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놓쳤네요. 이 규정이 언제 생긴 거지. 같이 있을 때 담당자에게 연락해 보시죠. 제가요? 아뇨, 이사님이 직접 하시는 게 나을 거 같아요'
일 년을 준비해 온 일이었다. 정확히는 일 년 하고도 오 개월이 지났다. X 업체를 만난 건 딱 그만큼 전이었다. 새로운 곳으로 입사하고 제안 업무와 함께 받았던 것은 공공기관에 자사의 제품을 판매하기 위해 꼭 필요했던 인증 업무였다. 막연했지만 입사 전 해당 업무를 맡고 있었던 담당자들조차 여러 번 떨어지고 결국 인증을 획득하지 못했던 일이라 기대가 적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막상 입사 후 당장 업무를 맡고 나니 욕심이 생겼고, 성과를 내고 싶었다.
그렇게 맨땅에 헤딩하듯이 덤벼들려고 했지만 인증을 획득하기 위한 절차나 과정조차 정보가 없던 나는 기댈 곳은 인터넷을 통한 정보 조회가 전부였다. 하지만 번번이 확인한 것은 관련 인증은 전문업체(컨설팅업체)를 사용하지 않고는 성공 확률이 거의 전무하다는 내용이었다. 업체를 쓰는 것에 익숙지 않았지만 선택은 없었고 그렇게 여러 업체 견적과 업체와의 미팅을 가졌다. 마음에 들면 견적이 비쌌고, 견적 금액이 낮으면 업체의 퀄리티는 현저히 떨어졌다.
그렇게 여러 업체 중 한 곳을 선택했다. 견적도 적당했고, 회사소개나 인증을 위한 방향 제시가 명확했다. 아니 명확하다고 여겼다. 그런 오해를 갖고 A, B, C 세 개의 인증 계약을 X 업체와 진행했다. 인증 계약은 건별로 착수, 진행, 성공보수에 맞춰서 돈을 지급하는 방식으로 계약했다. 최종 인증을 성공하면 잔금을 지급하는 방식은 전문업체가 제시한 것이고, 책임감 없이 일하는 업체들을 방지코자 계약업체에 주는 최소한의 안전장치였다. 이것 또한 업계의 관례여서 계약하는 업체 입장에서는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그렇게 해당 업체와 일을 시작했고, 여러 건의 인증 착수와 성공에 대한 상세 계약을 체결했다. 그렇게 계약 후 첫 한 달은 문제없이 진행됐다. 미팅도 자주 했고, 진행 관련 공유도 누락이 없었다. 컨설턴트가 나이는 좀 있었지만 걱정했던 것 같은 업무 태만, 지연 등은 없었다. 여러 번 만나고, 통화하다 보니 조금은 신뢰가 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런 신뢰의 시간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삐걱대기 시작한 건 첫 인증 신청 시부터였다. 컨설팅업체의 업무라는 것이 신청기업이 제공해 주는 문서를 가지고 인증 신청에 맞는 규격서 작성부터 제안서, 신청 서류 검토 등 전반적인 관여다. 하지만 그는 대부분의 작성 업무를 나에게 위임했고, 작성 이후 기본 검토 정도만이 업무처리의 전부였다.
전문업체와 일하는 게 처음이라 의례 일 처리가 그렇게 진행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인증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외부기관 지적과 조언을 들으면 얘기는 한결같았다.
'아니, 업체 안 쓰세요?', '전문업체가 일을 잘 못하네요', '요즘 누가 시장조사를 이렇게 해요. 업체 바꾸셔야겠어요'
처음 한 두 번이야 개인적 견해로 받아들일 수 있었지만 이런 지적이 반복되니 의문이 종종 의심으로 번졌다. 하지만 이런 생각들도 잠시였고, 바쁘게 돌아가는 일정 속에 새로운 업체를 쓰고 자시고 하는 일은 생략됐다. 그렇게 첫 번째 인증을 획득했다. 잠시 가졌던 의심도 잊고, 남아있는 두 개의 인증과 최종 목표를 향해 다시 마음을 고쳐 잡고 일에만 전념했다.
