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오늘도 집 나간 아내를 기다린다. 자주는 아니지만 아내는 한 달에 두어 번이렇게 외출했다 조금 늦은 시간에 돌아온다. 오늘 같이 오랜 지인들과의 약속이 있을 때면 조금은 더 늦은 시간 지하철로 귀가하곤 한다.
뭐 이렇게 얘기해도 집 인근 지하철역에 12시 전에는 도착하니 많이 늦은 시간은 아니다. 약속 장소가 대부분 서울이다 보니 지금 사는 집 인근 지하철역까지는 꽤나 긴 시간이 걸린다. 10시가 조금 넘은 이른 시간에 출발해도 다른 지인들에 비해 당연히 늦게 도착할 수밖에 없다.
'뭐 하러 나왔어요? 사람들도 제법 다니는 시간인데...'
'에이, 그래도 걱정돼서 안 돼요. 그렇게 먼 거리도 아니고. 말은 그래도 이렇게 나오니까 좋죠? 같이 산책도 할 겸...'
서울 살 때만 해도 아내가 이렇게 늦을 일도 많이 없었지만 조금 늦어도 집에서 기다리곤 했다. 하지만 지금 사는 곳으로 이사 오고 나서는 아내 귀갓길엔 항상 내가 함께 한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늦은 밤이나, 이른 낮시간에도 그렇게 난 아내의 마중을 나간다. 아내가 귀가하지 않은 늦은 저녁에 내가 외출하면 아이들은 의례 아내를 데리러 나가는 것으로 알 정도다.
난 아내의 개인 시간을 존중한다. 아내가 좋아하는 정원 일을 할 때는 함께 일하는 분들과 갖는 여러 가지 행사나 시간을 존중했다. 아내가 좋아하는 친구들과의 여행도, 밥을 먹는 시간도, 차를 마시는 시간도 늘 같은 마음이다. 아내 개인 시간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존중했고, 일정이 겹치지 않게 사전에 통보하는 절차만이 강제화되지 않은 규칙이라면 규칙이다.
이것은 아내도 마찬가지다. 내게 생긴 약속이나 개인 일정에 대해서는 대부분 존중해주려고 한다. 특히 주말, 휴일에 있는 루틴은 특별한 일정이 없으면 더욱더 간섭하지 않는 편이다. 아니 오히려 부담을 주지 않으려고 관심을 두지 않는 편이다. 함께 할 일정이 없을 때면 혼자 영화를 보러 가는 것도 특별히 문제 삼지 않을 정도로 우린 각자의 사생활(?)을 존중하는 편이다.
십여 년 전만 해도 난 주말이나, 휴일은 모두 함께해야 한다고 생각했었다. 평일은 회사일로 함께 할 수 없으니 가급적 주말, 휴일에는 다른 약속 없이 함께 보내야 한다고 고집했었다. 개인 일정은 어쩔 수 없을 때만 서로 간의 허락하에 가능하다 생각했다.
하지만 함께해서 좋은 게 있는 반면에 내가 해야 할 것들, 하고 싶은 것들을 포기해야 할 일들이 종종 생겼다. 그건 아내도 마찬가지였다. 주말에 어쩔 수 없는 약속이라도 생기면 마치 상대에게 큰 잘못이라도 저지르는 것처럼 미안한 생각에 마음이 무거웠다. 아마도 어린 두 아이들이 있는 상황에서는 어쩔 수 없이 드는 생각이었을 테다.
하지만 아이들이 우리의 손을 많이 타지 않을 만큼 성장했을 때는 얘기가 달랐다. 우린 이런 상황들에 직면한 어느 날인가부터 조금은 조심스럽게 서로의 시간을 인정하기 시작했다. 조금씩 그리고 천천히 그렇게 각자의 시간을 자유롭게 보내려고 시도했고, 상대를 배려했다.
