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11월은 늘 기대감을 준다. 어느덧 매년 이곳을 찾은 지도 8년째다. 코로나로 잠깐 쉼표도 찍었지만 내겐 마침표가 될 수 없는 이곳. 올 11월 첫째 주 일요일도 나의 힐링 포인트인 이곳을 찾았다. 올해도 작년에 처음 11월 여행의 멤버로 초대된 아내와 함께 새벽녘부터 비행기를 타려고 바삐 움직였다.
여행의 시작은 역시 예약부터다. 작년 여행 중에 이미 내년도 함께 하겠다는 아내의 확답으로 난 5월부터 비행기 티켓을 예매했다. 쌓여있던 마지막 마일리지를 탈탈 털어 제주도 왕복 티켓 예매를 했다. 그것도 무려 비즈니스 좌석으로. 이른 예매여서 그랬는지 좌석이 남아있었다.
그렇게 제주 여행의 시간은 조금씩 가까워져 갔다. 중간에 작은 돌출 변수들이 있어서 여행에 차질이 생길까 걱정도 됐지만 완벽하진 않지만 무사히 제주 여행 시작의 시간은 다가왔다.
늘 그렇지만 이틀간의 짧은 여행이라 난 아침 일찍 출발해 저녁 늦게나 돌아오는 짧고, 굵은 여행이다. 누가 들으면 제주까지 가서 이틀만 보내고 오는 것에 아쉽지 않겠냐고 하겠지만 나의 이틀은 다른 사람의 삼, 사일 일정에 버금가는 알차고, 힐링되는 여행이라 아쉬움은 없다. 다만 오늘도 이른 시간부터 분주한 아내에게 조금 미안할 뿐.
공항에 도착한 시간이 새벽 6시를 조금 넘었다. 아직은 여유 있는 시간이지만 마음만은 이미 여행지에 가 있다. 공항 검색대를 지나고 출발 게이트에 대기하며 잠시 대활 나누다 보니 어느새 탑승 비행기의 탑승수속을 시작했고, 길게 늘어선 줄에 서는 대신 아내와 난 비즈니스 좌석 탑승자라는 이유로 우선 탑승을 하는 행운을 누렸다. 비행기탑승 후넓은 좌석과 안락한 의자로 한 번 더 기분은 좋아졌고, 돌아오는 편은 좌석부족으로비즈니스석을 예매하지 못해 못내 아쉬웠다.
한 시간을 날아가 도착한 제주도. 간단하게 공항에서 아침 식사 후에 우린 여행의 첫 목적지인 공항에서 가까운 이호테우 해변을 찾았다. 공항에서 5Km 정도 거리에 있는 해수욕장으로 두 마리 말 등대가 이곳의 시그니처이자 사진촬영 스폿으로 유명하다.
공항에서 이동한 시간이 10시가 안 되었지만 내리쬐는 햇살에 절기로는 늦가을이고, 불과 몇 시간 전 김포에서 느낀 싸늘함을 잊게 하기에 충분했다. 11월을 망각하고, 이곳이 제주임을 다시 한번 상기시키기에 충분했다.
해변을 들어서니 탁 트인 제주바다가 너무도 시원했고, 함께 한 아내의 미소가 날 더 기분 좋게 했다. 잠깐이지만 각자의 포즈에 취해, 아름다운 제주 바다에 빠져 스마트폰의 셔터음은 연신 터졌다. 멀리 보이는 하얀색, 빨간색 등대가 이국적인 제주 향기를 더욱 물씬 풍겼다.
'영희 씨! 뭐해요. 뭐 하려고 모래 구덩이를 파고 그래요?'
모래 바닥에 쭈그리고 앉아 꼬챙이로 그림을 그리고, 혼자 무언가 파고 있는 아내에게 뭘 파냐고 물었다.
