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배님, 전 도대체 아내가 이해가 안 됩니다. 저에게 고민을 얘기해서 전 정말 진지하게 아내의 얘길 듣고 조언을 했는데 아내가 오히려 더 화를 내더라고요. 아니 제가 뭘 잘못한 걸까요?'
후배와의 대화에서 과거 나를 볼 때가 많다. 나도 한때는 아내와의 대화에서 내 후배의 고민과 같이 이해를 못 했던 부분이 있었다. 분명히 내 도움이 필요해서 얘길 꺼냈는데 상황을 이해하고, 분석한 뒤 내 의견을 얘기하면 항상 아내는 무언가 불만이 가득한 얼굴로 입을 닫곤 했었다. 도대체 알고 당했으면 했지만 무슨 문제인지 알지 못하던 때였다.
'지금 모임에 갔다가 좀 황당한 경우가 있었어요. 제가 어울리는 세분 있잖아요. 그분 중에 한 분이...'
'음, 얘길 들어보니 영희 씨가 오해한 게 아닐까 싶어요. 그분의 의도가 정확히 영희 씨가 생각하는 그런 문제가 아닐 수도 있잖아요...'
이렇게 대화가 진행될 때면 어김없이 아내는 저기압이 되곤 했다. 주로 듣는 입장으로 바뀌고 대화대신 단답형의 대답만 돌아오는 일이 반복됐다. 처음엔 아내가 내 얘기를 듣고 그 상황에 대해 깊이 고민해 보는 게 아닐까 생각도 해봤다. 나름 주변 사람들보다 대화가 많은 부부라는데 뿌듯함까지 있었다. 하지만 그 대화 후에 돌아오는 냉랭함이 무언가 문제가 있음을 직감할 수 있게 했다.
어느 날 회사에서 속상한 일이 있어서 아내와 집 근처에서 술자리를 한 적이 있다. 난 밖에서 있었던 일을 밖에서 정리하고, 푸는 성격이 아니라 그날도 아내와 술 한잔을 하며 마음을 위로받으려고 했다. 술이 한잔, 두 잔 들어가며 내 입에서는 그날의 상처받았던 마음, 직장상사와의 감정싸움 그리고 내게 내려진 불이익 등을 허심탄회하게 털어놓았다.
'그러니까요. 내가 정말 답답해서... 내가 아니다 싶었는데. 본인이 지시를 잘못해 놓고 나한테 책임전가하고, 창피하게 다른 팀에 공식적으로 사과 메일 쓰라고... 이거 자기 새끼고, 식군데 너무 하는 거 아닌가요'
한 참을 내 얘길 조용히 듣던 아내가 빈 내 술잔에 잔을 채우고 입을 뗐다.
'오늘 그런 일이 있었군요. 당신 쓰린 마음은 충분히 이해가 되지만 오늘 일은 당신이 조금 더 생각해 봤으면 어떨까 싶은데요. 상사가 업무지시를 잘못했다고 해도 아니다 싶었으면 다시 확인도 했으면 어땠을까요. 그리고 자기 식구 감싸기보다는 다른 팀에 과실 인정하고, 빠른 업무 협조를 요청한 건 상사 생각이 맞는 것 같기도 하고요'
아내의 말이 틀린 건 아니었지만 그 말이 내겐 칼이 되어 살을 베고, 가슴을 후벼 파는 것 같았다. 위로가 필요할 땐 어김없이 내 말을 들어주고, 아파하면 위로의 말로 보듬던 아내가 오늘따라 너무 냉정해 보였다. 객관적인 판단과 상황 분석을 원한게 아니었는데 회사에서보다 집에서 더 상처받은 심정이었다. 취하던 술도 깨기 시작했고, 아내의 위로는 물 건너갔음을 알았다. 그저 한숨만 나왔지만 아내에게 화를 낼 수 없었다. 아내의 말이 틀리지 않음을 이미 잘 알고 있었기에.
그 일이 있고 난 후 난 아내와의 대화법을 바꾸려고 애썼다. 직장에서와 같이 이성적, 객관적, 빠른 상황판단, 분석 등을 활용하지 않고, 감정적, 주관적, 공감 능력, 이해를 기본으로 대화를 이어갔다. 주로 대화를 들었고, 아내의 입장에서 감정에 함께 동요했고, 아내와 같은 입장으로 공감하며, 아내의 감정을 이해하려 애썼다.
제일 믿고, 의지하는 사람에게 듣는 위로와 응원은 그 어떤 지지보다 힘이 된다. 반대로 믿고, 의지했던 사람에게 듣는 질책과 지적은 그 어떤 상처보다 크게 다가온다. 설사 잘못된 생각이나 오해에서 비롯되었다고 해도 그 상황에서 상처를 보듬고 치유한 후에 다시 얘기해도 충분하다. 오히려 스스로가 더 잘 아는 문제고 상황임에도 적어도 내 (남) 편에게 위로와 응원정도만큼은 바랬을 수도 있지 않을까.
많은 결혼한 남자들이 하는 실수다. 아내와의 대화에도 객관적, 상황판단이 필요한 일은 있겠지만 대화의 주제에 따라 이런 일이 필요할 수도 아닐 수도 있다. 가정 안팎으로 처리할 문제들이 있지만 아내의 얘기는 공감과 이해만으로도 충분할 때가 많다. 대화가 익숙하다면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을 때가 온다. 지금은 남편의 공감과 이해만으로도 아내와 대화가 충분한지 아니면 나의 상황판단, 객관화가 필요한 상황인지 이해하는데 말이다. 아내가 꺼내는 대화에 '그래', '힘들었겠네', '당신 말이 맞아' 하는 한마디 말로 충분할 때가 있다. 고개 끄덕이며 공감하는 것만으로도 큰 위로와 응원이 되곤 한다.
부부는 관계상 가장 가까운 무촌이다. 서로 관계 지어지지 않는 하나라는 의미로 정의할 수 있지 않을까. 부부는 일심동체라는 표현도 이래서 쓰이지 않았나 싶다. 부부는 서로 똑같은 생각은 아닐지라도 서로에게 공감하고, 그 생각을 존중하고, 서로를 배려하는 것에서 비롯된다. 내 남편, 아내의 동지는 내게도 동지이고, 반대로 적은 공공의 적이라는 마인드가 완벽한 내 편으로 가는 지름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