이런 사소한 생각들이 조금씩 쌓였고, 생각이 말이 되고, 말이 행동이 되었다. 우린 가끔씩 생기는 개인 일정을 어느 날인가부터 얘기하고, 행동하기 시작했다. 처음 말을 꺼내기 쉽지 않았지만 서로의 반응에 조금씩 익숙해졌고, 상대를 이해해 가면서 조금씩 각자의 시간을 편하게 인정하기 시작했다. 함께하는 시간이 중요한 만큼 각자의 시간이 소중하다는 것 또한 잘 이해하게 됐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자 아내의 개인 일정을 마음속에서부터 모두 이해했다. 하지만 정작 난 아내에게 내 개인일정을 편하게 얘기하기까지는 조금은 시간이 걸렸고, 말하는 것 또한 쉽지만은 않았다. 이런 내 마음은 생각지도 못한 아내의 제안으로 편해지기 시작했다.
'요즘 힘들죠? 혼자 여행 한번 다녀오는 게 어때요?'
아내의 제안으로 난 태어나 처음으로 혼자 여행이라는 걸 경험하게 됐다. 그 여행은 바로 매년 홀로 날 위해 떠나는 제주도 여행의 시작이 됐다.
매년 난 혼자 여행을 떠난다. 이렇게 혼자만의 여행을 먼저 제안한 건 아내였고, 막상 마음속에는 있었지만 실행하지 못했던 제주도 여행을 아내가 얘기해 주니 마음 편하게 시작할 수 있게 됐다. 그렇게 7년 전부터 난 제주도 여행을 다니기 시작했다.
길지는 않지만 짧은 이틀간의 여행이 한 해 동안 열심히 달린 내게 주는 상이 됐고, 지쳤던 내 심신에 쉼표를 찍어주는 시간이 됐다. 이렇게 떠난 제주 여행을 시작으로 난 사생활(?)에 대한 중요성과 이해를 더 높일 수 있었다.
난 아내와 함께하는 시간이 좋다. 그건 아내도 나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렇다고 우린 매 시간을 함께 하지 않는다. 서로가 함께할 때 한 눈 팔지 않고 상대만을 마주 보기 위해서는 각자의 시간 또한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생각이다.
부부가 아무리 일심동체라고 해도 한 사람이 아닌 이상 모든 순간이 같은 생각, 같은 호감, 호불호까지 같을 수가 없다. 서로가 관심 갖는 분야도 다를 것이고, 서로의 취향 또한 다를 수 있다. 서로가 함께해서 서로를 배려하고, 양보하는 것은 필요하지만 가끔은 자신만의 시간이 필요한 것 또한 인정해야 한다.
내 상대에게, 내 아내에게, 내 남편에게 이런 시간을 인정해 줘야 함께 할 때가 더 행복해질 수 있다. 각자가 채워야 할 시간을 채워야 함께 할 때 힘이 되고, 서로 의지가 필요할 때 기댈 수 있는 지지대가 된다. 나를 배려하고, 이해해달라고 하기 전에 스스로를 아끼고, 배려하는 시간을 보내야 이런 여유도 생긴다. 당신에게도, 당신 옆에 있는 소중한 짝꿍에게도 이런 자신만을 위한 시간이 무엇보다 필요한 이유다.
'어디 가게요?'
'여기서 지하철 한 정거장만 가서 집까지 걸어가면 돼요. 어차피 여기서 걸어가나 한 정거장 가서 걸어가나 집까지 가는 거리야 비슷하니까'
얼마 전 아내의 아르바이트 출근길에 동행했다. 오후 개인 일정으로 하루 연차 휴가를 내서 오전에는 여유가 있었다. 아내는 오전에 좀 쉬지 뭐 하러 나오냐고 했지만 예측됐던 내 뻔한 행동에 싫은 기색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함께 걷는 내내 요즘 우리 얘기, 학업에 한창인 딸 얘기, 군대 간 아들 얘기까지 매일 하는 얘기지만 우린 늘 할 말이 많았다.
그렇게 십여분을 걸어가 얘길 끝내고 아내는 지하철역사로 난 다시 왔던 길로 돌아가면 됐다. 하지만 난 잠깐이라도 더 아내와 함께 하기 위해 추가 동행을 자처했다. 지하철 한 정거장이면 되는 가성비가 낮은 행동이지만 아내가 기뻐하고, 내가 좋으면 그만이다. 우리의 동행은 오늘도 이렇게 계속되고 있다. 지금까지처럼 앞으로도 쭈욱 계속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