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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추억바라기 Jun 04. 2024

수술비 줬다고 생색낸 대표에게 발끈했던 이유

졸업의 김원탁 원장 마음이 그날의 대표 마음 같지 않았을까

"한심하다는 듯이 그르지 마~"

공원 속 도심천 계단에 앉아 잔뜩 술에 취한 그가 버럭 소리를 지른다.

"원장님 저 갈게요"

"사과~, 여기 내 가슴 깊은 곳에서 나오는 내 진심 어린 사과를 받고 가라고~. 알았지? 여기, 여기 있어! 앉아있어. 여기 ~!!!"

비틀거리는 몸을 움직여 자리를 옮긴 그는 개천 위 큰 돌다리 위에 가서 무릎을 꿇고는 처량한 표정으로 말한다.

"서혜진 팀장님 진심으로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깜짝 놀란 서혜진은 급하게 원장에게로 다가가며 말한다.

"원장님, 일단 일어나시고요. 이성적으로 생각하시자고요"

"제발, 제~발~!!! 나를, 우리 학원을 버리지 말아 줘"

머리까지 조아릴 기세다. 비굴한 모습으로 그는 서혜진의 동정을 구하는 눈치다.

"일어나세요. 일어나세요 조옴~!"

이런 그의 모습에 당황해하던 그녀는 그의 팔을 끼고 어떻게든 일으키려고 애쓴다. 하지만 이마저도 쉽지 않다. 술 취한 그의 주사인지, 말 그대로 처절한 절규인지 알 수 없는 소리뿐이다.

"약속해 줄 때까지는 안 일어날 거야!"


대치동 학원가를 배경으로 학원강사들의 삶을 조명한 드라마 졸업의 한 장면이다. 학원장이 학원의 대표 강사였던 한 국어강사(서혜진)를 겉으로는 위해주고 치켜세우면서도 속으로는 학원을 떠날까 늘 두려움에 전전긍긍이다. 위 장면은 어떤 사건을 계기로 서혜진을 좌천시키려고 했다가 오히려 악수를 둔 후의 모습이다. 학원을 떠나지 않게 술을 먹고 무릎까지 꿇어가며 사과하는 모습이 환경만 다르지 예전 내 상황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씁쓸한 웃음과 함께 그 시절이 떠올랐다.


전임 팀장의 이직으로 회사생활 10년이 되지 않았을 때 첫 팀장 직책을 받았다. 회사를 다니며 처음으로 여럿 식구를 챙겨야 하는 책임이 필요한 자리였다. 서툴렀지만 누구보다 열심히 일했고, 일한 만큼 인정도 받았다.


일하는 내내 힘은 들었지만 재미도 있었고, 성과가 있으니 보람도 생겼다. 팀장을 맡았던 해에는 전년도 성과와 팀장 직책에 대한 책임을 무게로 연봉 인상도 만족스러웠다. 동기부여는 충분했고, 업무에 대한 욕심도 많이 생겼다. 젊은 동료들이 많아서인지 분위기도 좋았고, 대표이사 포함 임원들도 합리적인 듯 보였다.


하지만 이런 내 기대감은 이직한 지 2년이 지난해부터 조금씩 떨어지고 있었다. 가장 기본이 되었던 급여 지급이 문제가 되기 시작하면서 회사에 대한 만족도, 업무에 대한 흥미도 반감되었다. 결혼하고 자식들까지 있던 몸이라 다른 어떤 것보다 민감할 수밖에 없었다. 처음 한 두 번은 여러 차례의 사과와 양해로 시작됐지만 해를 거듭할수록 이런 일은 조금 더 과감해졌고, 오히려 당하는 직원들은 조금씩 둔해져 가는 눈치였다.


어찌 되었건 30대 열정을 담고 일했던 곳이었다. 회사 사정이야 어쩔 수 없다고 치면 좋은 감정만 가득 안고 떠날 수 있었던 곳이라 늘 생각했다. 하지만 현실이 다르다는 것을 아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본부장님, 드릴 말씀이... 저 다음 달까지 일하고 정리하겠습니다. 더 나이 먹기 전에 예전 하던 일 찾아서 가게요"


회사를 떠나는 데는 여러 이유들이 있겠지만 안정적이지 못한 급여가 그 첫 번째였고, 힘든 업무 강도 또한 한몫을 했었다. 잦은 야근과 심야 작업이 한창때야 괜찮았지만 나이가 들면 들수록 힘에 부쳤다. 세월을 역행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 생각했고, 할 만큼 했다는 생각이 컸기에 박수받으며 나갈 거라는 생각까지 했었다.


며칠이 지나서 대표이사의 호출이 있었다. 걱정은 됐지만 올 것이 왔다는 생각을 했었다. 최소한 붙잡는 시늉정도는 있을 거라고 생각했기에 불편한 자리임을 알아도 견딜 수밖에 없었다.


대표이사 방을 노크하고 들어가자 책상에 앉아있던 대표는 무거운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대표실 중간 테이블 자리를 가리키며 앉으라고 권한 후 내가 들어왔던 대표실 방문을 닫았다.


