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를 처음 본 건 지원하던 영업 3팀 자체가 없어지고 새로운 부서가 신설되고 난 뒤였다. 경쟁업체 영업임원이 입사하고, 새롭게 부서를 정비했다. 그 후속 조치로 그 임원이 자신과 손발을 맞췄던 직원을 둘 영입했다. 그는 그렇게 입사한사람 중 한 명이었다.
그는 넉넉한 몸과 조금 어울리지 않는 절도(?) 있는 영업 사원 특유의 말투로 당시 기술팀장인 내게 처음 인사했다. 어두운 세계에 발 들였다 싶을 정도의 큰 덩치와는 어울리지 않게 서글서글한 미소가 첫인상이 나쁘진 않았다. 하지만 첫인사와 함께 내민 당돌한 손은 대리라는 직급에 어울리지 않게 조금은 지나친 자신감과 가식적인 모습처럼 느껴졌다. 잠깐 든 우려 섞인 마음과는 반대로 영업이라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머릿속 걱정을 금세 지워버렸다.
얼마 뒤 새로 영입된 영업팀 직원들 환영을 겸해 기술팀과 회식자리가 마련됐다. 일을 하려면 사람과의 관계가 우선이라는 부서장들 생각 때문인지 빠지는 사람 없이 전원 참석했다. 서로 첫 회식이라 처음은 어색했지만 술이 자리를 부드럽게 해서인지 조금씩 여기저기 잔 부딪치는 소리, '하하'하고 웃음소리까지 나오기 시작했다. 마침 마주 앉아있던 그와 조금 더 가까워질 겸 내가 먼저 술을 권했다.
'이 대리, 내 잔 한 잔 받아요'
'네, 팀장님. 이젠 말씀 편하게 하십시오. 제가 한참 나이도 어리고, 편하게 해 주셔야 저도 편하게 지원요청을 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하, 아 그래요. 알겠어요. 아니 알았어 이대리'
회사에서는 좀처럼 말을 놓지 않는 나지만 그의 말에도 일리가 있다 싶어 그렇게 하자고 답했다. 이야기를 하며 그가 7년 경력직임에 놀랐지만 그가 아직 이십대라는 말에 더 놀랄 수밖에 없었다. 말하는 기본 태도나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너스레는 지금보다 십 년은 더 내공을 쌓아야 가능하지 싶은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것도 타고난 재능일 수 있겠다는 생각에 그냥 그의 능력으로 마음속에서 정리했다.
그런 그의 능력(?)이 빛을 발하기 시작한 건 불과 한 달이 지나지 않은 시점부터였다. 난 퇴사한 영업을 대신해 근근이 영업지원까지 맡아서 하던 고객사가 일부 있었다. 하지만 말이 좋아 영업지원이지 담당업무 자체가 기술이었던 나로서는 정작 영업적 이슈가 있으면 고객사 양해를 구하기 일쑤였다. 하지만 얼마 전부터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그를 포함 새롭게 영업인력이 편성됐고, 당연히 전임 영업팀 업무도 포함한 인력 충원이었다.
며칠 전부터 난 그의 일정을 확인했고, 퇴사한 전임자를 대신해 고객과 첫인사를 겸하는 자릴 마련했다. 약속이 있던 전날까지 그에게 확인했고, 당일은 외부일정이 있어서 약속시간 10분 전에 고객사 앞에서 만나기로 최종 확답을 받았다.
약속장소에 먼저 도착한 난 더운 날씨에 편의점 커피 한잔으로 목을 축이며 그를 기다렸다. 하지만 그는 약속시간이 다되어감에도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조금 초조한 마음에 약속시간을 몇 분 남기지 않고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은 가지만 그는 내 전화를 받지 않았다. 몇 번을 반복해 전화를 했지만 여전히 그의 전화는 응답하지 않았고 답답한 마음에 그에게 카톡을 남겼다.