시간이 흘러 X 업체와 일하는 내내 불만은 계속쌓여갔고, 신뢰도 자주 깨졌다. 하지만 불만을 얘기할 때만큼은 태도를 바꾸는 모습을 잠깐이나마 보였고, 일 년이라는 시간을 함께하다 보니 끊어내기가 쉽지는 않았다. 여러 차례 위기는 있었지만 두 번째 인증까지는 어떻게든 획득하는 모양새가 됐다. 성과만 보면 전문업체가 일을 잘해서 라는 생각도 할 수 있지만 대부분의 업무가 전문업체 관여 없이 자체적으로 진행한 것이었다.
마지막 한 건 남은 인증 계약건은 앞의 두 건보다 오히려 더 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았다. 이미 계약이 되어있으니 파기는 쉽지 않았다. 어떻게든 일을 시켜보려고 하면 업체는 인증을 내주는 외부기관에 물어보면 정확한 정보를 줄 거라는 말로 업무를 회피했다. 문제는 기존 계약 세 건 이외에 추가 인증 계약을 해당업체와 진행했다는 것이다. 결국 추가 인증계약한 D 인증을 획득하기 위해서 B를 제외한 A, C 계약을 진행한 것이라 회사에서는 무엇보다 중요한 인증이었다.
업체를 바꾸고자 백방으로 다른 전문업체를 만나보고 수소문했다. 하지만 돌아온 대답은 올해 상반기 두 차수는 신청이 힘들고, 올해 마지막 신청 차수나 내년을 기약하자는 얘기였다. 게다가 D를 위한 관련 인증인 A, C를 자신들이 진행한 것이 아니라 비용 또한 큰 금액으로 계약을 원했다. 결국 울며 겨자 먹기로 기존 진행하던 전문업체와 D인증에 대한 계약도 진행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계약 이후 X 업체의 태도는 여전히 변하지 않았다. 애초에 최종 목표를 위한 인증을 가기 위해 제안 컨설팅을 한 업체라고 믿기 어려웠다. 무기력, 무책임한 태도로 마지막을 일관했다. 업무 회피, 태도, 자세 등의 문제는 계약파기의 사유는 되지만 이를 증명할 자료나 객관적 근거를 제시하는 것이 어려워 보였다. 인증을 획득해야 할 시간적인 문제도 있고 해서 불만은 컸지만 묵묵히 함께 일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업체의 지원 없이 해당 C 인증을 획득했고, D 인증도 자체적으로 신청 문서를 작성해서 서류를 접수했다.
하지만 문제는 D인증 신청접수 후였다. 1차 검토 기관에서 신청제품 유형에 대한 오류를 지적했고, 신청제품 분류 변경은 결국 관련 인증인 C인증부터 정정해야 되는 것을 의미했다. 부랴부랴 신청 인증에 대한 규정을 챙겨봤고, 1년 전 변경된 개정안에 제품 유형에 대한 규정 변경을 찾을 수 있었다. 당장 신청마감이 며칠 남지 않은 시점에서 날벼락을 맞은 셈이었다. 급하게 컨설팅업체 담당자를 호출했고, 회의실 무거운 분위기 속에서미팅은 이뤄졌다.