'철수 씨, 이리 와서 얼른 같이 파요.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요. 아니다. 뭐 팔만한 도구 좀 가져와요. 손으로만 파려니 힘드네'
파는 모양을 보니 그냥 구덩이가 아니고 하트모양의 구덩이였다. 난 깊이 손을 넣어 모래를 팠고, 아내는 파낸 흙으로 하트 모양이 무너지지 않게 다져나갔다. 그렇게 파내려 간 모래 구덩이의 깊이가 30센티를넘어섰다.
'영희 씨, 이제 그만 파도 되지 않을까요? 손을 뻗어 파내기 너무 힘들어요'
아내는 잠시 파낸 구멍을 보고, 스마트폰을 넣어보더니 날 보며 장난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아뇨, 아직 더 파야할 거 같아요. 좀 열심히 해봐요. (쓰읍~) 어서! 인생 사진 한 장 건져가면 좋잖아요'
결국 40센티를 넘게 구덩이 파고서야 작업이 끝났다. 아내의 소원대로 우린 생각지도 못한 인생사진(?)을 찍었고, 찍은 사진을 고스란히 가족 톡방에 올렸다.
'와우, 엄마 완전 엠지 샷이네. 너무 잘 나왔어요. 날씨도 너무 좋아 보이고. 즐거운 여행 보내세요'
여행 당일이 일요일이라 부대 휴일이었던 아들에게도 바로 답이 왔고, 이 말 한마디가 우리의 여행을 더욱 싱그럽게 했다.
잠시 근처 카페에 가 커피 한잔으로 땀을 식히고 우린 다시 이동했다. 두 번째 목적지는 제주시 내륙에 위치한 천왕사였다. 제주의 가을을 느낄 수 있는 몇 안 되는 단풍으로 유명한 곳이다. 아주 오래된 고찰은 아니지만 천아계곡을 둘러보기 어려울 듯해서 여행 전 미리 찜해놓은 곳이었다.
11시가 넘어서인지 천왕사 초입에는 삼삼오오 관광객들의 모습이 보였다. 한라산 근처라 천왕사를 오르는 택시 안에서부터 높게 솟은 나무들이 너무 시원해 보였다. 차에서 내렸을 때는 조금 전 더위는 온데간데없었고, 어느새 산속 차가워진 공기가 정신을 더욱 맑게 했다. 아내와 손을 맞잡고 걸어 올라가는 천왕사 초입에서는 지금까지 봐왔던 제주와는 또 다른 매력에 흠뻑 빠졌다.
여행 전날 태풍 영향으로 많은 비가 쏟아졌던 제주여서 그런지 계곡을 내려오는 물은 더욱 시원해 보였다. 주변 나무에는 어느새 단풍들이 형형색색 물들어 있었다. 한 시간 전 봤던 꽃들이 제주의 계절은 더디 간다 일러줬다면 지금의 단풍들은 제주도도 제대로 시간이 흘러가고 있음을 내게 알려주는 듯했다.
'좀 웃어봐요. 철수 씨'
'어떻게, 이렇게요? 히~!!! 아님 조금 더 밝게? 하하하~'
아내의 지시(?)에 따라 포즈도, 표정도 바꿔봤지만 늘 어색하고, 아내 성에 차지 않는 듯싶다.
'철수 씨, 내가 사진 찍는 연습 좀 하라고 했죠? 그렇게 너무 활짝 웃으면 좀 없어 보여서 싫어요. 인상 푸시고. 우리 철수 씨 내가 아르바이트해서 보톡스 좀 놔줘야겠어요. 팔자 주름이 너무 안 펴져'
아내와 이런 티격태격, 티키타카는 항상날 기분 좋게 한다. 마치 연애시절 둘만의 시간을 돌린 기분도 들고, 하루, 하루가 늘어가는 주름, 신체 변화를 걱정하는 마음도 와닿아서일 테다.
