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수야, 언제 씻고, 언제 머리 말리고 자려고 해. 도대체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네. 뒹굴거리며 쓸데없는 시간 소비하지 말고 피곤하면 빨리 씻고 자 제발!!!'
오늘도 딸아이와 아내는 전쟁이다. 아내는 말 안 듣는 딸 때문에 하루하루가 속 터진다고 앓는 소리다. 뒤늦게 찾아온 사춘기(?) 탓인지 딸은 요즘 더 부쩍 말을 듣지 않는다. 청개구리도 아닌 것이 말하면 듣는 척도 하지 않는다. 옆에서 보는 나도 심하다 싶을 정도다.
요즘은 저녁 늦게 학원을 갔다 와서 방으로 '쌩~'하고 들어가서는 한 시간이 지나도 나오지 않는다. 문 밖에선 아내의 목소리가 시간이 갈수록 한 톤씩 올라간다.
'얼른 화장 닦고 씻어 지수야~', '언제 머리 말리고 자려고', '아침마다 피곤해하지 말고 얼른 씻고 자라'
'네~', '알았어요'
아내의 말을 듣고서는 딸은 대답뿐이다. 방 밖으로는 나올 기미가 없다. 참다못해 문을 열고 들어가면 딸은 책상에 앉아 핸드폰을 하고 있거나 침대에 누워있다. 평일 밤은 늘 빨리 씻으라는 아내와 늦은 시간까지 버티다 엄마의 잔소리에 느지막이 씻으며 말 안 듣는 딸의 신경전이 치열하다.
'지수야 시험도 얼마 안 남았는데 오늘은 일찍 공부하러 나가는 게 어떨까. 집에 있으면 핸드폰만 붙들고 시간 죽이잖아'
'......'
한 동안은 주말 아침 고등학교 2학년인 딸아이가 알아서 공부해 주길 바라며 기다렸다. 기대가 크지는 않았지만 돌아오는 건 실망뿐이었다. 딸아인 우리 맘을 아는지 모르는지 소파에 붙어서 핸드폰을 만지작 거리며 시간을 보내는 일이 많았다. 눈치를 주면 방에 들어가는 시늉은 하지만 정작 방에 가서도 잠을 자거나 조는 일이 많았다. 두고 보고 있자니 나중에라도 후회에 현타가 올 딸아이가 걱정돼 조금은 공부하는 게 어떠냐고 좋은 말로 타일러 봤다. 하지만 말해도 딱히 듣지도 않고, 서로 간에 감정만 상하는 일이 반복됐다.
'지수는 고등학생이 돼서야 사춘기가 온 것도 문젠데 그냥 만사가 귀찮은 거 같아요. 성실한 점은 좀 아빠를 닮았으면 좋았을 것을 왜 엄마를 닮아서 저리 게으른지...'
큰아이를 키우면서 먼저 공부하라는 얘길 하지 않던 우리의 교육철학도 딸아이 때문에 무너진 지 오래다. 아내는 자신의 게으름을 닮았다고 자책을 하는 일이 잦아졌다. 아내의 이런 생각이 어느 부분은 공감이 가지만 전적으로 동의가 되진 않는다. 왜냐하면 아내가 게으르다고 생각하는 건 몸이 따라주지 않아 힘들어하기 때문에 활동적이지 않을 뿐이지 할 일을 미루는 타입은 절대 아닌 걸 알기 때문이다.
아내는 몇 달 전부터 엔틱 소품을 포장하는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매일 가는 건 아니지만 일주일에 한 번은 꼭 일을 하는 정기적인 업무다. 특별히 기술을 요하는 건 아니지만 아내 나름의 사전준비와 몇 개월간의 노하우는 이젠 고용한 사장님조차 마음으로 의지하는 눈치다.
'사장님 어제 방송 보니까 큰 소품들이 좀 많더라고요'
'언니, 어제도 내 개인방송 봤군요. 대단해요. 그나저나 들고 있는 저 소품은 어제 판매가 된 건가요? 어제 메모가 안 돼있던데...'
'네, 어제 XXX님한테 주문받았던 거 같은데요'
그런 사장님 마음은 이미 시급인상에서도 알 수 있었다. 일주일에 단 하루, 네 시간 일하는 아르바이트생에게 두 달이 되지 않았음에도 시급을 인상해 줬다. 그마저도 다시 한 달 만에 또 인상이라니 제대로 인정받는 아르바이트생이다.