"급하게 요청드려서 죄송한데 오늘 1차 검토기관에서 메일 온 내용은 들으셨죠. 지금 신청한 저희 제품 분류 유형이 잘못되었다고 합니다. 제가 오늘 규정을 찾아보니 신청 자체를 잘못했더라고요. 이거 물품번호 새로 받는 것도 시간이 걸리지만 당장 C인증은 어떻게 합니까. 이런 걸 미리 체크해서 컨설팅하라고 본부장님과 계약한 건데 이런 걸 놓치시다뇨"
"그러게요. 제가 그걸 놓쳤네요. 이 규정이 언제 생긴 거지. 요즘 너무 바쁘다 보니 그런 거 같네요. 같이 있을 때 담당자에게 연락해 보시죠. 이사님이 직접 하시는 게 나을 거 같아요"
"아시겠지만 C 인증 분류 변경하려면 인증서를 새롭게 받아야 하는데 그 비용 또한 만만치 않습니다. 사실 회사 입장에서는 이 비용 손실도 만만치 않습니다. 이런 일 제대로 컨설팅해 달라고 계약한 건데 이번 일로 저도, 회사도 난처할 수밖에 없어요. 전 애초에전문업체 과실로 밖에 생각이 들지 않아요"
결국 그는 대안도 찾지 못하고 죄송하다는 말로 문제를 회피하며 미팅을 끝냈다. 마지막까지 일을 내게 미루려는 자세는 변하지 않은 채 말 그대로 '먹튀'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X 업체는 마지막까지 자신들의 과실을 인정하지 않았고, 한술 더 떠서 C인증 잔금 요청을 위한 세금계산서를 발행했다. 회사에서는 전문업체의 과실 때문에 발생하는 추가 발생 비용으로 법적 대응을 고려하던 중이었는데 불난 집에 기름을 부은 격이었다. 회사는 D 인증 계약금 반환 요청에 C인증 잔금 지급 불가 통보에 대한 내용 증명을 보냈다. 그렇게 내용 증명 후 전문업체는 발행했던 C인증에 대한 세금 계산서를 회수했고, 더 이상은 대응을 하지 않았다.
그날 이후 회사에서는 업체와의 계약을 파기했고, 추가 인증비용을 지급 후 기존 C 인증명, 인증범위를 변경하였다. 물론 문제가 생겼던 D 인증은 해당 회차에서 신청까지는 가능했지만 획득하는 데는 무리가 있었다. 다행히 전문업체 없이 다음회차에 D인증을 획득하였고, 계획했던 네 건에 대한 인증을 모두 획득할 수 있었다. 의미 있는 결과였다. 덕분에 회사도 더욱 성장하는 한 해가 될 수 있었다.
일로 만난 사이에서는 '갑과 을'의 관계가 있기 마련이다. 계약서 자체만 봐도 '갑'과 '을'로 구분한다. 물론 갑, 을에 대한 관계 정의는 회사나 개인의 견해차가 크다. 돈을 주고 일을 부리는 사람이 주로 갑의 위치에 있다 보니 아무래도 조금은 힘을 휘두르는 입장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반대로 돈을 주고 일을 부리는 입장에서 제대로 일에 대한 성과를 내기 위한 정당한 요구는 명확히 필요하다.
'을'의 입장에서 명확한 요구사항이 없이 알아서 잘해달라는 '갑'은 오히려 더 갑질하는 대상으로 보인다. 무리한 요구가 아닌 명확한 요구를 가지고 업무 요청을 하는 것은 정당한 '갑'의 권리다. 이런 '정당한'의 범위를 규정하기 위해 둘 간에 계약서가 존재하고, 계약범위 안에 정당함은 어떠한 감정도 배제할 명분이 충분하다.
계약관계에 놓이지 않은 여러 인간관계에서도 부당한, 무리한, 적절치 않은, 불합리한 요구들은 있기 마련이다. 이런 부적절한 요구나 요청에는 불응이 정답이다. 마지못해, 어쩔 수 없이는 정답이나 해답일 수 없다. 단지 오답 중 하나일 뿐이다. 반대로 정당한 요구, 요청을 했음에도 불응하는 것 또한 해답이 될 수 없다.
얼마 전 전문업체와 계약을 파기한 것은 단순히 한 사람의 능력이 부족해서, 단순히 결과가 좋지 않아서는 아니다. 일 년이 넘는 시간 동안 그가, 그 업체가 보여준 업무 태도, 개인의 자세 등이 결국 좋지 않은 결말을 남긴 것이다. 결과적으로 그 전문업체가 알아서 해줘야 할 일을 하지 않은 덕(?)에 난 인증 관련 준 전문가가 된 듯하다. 비싼 수험료는 냈지만 그래도 자산으로 쌓은 것 또한 값어치가 있어 보이니 다행이라면 다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