'이 대리, 오늘 A 고객사 미팅 있는 거 잊어버린 건 아니지? 어디쯤 오고 있어. 시간이 다돼서 먼저 들어가 있을 테니 도착하면 연락 줘'
더 이상 지체하면 안 되겠다 싶은 생각에 먼저 고객사 담당자를 만났다. 고객에게 우선 담당영업이 늦어지고 있는 것에 대해 없는 핑계까지 만들며 변론하느라 진땀을 빼고 나서야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얼마 전 지원했던 기술문의에 대한 대응 내용과 서로의 취미까지 꺼내가며 약속시간을 붙들었다. 그렇게 30분이 지나간 시점에 내 스마트폰이 울렸고, 화면 안에는 저장된 그의 이름이 보였다.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도착해 줘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전화를 받았다.
'이 대리, 도착했어? 지금 내려갈 테니 1층에 있어'
'아, 아뇨, 팀장님. 제가 오늘 미팅을 깜빡 잊어버리고 다른 곳 미팅을 하고 있었어요. 지금 바로가도 계신 곳까지 가는데 한 시간 이상 더 걸려요. 죄송합니다'
정말 어이가 없었다. 며칠 전부터 확인했고, 바로 약속 전날에도 확인한 내용인데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싶었다. 가슴속에선 불덩이처럼 뜨거운 것이 밀려 올라왔고, 성질 같아서는 큰 소리라도 치고 싶었다. 하지만 당장은 고객 앞이고, 일이야 터졌으니 당장의 수습이 우선이라 전화부터 끊었다. 당장은 고객에게 사과하느라 생기지도 않은 사건, 사고를 만들어 내며 식지도 않은 진땀을 다시 흘려야 했다.
그와의 신뢰는 이 한 번을 시작으로 번번이 그리고 꾸준하게 깨져갔다. 한 번은 본인이 잡은 지방업체 방문 약속을 당일 30분도 남기지 않고 현장에서 전화 한 통으로 깨버린 적도 있었다. 당연히 난 아침 약속이라 서울에서 지방까지 이미 이동 후였고, 업체 방문을 30분 앞두고 받은 통보라 화가 머리끝까지 났다. 약속을 깬 것도 화가 났지만 당시 내게 자신을 대신해 고객을 만나 미팅을 진행해 달라고까지 부탁했다. 이건 누가 상급자인지조차 알 수 없는 행동이었다. 직급을 떠나 사람 간 이해관계에서조차 생기면 안 되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일이 한 번, 두 번 반복되니 그에 대한 신뢰 자체가 없어졌다. 그런 일이 있을 때마다 그는 나와 관련 팀원들에게 형식적인 사과를 했고, 다시 같은 실수를 반복했다. 그런 일이 반복되니 그의 행동이 실수가 아닌 고의가 아닐까 하는 합리적 의심까지 들었다.
그의 업무 태도를 바꾸고, 기본적인 예의를 지켜달라고 몇 번이고 영업본부장에게 요청했지만 돌아온 건 본부장의 사과뿐 바뀌는 건 없었다. 그렇게 나와 팀원들에게는 그는 '상종 못할 인간', '일로도 만나기 싫은 그냥 직장인' 정도의 기피 인물이 되어갔다.
함께 지원해야 하는 업무에 있어서는 그와 동행하지 않으면 업무지원을 하지 않겠다는 팀 내 방침을 세울 정도였다. 매번 업무를 미루고, 핑계를 대는 통에 그의 업무는 우선순위에서도 미뤄졌고, 그가 하는 말은 콩으로 메주를 쑨다는 말도 믿지 않을 지경에 이르렀다.
안에서 새는 바가지 밖에서도 샌다고 했던가. 결국 그는 외부 협력업체 업무 지원 중에 협력업체의 책임자와 문제가 생겼다. 큰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그의 생각과는 달리 고객까지 나서서 그에게 불만을 제시하자 상황은 심각해져 버렸다.
