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모임에 나갔다가 조금 황당한 일을 겪었어요. 모임에 몇 번 나오지도 않았던 분인데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여러 번 말을 하게 해요. 몇 번을 설명하고, 알려줬는데도 그럴 땐 딴짓하다가 얘기 끝나면 여러 번 다시 물어요. 오늘도 똑같이 행동하시더니 하는 말이 '그냥 톡에 남겨요'라고 해서... 정말 할 말이 없더라고요'
'그 모임 꽤 오래 하는 동안 애착이 많을 텐데 운영진으로 영희 씨가 많이 힘들고, 답답하겠네요. 제가 가서 일 대일로 그분 상담이라도 할까요? 아님 협박이라도...'
일찍 퇴근한 날이면 저녁 식사를 하며 아내와의 대화가 일상이 됐습니다. '미주알, 고주알' 하루 일과를 서로 공유한 게 벌써 십여 년이 지났습니다. 서로의 하루를 얘기하다 보니 아내도 내가 하는 일에 대해 상세하진 않아도 어느 정도는 이해하고 있습니다. 당연히 저도 아내의 사생활까지 아주 많은 정보를 알게 됐습니다. 오죽하면 아내의 가까운 지인들은 '너 오늘 내가 얘기한건 니 남편한텐 얘기 말아'라고 할 정도입니다.
우리도 처음부터 대화가 일상이진 않았습니다. 30대 초만 해도 바쁜 회사일에 쫓겨 퇴근도 늦었고, 지친 몸으로 집안 일과 육아도 분담하다 보니 시간이 남으면 TV앞에 앉는 게 습관처럼 됐습니다. 물론 드라마를 좋아했던 것도 그런 습관을 부추기는데 한 몫했습니다. 일찍 오는 날도 아내와 내가 편하게 식사하는 건 쉽지 않았습니다. 큰 아이가 워낙 예민해서 저희가 편하게 밥 먹는 걸 두고 보지 않을 때가 많았습니다. 가끔 초저녁 잠이 들었을 땐 식사는 방해 없이 할 수 있었지만 아이가 깰까 봐 편하게 대화는 어려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이 목욕에, 설거지까지 끝내 놓으면 딱 미니시리즈 할 시간이다 보니 TV앞에 앉으면 한 시간은 꼼짝을 하지 않았습니다. TV를 뚫어져라 보며 옆에서 아내가 말을 걸어도 제대로 된 대꾸를 하지 못했습니다. 한 동안 이 문제로 아내와 감정 상하는 일이 종종 발생하기도 했습니다. 옆에서 아내가 얘기해도 아내의 얘기에 제대로 집중을 하지 않으니 당연히 대답은 무성의하게 나올 뿐이었습니다. 사실 전혀 들리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TV 보는 동안은 정말 누가 옆에서 부르는 정도로는 제 귀나 머리가 인지하긴 어려웠습니다.
하루는 아내와 마주 앉아 대화 중에 TV속으로 빠져들어간 적이 있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간 큰 남편이었던 것 같습니다. 당시엔 워낙 즐겨보던 드라마가 나오고 있어서 아내와의 대화에 집중하기가 어려웠습니다. 소리로 드라마 속 내용을 모두 이해하기란 쉽지 않았습니다. 아내 어깨너머로 브라운관이 보이기에 잠깐 한눈을 판다고 했던 게 완전히 몰입이 되어 버렸습니다. 아내는 한 창 얘기를 하고 있었지만 저는 어떤 리액션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 일이 있은 후 한 동안 아내는 내게 어떤 대화도 시작하지 않았고, 고작 내가 묻는 말 정도만 하루 대화의 전부였습니다. 의도한 바는 아니었지만 아차 큰일 났다 싶을 정도의 위기를 느꼈었던 것 같습니다.
