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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추억바라기 Oct 16. 2024

아내에게 눈치껏 잘해야 하는 이유

난 집에서 눈치 보며 사는 행복한 남자입니다

'아 달달한 거 먹고 싶다'

'시원한 맥주 잔 생각나네'


아내가 가끔 혼잣말처럼 하는 소리를 들을 때가 있다. 평소에는 청력이 시원찮다고 생각하다가도 아내가 하는 이런 말들은 기막히게도 잘 듣는다. 이럴 때면 내 반응은 한결같다. 옷을 주섬주섬 걸쳐 입고 아내에게 말한다.


'영희 씨, 팥빙수로 할까요? 아님 스낵 종류의 과자로 할까요?'

'맥주는 생맥주 풍의 라거 종류가 낫겠죠? 안주는 카나페 하게 크래커 하나 사 올게요'


이런 날 보며 아내는 혼잣말도 못하냐고 핀잔이지만 표정만은 자신의 가려운 곳을 알아서 긁어주는 '스윗~'한 남편이 마냥 좋은 얼굴이다.


이런 일은 저녁 간식이나 야식 심부름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난 아내가 하는 말만 들으면 망설임 없이 항상 즉각 반응한다. 누가 보면 생각이란 처리 과정 없이 몸이 반사신경처럼 반응한다고 할 법한 속도다.


아내가 필요한 물건이나 부탁할 일이 있을 때도 마찬가지 반응이다. 말 꺼내기가 무섭게 내가 반응하니 아내는 일부러 딸을 부른다. 날 시키는 게 아닌데도 불구하고 아내가 말만 하면 내가 모든 잔심부름을 거드니 아내 딴에는 나에 대한 배려차원이다.


'지수야, 엄마 컵 좀 가져다 줄래? 철수 씨는 그냥 있어요'

'지수야, 서랍에 가위 좀. 아빠 안 움직이게 네가 좀 가져다줘'


하지만 딸은 듣고도 모른 체하거나, 아내가 알아서 하라는 주의다. 아내가 의도하는 바와는 다른 결과다. 이런 반응이 나올 때면 난 망설임 없이 아내가 요청한 것들을 실행에 옮긴다. 딸아이는 이런 날 볼 때마다 아내에게 오히려 핀잔이다.


'엄마가 할 수 있는 일은 엄마가 해. 아빠 매일 시키지 말고'


우리 부부는 평소에도 늘 대화가 많다. 특별한 일이 있지 않아도 대화는 늘 일상이다. 서로의 이야기를 하다 보면 난 습관처럼 아내의 말들을 머릿속에 메모하듯이 기억하려고 애쓴다. 특히 아내가 무언가 필요한데 사지 못했던 것들은 머릿속에 더 꾹꾹 눌러 적는 편이다.


'내일 운동 갈 거죠? 그럼 지수도 친구들하고 저녁 먹고 바로 스카 간다고 했으니 저녁은 간단하게 해결하면 되겠네'


아내가 전날 밤 침대에 누워했던 말이 퇴근길에 생각났다. 최근 여러 약속들 때문에 미뤘던 운동을 다시 시작하려던 때였지만 아내 혼자 저녁을 먹는다는 말이 생각나 톡을 보냈다.  


'영희 씨, 식사했어요?'

'아니요, 조금 있다가 간단하게 뭐래도 챙겨 먹어야죠'

'그럼, 나오실래요? 내가 영희 씨 좋아하는 목덜미 살 사드릴게요. 한 시간이면 도착하니까 준비해서 나와요'

'네~, 좋아요'


부부 사이에는 오가는 대화만큼이나 상대에 대한 관심도 필요하다. 이는 연애를 시작할 때 생겼던 소위 '썸'이라고 말하는 이성에 대한 관심과는 다르다. 대화 시에 상대에 대한 주의, 관심, 집중, 눈치 등이 섞여서 편하게 하는 대화 속에서도 꼭 들어야 할 얘기, 공감이 필요한 시점 등을 인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오래된 부부들 중 대화가 쌍방 통행이 아닌 일방으로 가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이는 소통의 의미가 아닌 설명, 설득, 강요, 주장의 표현이 더 어울릴 상황이 둘 사이에 연출된다. 한쪽의 긴 연설 속에 듣는 상대가 짧은 반박이나 반대의사를 표현할 때면 이는 곧 주도권이 있는 긴 연설자의 묵살, 침묵을 초래한다. 가끔은 이런 긴 연설을 듣는 상대가 신경질적 어투로 분노를 표출하기도 한다.