'이 대리, 앞으로 우리 회사에 올 필요 없습니다. 본부장에게 담당을 바꿔달라고 할 테니 앞으로 전화하지 마세요'
단순히 협력사 직원 한 개인과의 문제로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던 그의 관리자도 고객까지 나서서 이렇게 얘기하니 자기 식구 단속에서 끝나지 않았다. 사업을 진행하던 고객사라 회사에 정식 보고가 됐고, 이 일을 시작으로 여기저기서 그의 좋지 않았던 업무 태도에 더욱 말들이 많아졌다. 여러 곳에서 얘기들이 나오자 그도 더 이상 뻔뻔하게 대처할 수 없었고, 그렇게 회사를 떠났다.
그의 지키지 않은 여러 약속들은 '양치기 소년'의 심심풀이와는 사뭇 달랐다. 양치기 소년의 거짓말은 무료함과 따분함에서 기인했고, 마을 사람들의 당황한 반응이 그를 더욱 부추겼다. 하지만 그는 재미, 흥미와는 상관없이 모든 일이 자기중심적, 무배려, 무개념에서 비롯된다. 자신을 제외한 다른 어떤 사람, 약속들의 기준은 모두 자신이 정하는 범주에서 중요도가 정해진다. 자신이 직접 잡은 약속조차도 다른 어떤 일이 우선되거나 중요도가 높다고 생각하면 가차 없이 무시하는 게 그의 기본적인 태도다.
그에게 이런 일들로 벌어지는 사과는 아무 문제도 안 되는 듯싶었다. 마음과 상관없이 입으로만 나오는 사과는 그에게 너무도 쉬웠고, 농담이나 거짓말들과 차이가 없어 보였다. 전혀 감정 없는 말들이었고, 진심이라고는 느껴지지 않았다. 아예 대놓고 거짓말을 하는 것을 목격한 것도 여러 차례였다.
사람이 사람을 좋아하는 데는 이유가 있을 수도, 없을 수도 있다. 반대로 사람이 사람을 싫어하는 데는 어떤 식으로든 이유가 있기 마련이다. 못살게 굴어서 이거나, 너무 잘나서이거나, 예의가 없어서 미워할 수도 있다. 모든 일에인과관계가 있듯이 미운털이 박히는 데도 원인이 있어서 결과가 생긴다.
일부러 미워하는 감정을 내세워 계속 미워하는 사람을 생각하는 일은 자신또한 괴롭히는 잘못을 범한다. 스스로를 괴롭히는 마음까지는 아니더라도 그는 다시는 함께 일하고 싶지 않은 동료였다. 배려까지도 바라지 않았고, 기본만 지켜줬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솔직히 흉내만이라도 원했다. 직급, 나이, 능력 모든 걸 떠나서라도 그는 무례함, 무책임, 무개념 그 자체였다.
사람이 사람을 어떻게 들여다보느냐는 사소한 태도에서도 알 수 있다. 자신감에서 오는 긍정적 마음이 아닌 몸에 베인 자만감과 무례함에서 오는 단순한 행동, 태도만으로도 느껴진다. 자신을 귀하게 여기는 것만큼 상대방을, 상대방의 일을, 상대방의 시간을 귀하게 생각해야 한다. 사소한 행동, 짧은 말투만으로도 배려, 존중이라는 품격은 사람 사이에서 느껴질 수 있다.
사람이 사람을 대하는 대는 예의가 필요하다. 나이가 적건, 많건. 지위가 높건, 낮건. 돈이 많건, 적건간에 사람이 사람을 대하는 가장 기본적인 마음 가짐이 태도다. 존재의 이유를 따지기 전에 자신이 존재하는 가치를 높일 수 있는 방법이 바로 이런 기본 태도다. 세상에 태어났으면 태어난 이유가 있고, 존재하는 건 그 이유에 대한 증명이다. 삶이란 살아가기 때문에 의미가 있다. 다만 그 삶을 정말 의미 있게 만드는 건 기본이 되는 삶의 태도에서 나온다. 바로 가장 기본적인 사람이 사람을 대하는 태도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