그도 그럴 것이 아내가 일하는 몇 개월 동안 함께 일하는 파트너는 두 번이나 바뀌었다. 아무리 일용직이지만 고용주 입장에서는 사람이 바뀔 때마다 업무 교육을 해야 수고스러움은 피할 수 없다. 이렇게 교육 후 익숙해질 만하면 그만두고, 알아서 할만하다 싶으면 더 이상 출근이 어렵다고 하니 쭉 출근하는 아내가 예뻐 보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더구나 전날 판매 물량을 사전에 학습을 하고 오는 준비성까지 철저하니 뭐 누구라도 시급을 올려주고 싶었을 것이다.
이런 아내를 보면 자신이 게을러서 딸아이가 게으르다는 말에 더욱 동의가 되지 않는다. 딸은 그냥 지금 만사가 귀찮고, 부정적인 생각으로 자신의 의지를 훼방하는 시기일 뿐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때마침 고등학교 2학년이라는 중요한 시기와 맞물려 있을 뿐이지 자연스러운 변화다. 이러다 시간이 가면 또 좋아질 것이고, 오늘을 후회하는 내일을 보낼 것이다. 그러니 성년이 아닌 미성년이고, 어른이 되기 위한 성장통을 열심히 겪고 있는 중이다.
'엄마, A대학에 내가 원하는 과가 있는데 서울에 있는 학교는 아니지만 지금부터 열심히 하면 지원할 수 있지 않을까'
다행이라면 딸아이가 요즘 조금씩 변하고 있다. 자신에게 내렸던 게으름 신을 이겨내려고 한창 노력 중이다. 고등학교 1학년이 끝날 무렵 겨울방학을 잘 보내자고 타일러서 조금은바뀐 딸아이였다. 이렇게 변한 모습으로 4개월은 보냈던 것 같다. 딱 2학년 중간고사 때까지. 이번 변화도 한시적이라고 해도 지난번 4개월보다는 조금 더 긴 시간을 달리면 그래도 조금 더 나은 결과가 나오지 않을까 싶다. 이렇게 2~3번만 하다 보면 고등학교도 끝이다. 사실 고등학교를 졸업한다고 끝날 일은 아니다. 하지만 미리부터 절망(?)을 심어줄 필요는 없으니까. 단지 오늘을 칭찬하고, 지원하는 게 자식을 지켜보는 부모의 몫이지 싶다.
자식이 부모를 닮는 건 당연한 일이다. 타고난 외모나 성격보다 자라난 환경과 가정의 분위기가 성장하는 아이들에게 무엇보다 중요하다. 단순히 물질적인 지원보다는 가족 간에 서로 사랑하고, 아껴주는 분위기야 말로 우리 아이들이 잘 자랄 수 있는 양분이지 않을까.
자식에게 무작정 아낌없이 퍼주는 부모가 꼭 좋은 부모는 아니다. 부부간에 서로 아껴주고, 사랑하고, 존중하는 것만으로도 자식에게는 충분히 좋은 부모이자, 인생의 스승일 수 있다.안식처 같은 포근함과 은은하게 오는 온기같이 부모의 후천적 요인만으로도 아이들은 더 선한 방향으로 성장한다. 아이들은 오감으로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만지고, 맛보는 모든 것들을 통해 영향을 받고, 성장한다.
'아이 하나를 키우기 위해서 마을 전체가 필요하다'는 아프리카 속담처럼 자녀 한 명을 키우는 데는 여러 사람, 사회의 지원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그만큼 누구 하나의 힘만으로 자녀가 잘 자라길 바라는 건 '어불성설'이다. 마을의 노력까지는 아니더라도 부모가 함께 노력해야 할 일이다.
자녀들은 부모를 보며 배움을 시작한다.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는 말처럼 유년기의 습관들은 좀처럼 고치기 어렵다. 유년기의 생활 습관이나 언어, 행동들은 대부분 부모로부터 습득한다. 따라서 집안 분위기, 환경, 부모와의 관계 등이 무엇보다 중요한 시기다. 사회성을 배우는데 가장 좁은 단위의 집단이 가족인 것처럼 그 구성원들의 역할 또한 중요하다. 아이들에게 내재될 성향을 고려하면 집에서 할 말과 행동 하나하나의 의미가 중요함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자식은 부모의 거울인 것처럼 부모 또한 자식의 거울이라는 생각이 드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