제가 갚아야 해요'

'야이 X, 그걸 몰라서 물어? 너네 아버지가 벌어다 준 돈으로 학교 다녔으면 아버지 채무도 네가 책임져야지. 그 빚보증 때문에 나한테 이자 갚으라고 은행에서 계속 연락 오잖아'

'그 채무 변제 의무는 OO 형에게 있잖아요. 애초에 아버지 가게 인수할 때 조건이 그 채무를 갚는다는 조건이었어요. 그걸 안 지킨 건 OO형이라고요. 화장실 들어갈 때 하고 나올 때 다르다지만 너무 하잖아요'

'야 XX 봐라. 당장 신분증 내놔. 갚을 때까지 딱 압수야. 아니 차라리 차용증 쓰자. 어디서 대가릴 굴려 어?'


얘기가 길어지자 한참 맥주만 마시던 험악한 인상의 남자가 내게 주민등록증을 내놓으라고 큰소리를 쳤다. 애초에 이런 분위기 조장을 위해 데리고 온 후배쯤 되나 싶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함께 동석한 또 다른 친척 한 명이 중재에 나섰다. 내게 변재 할 능력이 될 때까지 매달 나오는 은행 대출 이자를 내라고 제안을 해왔다. 분위기를 봐서는 당장 끝날 상황도 아니고, 그들의 위협적인 태도에 위축이 된 나머지 그렇게 하겠다고 답했다.


다음 달부터 한 동안 난 매달 은행 이자를 그에게 입금했다. 아버지가 다시 돈을 벌고, 자리를 잡으실 때까지 한 동안 이 생활이 이어졌다. 그래봤자 나나 아버지는 은행 이자를 갚는데 급급했고, 원금이 줄어들지 않는 살얼음판을 계속 두드리며 걷는 상황은 이어졌다.


그들과 더는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아버지 사업체가 부도나고 나서 그들의 양면을 고스란히 봤기에 난 더 이상 그들을 보고 싶지 않았다. 한편으로 그럴 수 있겠다 싶다가도 그들의 무시하는 태도와 협박 분위기 말을 들을 때면 치가 떨리게 싫었던 감정이 올라와 날 잠식했다. 마음속에선 이미 그들을 향한 저주도 여러 번 외친 지 오래였다.


하지만 친척이라는 이유로 경조사가 있을 때마다 그들을 마주해야 했고, 그럴 때마다 마음과는 다른 표정으로 그들을 반기는척해야 했다. 아니 오히려 연락하지 는 죄를 고스란히 감내해야 했다. 마치 정말 큰 죄를 지은 죄인인 양. 그렇게 십 년이 넘는 세월을 보냈고, 미련하게도 그 수모도 조금은 무뎌져 가는 듯싶었다. 실제로는 아니었지만.

몇 해전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어머니는 다른 무엇도 남기지 않았고, 남긴 건 당신의 사망 보험금이 전부였다. 아버지와 상의했고 난 가슴 한쪽에 응어리져있던 관계 청산을 위해 마음속 결심을 행동에 옮겼다. 바로 어머니가 남긴 보험금 대부분을 그들과의 관계고리인 은행 대출금을 갚는 데 사용했다. 그렇게 가슴을 짓눌렀던 언제 터질지 모를 폭탄을 제거했다. 어머니가 당신을 희생해서 자식과 남편의 마음을 편하게 해 준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아니 그렇게 생각하고 싶었다.


마주칠 기회가 생길 때마다 주눅이 들었다. 시간이 지나면 해소가 되고, 무감각해질 줄 알았다. 하지만 시간이 가도 해소되지 않고, 무감각해지자고 스스로 주문을 거는 게 전부였다. 여전히 그들이 두려웠고, 피하고 싶었다.


하지만 더 이상 그들을 마주할 일이 있어도 괜스레 주눅 들 일이 없다. 위축될 일도 전혀 없다. 오히려 당당하게 행동하면 그만이다. 그들과 마주할 기회도 없지만 이젠 그들 앞에서도 그냥 당당한 나로 있으면 된다는 생각뿐이다.


사람을 마주할 때마다 느끼는 감정은 크게 둘로 나뉜다. 좋거나 또는 싫거나. 가장 기본이 되는 감정이지만 정확히 양분되고, 상반되는 두 감정으로 마음을 다치기도, 위로를 받기도 한다. 내가 누군가에게 좋은 사람일 수도 있지만 또 다른 누군가에겐 미움을 받는 좋지 않은 사람일 수도 있다.


사람이 착하다고 다른 누군가에게 꼭 좋은 사람이 될 수는 없다. 착하고, 좋은 사람보다 다른 누군가에게 의미 있는 사람이 된다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모든 사람들에게 좋은 사람으로 인정받기는 어렵다. 아니 인정받을 필요도 없다. 그냥 내가 귀하게 생각하는 사람, 나와 가까운 사람들에게는 좋은 사람, 의미 있는 사람이면 충분하지 않을까.


십여 년의 세월에 남은 거라곤 좋지 않은 감정뿐이었다. 미움으로 잠시 감정의 해소는 있었지만 정작 그들을 만날 때마다 위축과 해소되지 않은 감정의 갈증은 사라지지 않았다. 아마 조금은 그들을 저주하며 퍼부었던 마음의 소리에 죄책감이 들어서였을 수도 있겠다 싶다. 이젠 그런 마음에서 자유로워졌음을 느낀다. 그들에게 좋은 사람일 필요는 애초에 없었지만, 날 갉아먹던 미워하는 감정도 내려놨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나의 무관심이 얼마나 큰 복수일지는 모르지만 내겐 나름 큰 위로와 의미 있는 소심한 복수이지 싶다. 덕분에 감정의 여백까지 덤으로 생겼다.


감정은 무한하지 않다. 모든 감정도 총량이 존재한다. 사랑, 미움, 기쁨, 슬픔 등 모든 감정의 근원은 하나에서 비롯된다. 누군가에게 90 퍼센트의 사랑을 쏟으면 남은 감정의 무게는 10퍼센트다. 따라서 적절한 감정의 균형도 필요하다. 누군가에게 쏟는 감정 자체가 삶의 에너지 소비다. 그게 좋은 감정이든, 나쁜 감정이든. 아껴야 잘살고, 아껴야 정작 필요한 사람에게 쏟을 감정에 여유가 생긴다. 그래서 요즘 내 감정의 여유가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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