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길 집 근처 헬스장에서 일주일에 두세 번은 운동을 한다. 그날도 운동을 하려고 서둘러 퇴근했고, 헬스장에 도착한 시간은 8시가 되기 전이었다. 가볍게 몸을 풀고 러닝머신에 올랐을 때 스마트폰의 진동음이 울렸다. 러닝머신의 속도를 올리던 난 다시 속도를 줄이고, 스마트폰 화면을 열었다. 화면 속 알람은 오랜만에 연락온 A 친구의 메시지였다.
'얘들아... B 아버님 오늘 오후 3시에 갑자기 돌아가셨데...'
나이 들어 연락이 없던 친구의 갑작스러운 연락은 거의 열에 아홉은 부고 소식이라더니. 안타까운 소식이 모바일 부고장과 함께 톡 화면에 보였다. 장례를 치르는 곳이 지방이고, 늦은 시간이라 다들 내일 모일 것을 약속하고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내일 보자'는 말로 톡방을 정리했다. 한 친구의 우스개 소리처럼 '이젠 일 년에 한 분씩'이라는 말이 실감 나는 밤이었다.
다음날 오랜만에 친구들을 만났다. 좋은 일로 만나면 좋겠지만 이젠 싫든, 좋든 일 년에 한, 두 번씩은 이런 이유로 본다는 게 조금은 서글프다. 그래도 반가운 얼굴들인지라 무거웠던 표정들은 금세 걷혔다. 각자의 근황과 예전 추억들을 이야기하며 분위기는 조금씩 화기애애해져 갔다.몸에 들어간 몇 잔 술이 분위기를 조금 더 부드럽게 했다. 삼십 년이 넘은 친구들이 모이면 옛날 얘기는 부록처럼 달려오기 마련이다. 오늘도 한 친구의 입에서 그 시절 얘기가 나왔다.
'맞다, 맞아! 그땐 쌍둥이 애들이 제일로 유명했지. 나도 한, 두 번 붙잡혔었는데 무사히 빠져나오긴 했어. 옆에 있던 친구들은 엄청 맞았거든. 근데 난 걔들 옆에 있던 한 놈 때문에 안 맞았어. 걔가 나랑 초등학교 때 제일 친했던 애였거든. 걔가 그냥 난 보내주자고 해서. 그땐 정말 걔한테 고마웠는데 지나고 나니 같이 잡혀있던 애들한테는 좀 미안하고, 그러더라고'
내게도 두렵고, 쫄았던 마음과 억울함을 참지 못한 자존심이 섞여 있던 그런 시절이었다. 여렸지만, 굽히지 않았고, 두려웠지만,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던 바로 내 중학 시절. 아마 그 시절의 난 제법 강단도 있었고, 뭐래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충만했던 시절이었던 것 같다. 지금과는 좀 다르게.
초등학교를 졸업 후 중학생이 되고 나서 학교와 집이 더 멀어졌다. 당연히 부모님은 등하굣길을 걱정했지만 내게는 그보다 더 큰 그림이 있었다. 드디어 자전거를 사달라는 명분이 생겼다는 아주 큰 욕심이 말이다. 뭘 갖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 게 그때가 처음이지 아니었을까 싶을 정도로 욕심 없이 초등학교를 다녔다.
초등학교 다니는 내내 동네 형들이 자전거 타는 모습을 무척 부러워했다. 타고 싶은 마음에 형들에게 자전거를 배웠고, 종종 자전거를 빌려 타기도 했었다. 그러던 초등학교 5학년때 자전거를 타다 크게 사고가 났고, 그날 이후 부모님에겐 자전거에 '자'짜도 꺼낼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경우가 달랐다. 다른 것도 아닌 학교를 다녀야 했기 때문에 부모님도 한발 양보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초등학교도 멀었지만 당시 중학교는 집에서 3킬로는 족히 떨어져 있는 거리였다. 버스를 타고 다닐 생각은 아예 해본 적이 없었다. 당연히 자전거를 타고 등교해야겠다는 마음뿐이었다. 그렇게 내게도 자전거가 생겼다. 나보다 큰 자전거를 당시 어떻게 끌고, 타고 다녔는지 지금 생각하면 대견하다 못해 신기하기만 하다.
매일 아침 학교 가는 길이 즐거웠다. 자전거를 탈 수 있어서. 학교 수업이 끝나는 오후 시간만되면 같은 이유 때문에 또 한 번 기뻤다. 그러던어느 날 그 자전거 때문에 시비가 붙었다. 학교 정문을 지나 자전거 주차장으로 들어가던 난 동급생인 한 친구와 살짝 부딪치는 사고가 있었다. 급하게 자전거에서 내려 사과를 했지만 그 동급생은 사과가 뒷전이었다. 단지 자신의 바지에 묻은 먼지를 보며 연신 욕만 했다.
'아이씨 X~, 도대체 앞을 보고 다니는 거야 새꺄~'
내게 화가 난 건 이해가 됐지만 사과도 하고 있고, 다친데도 없어 보였고 교복은 털면 그만인데 욕까지 하는 동급생을 그냥 보고 있기가 불편했다.
