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가 친구에게 사기를 당한 것 같습니다. 오랜 기간 상상할 수 없는 큰돈을 저 몰래 빌려준 것 같아요'
얼마 전 함께 일하는 동료가 며칠 동안 표정, 행동이 심상치 않았다. 잦은 휴가 또한 이상하다 싶었는데 둘이 마주한 자리에서 동료는 조심스럽게 그간 얘길 꺼냈다. 어느 정도 감정을 누그러뜨리고 말하는데도 후배의 감정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말하는 본인도 기막히고, 화가 났겠지만 얘길 듣는 나도 답답했고, 화가 났다.
친구에게 칠 년을 지배당했다.
얘기의 전말은 이랬다. 후배의 아내에게 오랜 시간 연락이 없던 한 초등학교 친구에게서 갑자기 연락이 왔다. 처음엔 오랜 시간 연락하지 않았던 사이라 어색하고, 불편했지만 친구의 잦은 연락에 금세 가까워졌다. 이렇게 가까워진 친구는 어느 날엔가부터 자신의 힘든 생활고를 넋두리처럼 얘기하며 후배 아내에게 한 푼, 두 푼씩 돈을 빌려갔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긴 했지만 있지도 않은 생활고였다.
처음엔 남편 개인회생으로 힘들어서 그러니 생활비 명목으로 가끔 돈을 빌려갔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더 대담해져 매주 작게는 몇 십만 원부터 많게는 몇백만 원까지 빌려갔다. 후배 아내도 남편이 외벌이 직장인인지라 돈나올 구석은 뻔했고,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는다는 생각이 들어 여러 차례 거절하려 했다. 이럴 때마다 번번이 남편 개인회생이 끝나야 빌려간 돈을 갚을 수 있다는 말로 구슬리고, 때론 협박해서 돈을 끊임없이 뜯어갔다. 자신의 남편이 대기업 연구원으로 재직한다고 거짓말했고, 연봉 액수까지 들먹이며 개인회생 끝나면 바로 갚아주겠다는 희망고문까지 하면서 수년을 이어갔다.
후배 아내가 출산을 할 때도, 아파서 수술을 할 때도, 경조사로 정신이 없을 때조차 끊임없이 이런 악행은 이어졌다. 말 그대로 후배 아내는 그 친구에게 '가스라이팅'을 당하고 있었다. 마르지 않는 샘물이 아니었으므로 갖고 있던 돈도 다 빌려주고, 친정 식구들에게까지 돈을 빌렸고, 대출까지 서슴지 않았다. 심리적 지배의 굴레에서 벗어날 생각도 여러 차례 해봤지만 번번이 이 친구의 거미줄에 걸려 버둥거리다 마음을 접기 일쑤였다.
드디어 폭로에 이르렀다.
수년을 시달리던 어느 날 후배 아내는 자신이 갚아야 할 돈이 상상할 수 없는 액수가 되고, 해결 불가능한 지경이 이르러서야 후배에게 말했다. 돈이 불고 불어 혼자 고민한다고 해결할 수 있는 액수가 아니었다. 후배의 급여는 고사하고, 가계 대출로 받을 수 있는 최대치까지 가고서야 그 폭주를 멈출 수가 있었다.
후배는 이야기를 듣고 처음엔 상실감에, 이후엔 아내에 대한 배신감까지 들었다. 십 년 넘게 믿고 살아온 아내가 다른 사람처럼 보였고,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감당이 되지 않아 망연자실 그 자체였다. 하지만 긴 시간 갖은 협박과 초조함에 시달렸을 아내를 생각하면 마음이 아팠다. 게다가 죄를 짓고도 죄책 감 없이 버젓이 잘 살고 있다는 친구 소식을 듣고 나서는 치밀어 오르는 감정 때문에 진정이 되지 않았다. 후배의 결심이 섰던 가장 큰 이유는 '내가 돈을 빌렸지 죄를 지었냐'라고 말하는 친구의 뻔뻔함 때문이었다. 죄를 진 사람이 있는데 당한 아내와 자신이 오히려 죄진 사람처럼 지낼 이유가 없다는 생각에서였다.
십 년이 넘는 결혼생활이 한순간에 무너질 위기까지 왔지만 주변의 조언, 위로가 두 사람을 다시 일어서게 했다. 무엇보다 후배 부부에겐 두 아이가 있어서 더 이상의 좌절과 포기는 아이들에게도 상처로 대물림될 수 있다는 생각까지 미쳤다. 당장 할 수 있는 일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고, 후배는 아내 친구를 '사기죄'로 경찰에 사건 접수했다.