"김 팀장, 꼭 그만둬야겠어? 당신 수술할 때 수술비도 내 사비로 처리해 줬잖아. 다시 생각해 주면 안 될까?"

"대표님, 우선 죄송하다는 말씀 먼저 드리겠습니다. 수술비 주신 건 무척 감사했습니다. 하지만 막상 월급이 제대로 나왔으면 수술비도 받지 않았을 겁니다. 몇 달째 급여가 나오지 않는 시점에서 어쩔 수 없이 홍보팀장에게 요청했던 건데 제 사정이 딱해서 대표님께 아마 말씀드렸던 걸로 압니다"

대표이사의 말에 당황스러워 말문이 잠시 막혔지만 정신을 가다듬고 그의 요청을 정중히 거절했다.

"후~"

잠시 고개를 들고 한숨을 쉬던 대표는 갑자기 내 앞에 무릎을 꿇고선 내 손을 잡았다.

"김 팀장, 나 좀 살려줘. 회사 좀 살려줘 응. 내가 이렇게 사정하잖아"


갑작스러운 그의 행동에 난 당혹스럽다 못해 두렵기까지 했다. 당시 난 무릎수술 직후라 그의 맞은편에 함께 무릎을 맞대지는 못했지만 마음만은 그에게 사정하고 싶었다. 제발 날 놔달라고. 결국 그의 제안을 거절하고 대표실을 나온 다음부터 그는 대놓고 폭언과 협박을 일삼았다.


'인수인계 제대로 하지 않고는 퇴사는 꿈도 꾸지 마', '네가 잘나서 내가 잡는 줄 알아?', '너 같은 애들은 널렸어 알아?', '너 옮긴 회사에서 잘 다닐 수 있을 거 같아? 내가 가만히 안 있을 거야'


2~3주가 넘는 시간 동안 그는 날 볼 때마다 불편한 말들을 했고, 그런 그의 행동은 퇴사 직전까지 이어졌다. 당시 난 퇴사 스트레스가 너무도 심해서 한 동안 말을 할 수 없는 '실어증'까지 왔었다. 그런 그의 괴롭힘에도 시간은 흘렀고, 난 그렇게 회사를 떠났다. 5년을 다녔던 회사에 남은 거라곤 그의 폭언, 협박으로 인한 상처뿐이었다.


다행이라면 퇴사 후 그의 협박은 그냥 말뿐이었고, 내게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오히려 일이라면 그에게 생긴 듯싶었다. 내가 회사를 떠나기 전부터 적지 않은 직원들이 이직했지만 내가 퇴사한 후로는 본격적인 인력 이탈이 있었다. 명이 넘던 회사가 30명 남짓의 작은 규모로 축소되었고, 개발했던 다양한 솔루션들을 여기저기 매각했다. 당연히 매출은 상상 이상으로 줄었고, 내부 직원 횡령 소문까지 무성했다.

한 조직을 이끄는 리더 자리는 누구에게나 허락된다. 다만 좋은 대표, 존경받는 리더가 되는 길은 쉽지 않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고 했다. 해석하기 나름이지만 이 문구만 봐서는 양날의 해석이 가능하다.


자질, 능력을 의심받았던 사람이 리더의 자리에 앉아 숨었던 잠재력을 터트리며 제대로 된 실력 발휘를 하는 경우를 봤다. 자주 있는 일은 아니지만 전혀 없었던 사례도 아니다. 반대로 묵묵히 자기 일하며 성실하고, 착했던 사람이 높은 자리, 힘 있는 위치에 섰을 때 권위와 악행의 대명사로 돌변하기도 한다.

 

전혀 다른 경우지만 원인 제공은 어울리지 않던 자리에서 나온다. 우리 사회 곳곳의 평범한(?) 자리가 받아들이는 사람에 따라 어울리는 자리가 될 수도, 맞지 않은 옷이 될 수도 있다. 우리를 나쁜 상황에 가두고 경계, 단절, 심지어 혐오와 편견을 만들어내고 있는 잘못된 시스템도 결국 우리가 만들어 가는 게 아닐까.


시간이 지난 예전 일이지만 내겐 많은 걸 배우게 했던 사건이다. 시간이 지나서 모든 일은 반드시 바른 길로 돌아간다는 사필귀정을 생각나게 했다. 좋지 않은 마음은 있었지만 인과응보 같은 결말을 바란게 아닌데라는 씁쓸함은 남는다.


회사를 다니며 종종 간, 쓸개까지 빼줄 것 같은 리더, 동료들을 만난다. 당연히 그 순간만큼은 진심일 수 있다. 하지만 그 순간의 감정이 영원할 것이라는 보장은 없다. 좋을 때 만난 사이는 당연히 관계가 좋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반대로 회사, 환경, 상황 등이 나빠지거나 좋지 않을 때에는 어떻게 바뀔지 모르는 게 사람이다.


피를 나눈 가족, 친구 간에도 돈 때문에 불화가 있는데 하물며 회사에서 만난 사이면 상황에 따라 변할 수밖에 없다. 적절히 내어주고, 적당히 받아가는 약속과 신뢰에서 맺어진 관계이다. 그 거리만큼 꾸준히 유지하면 다칠 일도, 상처 줄 일도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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