'그러니까 여기서 저 버스 타면'

'당신이 하려는 말은 알겠는데 지금 탄 버스는 당신이 얘기한 OO대 병원 가는데, 저 버스 타면 그리로 안 가고 OO시장 쪽으로 가는 거라 전혀 다른 노선이라고요'

'아니 그게 아니고'

'내가 저 노선을 얼마나 많이 타고 다녔는데 내 말이 맞다니까'

'아니 당신은 내가 무슨 말을 할 줄 알고 말만 꺼내면 내 얘긴 다 자르고 그래? 아휴 이러니 말을 말아야지'


어제 아내와 외출했다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일흔은 되어 보이는 노부부가 앞에 서서 대화를 하고 있었다. 버스를 타고 가는 내내 대화의 주도권은 할머니에게 있었고, 중간중간 대화에 껴든 할아버지의 말은 중간에서 모두 잘려나가기 일쑤였다. 이렇게 여러 번 대화가 오가고 결국 할아버지는 할머니에게 화를 냈고, 잠깐은 두 분간에 침묵이 이어졌다. 하지만 이런 침묵도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난 버스 노선을 얘기하는지 알았지요. 교통카드 줘요. 영감 다리가 불편하니 내가 카드 찍을게요'


금세 내민 화해의 손길에 조금 뿔이 났던 할아버지도 할머니를 마주 보며 잠깐 실소하고 마신다. 그렇게 두 분은 두 정거장을 더 가서 하차했다. 불편한 할아버지 다리가 걱정이셨는지 버스를 내리는 내내 할머니의 한 손은 할아버지를 붙들고 있었다.


세상을 살다 보면 정답이 없는 일들은 많다. 이럴 때마다 찾아지지도 않는 정답 찾기에 시간 낭비하지 말고 자신에게 맞는, 상황에 맞는 해답을 찾는 게 현명하다.


살면서 듣는 얘기 중에 눈치껏 잘하라는 말이 있다. 눈치라는 단어 자체가 부정적으로 쓰일 수도 있지만 난 나름의 지혜라는 생각이 든다. 눈치의 정의를 보면 다른 사람의 기분이나 또는 어떤 주어진 상황을 때에 맞게 빨리 알아차리는 능력을 일컫는다고 한다.


직장생활, 사람과의 관계, 하물며 가까운 친구 사이에도 눈치가 필요하다. 하지만 난 눈치가 가장 필요한 관계는 부부 사이리고 생각한다. 가장 긴 시간을 함께 해야 할 사이여서 그만큼 부딪침이 있을 일도 많고, 함께 웃고 기뻐할 일도 많다.


미리 정해진 모범 답안을 갖고 부부생활을 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상대의 성격, 나의 성향 등을 고려하여 그때그때 적절한 답을 갖고 행동하는 것이 가장 현명한 방법이다. 이럴 때 무엇보다 필요한 건 눈치다. 그래서 상대의 눈치를 살피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다.


'잡아놓은 물고기에게 먹이를 왜 줘요'


많은 유부남이 하는 말 중에 가장 공감되지 않는 말이다. 잡아놓은 물고기에게 먹이를 주지 않으면 언젠간 죽고 말 것이다. 내가 가장 사랑해서 함께한 사람이자, 앞으로도 가장 가까운 곳에서 곁을 지켜줄 상대인데 안 아끼고, 사랑하지 않을 이유가 있을까.


난 지금도 아내의 눈치를 살핀다. 아내와의 대화에서 아내가 하는 말을 귀담아듣고, 내 생각을 전하고, 아내의 감정도 살핀다. 회식으로 귀가가 늦어지면 아내의 기분을 살피고, 나이가 들면서 더욱더 아내의 건강을 살핀다. 이렇게 눈치 보며 어떻게 사냐고 수도 있지만 나뿐만 아니라 아내도 적절하게 눈치를 살핀다. 또한 상대에 대한 배려고 사랑이라는 생각이다.


가끔 과하게 표현해서 내 눈치는 생존 전략이라고 생각할 때가 있다. 직장생활에서도 눈치가 톡톡히 제 역할을 하고 있지만 무엇보다 내겐 부부관계에서 이 능력은 무엇보다 소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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