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대체 내가 뭘 잘못해서 이렇게 화가 났는지 모르겠어. 그 상황에서 그럼 나만 혼자 빠지는 게 말이 되냐고'
'오빠, 오빠가 나한테 뭐라고 했어. 갑자기 잡힌 약속이라 미안한데 10시 전에 끝내고 온다고 했잖아. 나한테 시간 못 박은 건 오빠야. 게다가 늦으면 늦는다고 전화 한 번 못하냐'
'더 늦는다고 말하기 미안해서 그랬어. 그만하자, 그만해'
결혼 초 나도 아내와 가끔 말다툼을 했다. 서른이 되기 전, 성인이란 타이틀을 달긴 했지만 아직까진 모든 게 미성숙한 우리였다. 연애 기간은 길었지만 결혼이라는 제도 아래 함께 한 집에서 살기 시작한 건 처음이라 모든 게 서툴 수밖에 없었다.
육아, 가사분담, 서로에 대한 애정까지. 돈 빼고는 모든 게 부족함이 없다고 생각했지만 어른이지만 성숙하지는 않았던 시기였다. 지금 생각하면 결혼 초라면 당연히 겪는 과정일 뿐이었다. 하지만 그 시기엔 같은 일을 겪으면서도 힘들다고만 투덜 됐지 그 일이 당연히 겪는 과정일 뿐이라 생각지 못했다.
자라온 환경이 다른 서로 다른 남녀가 만나서 부대끼며 한 집에 살다 보면 의례 불편한 상황이 생긴다. 오죽하면 가까운 친구끼리라도 함께 살지는 말라고 했을까. 매일 함께 먹고, 자고, 살다 보면 못 보던 장점도 보이지만, 마찬가지로 몰랐던 단점도 알게 된다.
혼자가 익숙했던 생활에서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남과의 동거는 쉽지만은 않다. 지금 오십 대인 내세대만 해도 형제, 자매가둘 혹은 셋이 일반적이었지만 지금 막 결혼하는 삼십 대는 외동으로 자란 사람이 많다. 죽고 못 사는 사랑이라는 최고의 아이템을 갖고도 낯선 환경, 긴 시간 앞에서는 무용지물이 되기 일쑤다. 모든 부부가 이런 시간을 겪는다. 하지만 반대로 많은 부부가 이 시간을 이겨내고 한 단계 성숙한다.
내 결혼 초 아내와 갈등의 대부분은 믿음과 신뢰의 문제였던 것 같다. 직장에서 빈번하게 잡히는 갑작스러운 약속으로 본의 아니게 믿음과 신뢰를 깨는 일이 종종 생겼다. 직장생활 이, 삼 년 차에는 당연히 부르면 가야 하고, 안 불러도 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게 직장생활을 잘한다고 믿었던 것 같다.
늦은 시간까지 귀가하지 않으며 오히려 늦은 시간까지 힘들게 직장 생활하는 나를 이해해 줄거라 생각했다. 그래봤자 고작 술 자리였으면서. 그 시절엔 난 나대로, 아내는 아내대로 자신을 이해 못 하는 상대에게 서운한 감정이 컸을 것이다. 하지만 상대에 대한 이해와 배려도 신뢰를 기본으로 한다. 아마 지금 같으면 그렇게 잡히는 약속은 거절이 기본이고, 꼭 필요한 약속이면 사전에 양해를 구했을 것이다.
'우리 와이프는 나랑 한참 언성 높여서 말다툼하다가 갑자기 전화 걸려오면 목소리나 분위기가 180도 바뀐 데니까. 어찌나 상냥하고, 친절하게 전화 응대를 하는지. 나랑 방금까지 싸운 사람 맞는가 싶다니까. 어떨 땐 좀 어이없기까지 해'
얼마 전 친구 모임에서 한 친구가 자신의 아내와 말다툼한 일상을 얘기했다. 친구의 말에 심각한 분위기 속에서도 잠깐 웃음이 날뻔했다. 과거 나도 친구와는 결은 달랐지만 특별히 내가 잘못한 것도 아닌데 간혹 아내가 잔소리를 하거나 조금 예민하다 싶은 반응을 보이는 경우가 있었다. 그 일로 아내에게 불만을 얘기해 봤지만 돌아온 아내의 대답에 난 앞으로도 계속 그러라고 할 수밖에 없었다.