그 후로는 즐겨보는 드라마보다 아내에게 더 집중하려 했습니다. 즐겨보는 드라마가 나와도 아내에게 먼저 말을 걸었고, TV로 시선을 하지 않고 아내를 보며 대화하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아내의 시큰둥한 반응도 있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노력한 만큼 부부 사이가 훨씬 가까워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때부터였던 것 같습니다. 상대방의 이야기를 가장 많이 들어주고, 자신의 이야기를 가장 많이 하는 사이가 됐습니다. 우린 그렇게 서로에게 가장 가까운 사람이 되었습니다. 가끔은 보고 싶은 드라마가 나올 땐 위기도 있었지만 아내도 이해해 주려고 애썼고, 저도 자제하려고 노력하면서 더욱 부부관계가 좋아진 것 같습니다.
'어, 어, 엄마~!!! 아빠 또 TV속에 들어갔어. 내가 옆에서 말했는데 대답도 안 해요'
'지수야, 아빠 몰라? 멀티가 안 되는 사람이야. 아빤 뭐든 한곳에 집중하면 그것밖에 안되니까 지금은 아빠 TV 보게 놔둬. 알았지?'
아내는 이제 내가 좋아하는 TV 드라마가 나올 때면 대화를 줄이려고 합니다. 당장 중요한 얘기가 아니면 드라마가 끝나고서 대화를 이어갑니다. 서로 노력해야지 좋아진다는 것을 알기에 내가 노력한 만큼 아내도 날 배려하고, 이해하려고 애쓰는 게 너무 감사합니다. 그렇게 해도 우리의 대화시간은 충분합니다. 앞으로도 30, 40년은 이렇게 대화를 이어갈 테니 우린 당장의 조바심이 필요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지금은 상대방을 배려하는 것만으로도 나를 존중하는 일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뿌린 대로 거둔다고 합니다. 아무리 가까운 부부라도 한 사람만의 희생으로는 긴 시간을 함께 하는 것은 무모한 도전과 같습니다. 손뼉도 마주쳐야 소리가 나듯이 부부간에도 많이 마주해야 사이가 더 좋아집니다. 작은 일이라도 고마움을 표현해 주고, 따뜻한 말 한마디에 인색하지 않으면 그걸로도 충분하지 않을까요.
결혼을 하면 후회라고 많은 기혼자들은 말합니다. 열렬히 사랑하던 연애 시절, 당장 며칠만 못 봐도 눈앞에 어른 데고, 보고 싶어 미쳐버릴 때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결혼하고 나서는 아내가 처가에 가는 날이면 온 세상을 얻은 것 같은 행복감을 얘기하는 선배들을 많이 봤습니다. 말 그대로 억눌렸던 규제에서부터 해방하는 날이라고 기뻐하더군요. 하지만 정작 하루, 이틀만 지나면 그런 해방감보다 잠시 비운 아내의 빈자리를 얘기합니다. 열렬하게 불타던 사랑은 사그라들었을지언정 서로에게 익숙해진 건 알지 못했던 무심함이었나 봅니다. 아마 자신도 모르게 누군가에게 스며든 게 아닌가 싶습니다.
사랑이란 감정은 '뜨겁게', '열렬하게'로 정리하기에는 너무도 복합적인 감정일 듯합니다. 백일도 안된 사랑과 30년이 지난 사랑은 표현부터가 다릅니다. 인정하지 않을지 모르겠지만 걱정하고, 마음 쓰이고, 생각나는 것만으로도 사랑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결혼하고 바뀐 건 상황입니다. 시간이 지나면 나이들뿐이지 사람이 사람을 좋아하는 감정은 그래로 일 수 있습니다. 사람은 변화하지만 감정은 진화한다는 생각입니다. 서툴던 자기감정표현에서, 세련되고, 근사한 감정표현으로 그리고 솔직하고, 진솔한 자기감정표현까지 변화해 갑니다. 저와 아내처럼 여러분의 사랑도 진화해 가는 게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