이후에도 증거 수집, 심리치료 상담, 여러 차례 조사까지 하며 후배 부부는 육체적, 정신적으로 많이 지쳐갔다. 하지만 사건 접수 후 담당 형사의 빠른 수사로 생각보다 빨리 검찰로 사건이 넘어갔다. 다만 죄를 지은 친구가 초범이라는 점, 친구에겐 자식이 있다는 점 등이 선처로 이어져 정당한 처벌이 어려워질까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끝은 아니지만 마음만은 시원해졌다.
'선배님! 혹시 오늘 급한 일이 생겨서 그러는데 먼저 들어가 볼게요. 필요하면 내일 휴가를 내야 할 수도 있겠습니다. 자세한 건 다시 말씀드릴게요'
퇴근 무렵 갑작스럽게 후배는 퇴근을 서둘렀다. 그렇게 퇴근하고 다음날도 연차를 써야겠다고 늦은 저녁에 전화가 오고서야 그 사건 때문이지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궁금하긴 했지만 후배 본인이 얘기하지 않으니 물어보기가 그랬다.
그렇게 연차 휴가를 쓴 날도 다른 연락은 없었다. 그러던 퇴근길에 갑자기 주머니에 넣어둔 스마트폰 진동이 울렸고, 생각지 못했던 후배의 전화였다. 마침 내일 출근하면 후배에게 진행 상황을 물어봐야겠다는 생각을 할 때였다. 지하철 환승을 앞둔 난 갈아타려던 지하철을 보내고 전화를 받았다.
'선배님, 통화 괜찮으세요'
'응. 퇴근 중인데 지금 지하철 갈아타니까 말해도 돼'
'저 어제 법원에서 구속영장 발부 실질심사 있다는 연락을 받았어요'
'구속?'
후배의 얘기는 이랬다. 재판 전 검찰에서 구속영장을 신청했고, 법원에서 구속영장 실질심사를 해야 한다는 연락을 받았다고 했다. 사건의 원고인 후배 아내에게도 연락이 갔지만 피고인 아내 친구에게도 연락이 갔다. 후배 말로는 '구속'이라는 단어를 듣고 아내 친구는 놀랐을 것이라 짐작했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친구는 구속이라도 피하고자 후배 아내에게 연락하고, 연락을 피하자 집까지 찾아왔다. 연락하고, 문자 보내고 말 그대로 발등에 불 떨어진 사람이 따로 없었다.
집에 찾아온 아내 친구는 문을 열어주지 않으니 문 밖에서 미동조차 하지 않았고, 후배의 신고로 경찰에 연행되어 분리조치까지 됐다. 다음날 법원 출석 후 준비된 증거들, 검찰의 사건 보고서와 피고인들의 행동이 모두 맞물려 법정 구속영장이 떨어졌다. 죄질이나, 원고 측의 피해사실만으로도 충분히 죄가 무거운데 사건접수 이후에도 보여준 아내 친구의 행동이 더욱 죗값을 무겁게 한 듯싶었다. 당연히 법원에 출석한 아내 친구는 그 자리에서 구속되었고, 마치 영화 속 한 장면처럼 구치소로 이감되었다.
아직 재판이 시작되지 않았지만 그래도 후배 부부에겐 몇 달 만에 두 발 뻗고 잘 수 있는 밤이 되지 않았나 싶다. 조금은 들뜬듯한 후배의 목소리에서 그 기분을 충분히 느낄 수가 있었다. 연신 신경 써줘서 고맙다는 후배의 인사가 이어졌다. 난 당연히 죄진 사람은 벌을 받아야 하고, 함께 일하는 동료가 마음이 편해야지 나도 마음 편하다고 말하며 조금은 후배 마음을 가볍게 해 주려고 애썼다.
인생을 살다 보면 평탄하게 가는 삶도 있겠지만 대부분 굴곡이 있기 마련이다. 모든 길이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이 있듯이 우리 인생도 오르고, 내리는 길의 연속이다. 원하는 대로 되는 삶이 흔치 않듯이 이 길이 오르막이 될지, 비탈길이 될지, 험난한 산길이 될지 시작 전에는 알 수가 없다. 시작해서 가다 보니 그 길이 쉽기도, 어렵기도 한 것이다. 미리 닦아놓은 고속도로처럼 인생이 미리 닦아놓은 탄탄대로 같은 길이라면 행복하기는 할까. 정말 즐겁기는 할까. 알 수 없으니 인생이고, 가다 보니 행복하기도, 즐겁기도 한 것이다. 후배는 긴 시간 오르막을 오르고, 험난한 산길을 헤맸다. 하지만 며칠 전 그 험난한 산길을 빠져나왔고, 곧 평탄한 길을 내딛을 것이다. 몇 개월을 고생한 후배 얼굴이 내일은 좋아 보이겠다는생각에 한결 마음이 더 편해지는 오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