'답답하고, 속상한 일이 있을 때 아무 일도 아닌 일로 화나고, 어딘가 쌓인 불만을 풀어야 할 때 있잖아요. 이럴 때 내가 누구랑 얘기하며 풀겠어요. 내가 제일 믿고, 의지하고, 내가 뭘 해도 받아줄 수 있는 내 사람한테 풀어야 하지 않겠어요? 그게 철수 씨잖아요. 그럼 내가 어디 다른 데다 풀었으면 좋겠어요?'
부부 연식이 꽤 되어 모르는 것 빼고 속속들이 알고, 이해해서인지 어느 날엔가부터 우린 다투지 않는다. 가끔 의견 대립이 있는 일이 생기지만 성숙한 어른이고, 이젠 아내가 하는 어떤 행동도, 모습도 이해할 수 있다. 긴 시간, 같은 환경에 살다 보니 아내의 생각도, 아내의 대화도 익숙해졌다. 익숙함이란 게 어떤 사람에겐 지겹다고, 식상하다고 느껴질 수 있어도 내겐 함께 하지 않으면 허전하고, 함께해서 편안함을 느낀다. 내겐 아내가 그런 존재다. 그런 아내를 내가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안녕하세요, 오늘도 성당 다녀오세요?'
일요일 아침, 오늘도 어김없이 외출하는 길에 같은 동 위층 노부부를 만났다.
'아, 안녕하세요. 주말 아침마다 부지런하시네. 참, 아들이 군대 갔다면서요. '
오늘도 같은 인사말이지만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는 분들이라 늘 반갑다.
'하하, 매주 일요일마다 하는 일이라 그리 힘들지도 않은데요. 아들은 군대 간 지 이제 6개월 지났어요'
할머니도 매번 식상할 것 같은 내 인사라도 싫지 않은 표정이다. 이내 날 향해 한번 활짝 웃으시고 두 걸음쯤 뒤따라 오는 할아버지를 보시고 말했다.
'여보! 이 아래층 아저씨 알죠? 꽃 가꾸시는 젊은 아줌마 남편. 아니 이렇게 젊은 사람들이 아들이 벌써 군에 갔다네요. 참 예쁘게도 사신다니까'
뒤쳐진 걸음만큼이나 귀도 잘 들리지 않으시는 것 같지만 할머니 말에 할아버지도 날 향해 빙긋이 웃는다. 무슨 말을 하든 다 이해하고, 알아들으시는 듯한 표정이다.
일요일마다 글을 쓰기 위해 카페 가는 길에 위층에 사는 노부부를 매번 만난다. 이렇게 마주치기 시작한 건 꽤나 오래된 일이다. 여든은 되어 보이는 두 분은 자주 함께 외출한다. 노부부는 함께 가지만 나란히 가진 않는다. 할아버지에 비해 상대적으로 할머니가 정정해서인지 걸음걸이 속도부터 다르다.
그래서 늘 앞장서서 씩씩하게 걷는 건 할머니의 몫이다. 할아버지는 그렇게 앞서가는 할머니를 놓칠세라 짧은 보폭으로 부지런히 따라 걷는다. 지켜보고 있으면 거리가 벌어질 법한 속도 차이다. 하지만 생각과는 달리 두 분 거리는 늘 일정하다. 조금 빨리 걷다가도 할아버지를 보고 할머니는 속도를 늦추고, 그런 할머니를 보고 할아버지는 늘 속도를 조금 더 내신다. 그렇게 걷는 게 오래여서인지 두 분은 어느새 앞뒤로 걷지만 마치 나란히 걷는 것 같은 착각이 인다.
아내와 난 요즘 나란히 걷다가도 가끔 앞, 뒤로 걷는다. 넓은 길에서는 나란히 걷고, 좁은 길에서는 앞뒤로 걷는다. 앞뒤로 걸으면서도 나란히 걷는 착각이 일정도로 좁은 거리를 유지하며 걷는다. 마치 같은 동 위층에 사는 노부부처럼. 앞으로도 아내와 난 때론 나란히, 때론 앞뒤로 걸어갈 생각이다. 누군가 우리 부부를 보며 매번 나란히 걷는 착각이 들 수 있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