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 이번 추석부터는 아버지 안 오실 거야. 나만 고향집에 내려가기로 했어. 올해 추석부터 추석 명절 제사를 지내지 않기로 아버지 하고 이미 상의했거든"
"제사야 그렇지만 왜 혼자 가세요? 사모님은 같이 안 가세요?"
올 추석부터 우리 집 추석을 보내는 일상이 바뀌었다. 추석 제사대신 고향에 계신 부모님을 찾아뵙고, 부모님과 함께 시간을 보내기로 결정했다. 그것도 각자의 부모와 함께 시간을 갖기로. 아내는 장모님과 난 난생처음 아버지와 단 둘이서 명절을 보내기로 했다. 미리부터 생각했던 것은 아니지만 아내와 상의하고, 아버지의 결단과 배려 속에 그동안 이어오던 집안 전통이 그렇게 바뀌었다.
양가 어른들은 최근 모두 혼자가 되셨다. 처가는 장인어른이 작년에, 내 어머니는 5년 전에 하늘나라로 가셨다. 양가 어른이 모두 계실 때는 반 의무감에서 명절에 찾아뵙는 일이 많았다. 특히나 짧은 명절 연휴일 때는 더더욱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정작 양가 부모님이 혼자가 되시고 나서는 연락을 자주 드리는 건 기본이고, 시간 날 때마다 찾아뵈려고 애썼다. 하지만 마음처럼 잦은 방문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오히려 명절 때가 되면 제사 준비하느라 힘이 들어서인지 집에 오신 아버지가 가시기만을 기다리는 마음이 들 때도 있었다.
그런 마음이 들었던 지난 조부모 제사일에 드디어 아버지께 기제사와 명절제사에 대한 축소를 얘기해 보려고 말을 꺼냈다. 그런 부분에서는 조금 고지식한 아버지가 어떻게 말씀하실지 한편으로 걱정도 됐다. 하지만 항상 제사준비를 하느라 고생인 아내나 내게도 지금보다 서로에게 더 나은 시간이 될 거라는 확신이 있었다. 난 그런 확신을 갖고 아버지께 조심스레 말씀드렸다.
"아버지 지금 지내는 어머니, 조부모님 제사와 설날 차례까지는 지낼 테니 추석에는 제사를 지내지 않는 게 어떨까요? 조부모님 제사를 줄여볼까도 생각해 봤는데 아버지 생전에는 모시는 게 맞을 것 같아서..."
걱정하며 꺼낸 말이었지만 아버지는 어려운 결정임에도 흔쾌히 우리의 제안을 승낙했다. 그렇게 우리의 추석 명절 풍경에 변화가 생겼다. 그 결정을 하고 난 후 이번 추석이 첫 번째 시험무대였다. 아내는 장모님이 계신 강원도로 갔고, 난 아버지가 계신 경상도로 그렇게 우린 각각 귀향길에 올랐다.
명절 전날에도, 당일에도 장모님과 통화를 했지만 결혼 후 명절 전부를 딸과 보낸 건 처음이어서인지 통화 내내 웃으시며 '고맙네'로 일관하셨다. 기뻐하는 장모님 목소리를 들으며 이런 생각을 하지 못했던 지난날이 후회는 됐지만 앞으로 추석 때마다 행복해할 장모님 모습에 늦었지만 다행이란 마음이 들었다. 이런 상황은 내 아버지도 마찬가지였다. 첫날 아내가 아버지에게 쓴 편지를 받아 들 때도, 작은 집과 함께 식사할 때도, 친구분과 술 한잔 할 때도 그 기쁨을 감추지 않으셨다. 처음 아버지와 둘만 보내는 명절이 조금 어색할 줄 알았지만 오히려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멈추지 않았다.
'아들, 아버지는 아들하고 보내는 이번 추석이 너무 좋구나. 이렇게 와줘서 고마워'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작년까지 추석에 어머니를 모신 곳을 한 번도 찾지 못했다. 집에서 명절 차례 준비를 하느라 어머니를 모신 고향까지 갈 수 없었다.하지만 이번 명절에는 어머니가 계신 봉안당을 찾았다. 아내도 결혼 후 한 번도 처가 성묘를 하지 못했는데 이번에는 성묘도, 아버지 묘소에도 다녀왔다고 했다. 두 분 어른은 고사하고, 우리 두 사람에게도 의미 있는 추석이었다.
아내는 이런 어려운 결정을 해준 아버지에게 감사한 마음을 편지로, 그리고 전화로 전했다. 나 또한 평생 모를뻔했던 아버지와 둘만의 시간을 보낼 수 있게 해 준 아내의 제안에 너무 감사했다. 명절에 아내와 잠시 떨어져 있는 게 처음이라 그 어색함을 빼면 이번 명절은 모두가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가족 모두가 모이는 명절이지만 우리 가족의 이번 명절은 모두 흩어진 한가위가 됐다. 모두 흩어져 지내서 행복한 건 아니지만 이번 명절에는 의미를 준 짧은 이별이었다. 특별한 이유가 없으면 당분간 추석 명절은 아내와 따로 움직일 계획이다. 우리의 추석은 앞으로도 헤어져도 좋은 날이지 싶다.
십여 년 전만 해도 우리 집 명절 제사는 그 어느 때보다 분주했다. 부모님 두 분이 사시는 집은 작은 평수의 아파트였지만 거실이라고 할 만한 공간 없이 주방과 작은 방 두 개가 전부였다. 명절 이틀 전부터 고향집으로 내려가 어머니와 아내는 할머니부터 사대의 매 끼니를 챙기느라 주방에서 나올 시간이 없었다. 가끔 주방에 들어가 거들라치면 어머니의 불편해하는 얼굴과 아내의 눈치에 금세 방으로 쫓겨 나오기 일쑤였다. 어머니 생전에 제사음식 준비를 해본 적이 없을 만큼 남자와 여자가 할 일을 나눠하던 가부장적 명절 모습 그 자체였다.
그렇게 십여 년을 어머니 밑에서 제사 준비를 했고, 이제 우리 집에서 집안 제사를 모신지도 오 년이 지났다. 이십 년을 넘는 시간을 아내는 명절 제사, 집안 제사를 정성껏 모셔왔다. 게다가 결혼 후에는 명절에 친정 방문은 했지만 명절 당일 저녁에 방문이 최선이었다. 명절 전날 주방에서 음식 하느라 왁자지껄한 친정의 소음이 그리울 법하다. 그래서 난 그런 아내의 그리움을 올해부터는 조금 더 헤아리려 한다. 아마도 올해 추석은 아내에게 조금은 위로, 감사함, 고마움, 그리움의 반복된 교차로 같은 시간이지 않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