'미안한데. 근데 욕까지 할 건 없잖아'
동급생은 내 말에 바지 먼지를 털다 말고 몸을 일으키더니 세워놓은 내 자전거를 걷어차 버렸다. 덕분에 저항이 없던 자전거는 옆으로 날아가 쓰러졌다. 게다가 자전거가 쓰러진 자리에 물까지 고여있어서 흙탕물을 흠뻑 뒤집어쓰는 꼴이 됐다.
'야, 너 몇 반이야. 이따 점심시간에 보자. 어?'
방귀 뀐 놈이 성낸다고 자전거를 찬 녀석은 오히려 더 화난 얼굴로 내게 선전포고를 하고 사라졌다. 등교종이 울리는 바람에 더는 어쩌지 못하고 그렇게 난 교실로 뛰어들어갔다. 점심시간 전까지 그 사건은 잊고 있으려고 했는데 많은 반 친구들의 도움(?)으로 오히려 긴장감은 커져갔다.
'철수야, 어쩌려고 그랬냐? 걔 학교 일진들하고 친하데', '아냐 그냥 일진이래', '태권도 3단이라고 하던가. 아마 우리 시 중학생 대표라고 하던데', '그냥 나 죽었어하고 뺨 때리면 몇 대 맞고 끝내'
주변에 친구들은 많은 정보를 전달해 줬다. 도움이 되는 정보인지 안 되는 정보인지 헷갈렸지만. 어쨌든 걱정인지, 관심인지, 흥미인지 모를 반친구들 기대와 함께 시간은 지나 점심시간이 됐다. 밥은 먹고 오겠지 하는 생각에 도시락을 막 펼치던 때였다. 앞문이 벌컥 열리더니 누군가 들어왔다. 혼자가 아니었다. 지금 생각하면 당시 장면이 딱 '말죽거리 잔혹사' 영화 속 한 장면 같았다.
'야 김철수 어디 있냐'
눈이 마주친 것과 동시에 아침에 실랑이했던 녀석이 책상을 밟고 날아들었다. 순간 녀석의 발이 날아왔고 난 가슴을 차였다. 워낙 갑작스러운 녀석의 행동에 무슨 일이 일어난지도 모른 체 바닥에 쓰러졌다. 찰나였지만 친구들 말처럼 몇 대 맞고 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머릿속과 달리 몸은 이미 움직이고 있었다. 어느새 난 의자를 손에 든 체 녀석들을 향해 휘두르고 있었다. 덩치가 작은 것도 의자를 든 이유였지만 두 녀석이 함께 덤벼드니 손에 뭘 들지 않고는 버틸 수가 없었다.
'아이~씨 X, 어디 쳐봐! 내가 그냥 당할 줄 알아? 니들 사람 잘못 건드렸어 알아? XXXX~!!!'
열다섯 내 인생의 명대사였다. 쫄았지만, 두려웠지만 내겐 머리보다 더 빠른 입과 몸이 먼저 반응했다. '붕~붕~' 휘두른 의자 때문에 녀석들은 더 이상 가까이 다가오지 못했다. 이런 상황에 한 술 더 떠 난 들고 있던 의자를 창문 쪽으로 힘껏 날렸다. 힘껏 날아가던 의자는 아쉽게도 창턱에 부딪쳐 바닥으로 떨여졌다. 창을 깨려는 의도가 조금은 있었기에 내겐 아쉬운 결과였지만 이 행동으로 두 녀석은 '두고 보자'는 말을 남기고 교실을 나갔다.
그 일이 있고 난 며칠 뒤 두 녀석과 화해했고, 내겐 더 이상 걱정할 일이 생기진 않았다. 무모하다면 무모했지만 쥐어짜듯 낸 내 용기 때문이었는지 이후로도 중학교 시절은 큰 사건, 사고 없이 지나간 듯했다.
오래전 가슴을 두드렸던 이야기들은 두고두고 회자된다. 혼자서 떠올릴 수 있어도 그 시절을 함께한 친구들과 이야기하면 더욱 생동감 있는 모습이 재생된다. 함께한 친구들의 리액션에 크게 웃으면 그 사건은 희극이 되기도, 안타까운 표정과 함께 침묵이 이어지면 비극이 되기도 한다. 그래도 무엇보다 시간 지나고 함께 얘기하며 공감할 수 있는 친구들이 있는 것만으로도 인생은 희극이 되지 않을까.
물불 가리지 않고 부딪쳐 헤쳐나가는 것도 능사가 아니듯이 직면한 문제를 피하는 것도 용기라고 생각한다. 때론 자존심을 굽히고, 양보하고, 상대방을 위해 배려하는 것도 해묵지 않은 세련된 태도다. 다만 이런 태도가 포기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종종 포기 또한 용기로 생각하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우리의 용기는 이보 전진을 위한 일보 후퇴이지 전진 자체를 포기하는 후퇴는 아니여야 한다.
해보지 않은 일에 한계를 만들고, 도전이라는 말 자체를 머릿속에서 지우고 사는 삶엔 후회가 따른다. 가끔은 학창 시절 앞뒤 재지 않고 냈던 용기가 부러울 때가 있다. 도전과 용기라는 단어가 어울리는 건 십 대, 이십대라는 생각이지만 나이 든 지금도 그 단어가 꾸준히 설렐 수 있는 삶을 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