사찰을 오르는 내내 바위틈, 나무 사이사이에 낀 이끼를 만지고, 사진을 찍으며 좋아하는 모습에 덩달아 나도 힐링된다. 아내는 좋아하는 이끼를 찾아온 건 아니지만 오늘 찾은 이곳이 너무 마음에 든다는 말에, 아내와 함께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더 깊어졌다.
올라가는 길목에 사찰에 올릴 소원성취 초에도 불을 밝혀 두 아이 건강과 소원을 빌었다. 법당 안에 들어가 평소 빌지 않던 각자의 소원까지 빌고서야 우린 가을을 품은 천왕사에서 내려올 수 있었다.
2시가 다 되어가는 시간 배는 고팠지만 천왕사 앞에는 마땅히 식사를 할만한 식당이 없었고, 택시를 불러 오늘의 마지막 이동 장소로 이동했다. 그렇게 30킬로를 택시로 이동한 곳은 제주시 구좌읍에 위치한 메이즈랜드라는 미로공원이다. 특별히 미로를 좋아해서는 아니지만 나무가 많고, 산책할 만한 대지도 넓고, 특별히 가을꽃 축제가 있는 기간이라 이곳을 찾았다.
공원 앞에 있는 유일한 식당에서 허기를 채운 뒤 아내와 난 미로공원에 들어갔고, 공원 앞에서 우릴 맞은 노란색, 주황색, 보라색 국화꽃에 다시 전투력(?)이 상승했다. 일찍부터 움직였고, 반나절 걸은 걸음수만도 1만 6천보가 넘었던 터라 피곤할 만도 했지만 푸른 하늘과 예쁜 꽃 그리고 시원한 바람에 우린 다시 발을 뻗었다. 미로공원 안에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았고, 나무들도 빼곡해 방전된 체력 에너지가 다시 꽉 채워진 듯했다.
'철수 씨, 내 립스틱 어디 있죠? 철수 씨 가방에 있지 않아요?'
미로 안 조형물 앞에서 선 아내가 내게 말했다. 아내의 말대로 아내의 립스틱은 가방 바깥쪽 주머니에 있어서 어렵지 않게 꺼냈다. 내게 립스틱을 받아 든 아내는 자신의 손바닥 한쪽에 하트 모양으로 립스틱을 채웠고, 이내 내게 손을 달라면서 손을 내민다.
'어서 손 줘봐요. 나하고 이렇게 깍지 끼고 도장 찍듯이 꾹~ 알았죠? 한 번에 잘해야 해요'
아내의 말을 참 잘 듣는 남자인 난 한 치의 망설임 없이 아내의 말에 따랐고, 정말 찐(?)하게 손과 손을 맞잡고 도장을 꾹!!! 찍었다. 잡았던 손을 풀면서 아내는 금세 잘했다는 칭찬의 눈웃음을 지었고, 아내와 나의 노력의 결실을 눈으로, 사진으로 감상할 수 있었다.
'짜잔~~ 어때요? 잘 나왔죠. 아싸~ 또 엠지샷이네. 아들한테 자랑해야지'
신난 아내를 보며 이렇게 잘 놀았으니 '우리 영희 씨, 오늘 밤엔 정말 잘 자겠다' 싶었다.
아내와의 제주 1일 차 여행을 사진과 함께 기록해 봤어요. 작년에 이어 두 번째 아내와 함께 한 제주 여행이라 기대감도 만족감도 큰 하루였어요. 사실 작년 여행 때만 해도 조금 걱정했어요. 내 제주여행은 주로 많이 걷고, 조금은 지겨울 수도 있을 거 같아서요. 가족 여행과는 다른 테마거든요. 그래서 막상 작년 여행에 앞서 아내에게 부탁했던 게 제주 여행 때는 조금 불편하더라도, 불만이 생기더라도 여행 중에는 얘기하지 말아 달라는 거였어요. 다행히 아내는 내 부탁을 잘 들어줬고, 오히려 제주여행에 만족도도 컸다고 했어요.
막상 함께 다니면서도 아내의 행복한 모습을 보니 혼자 여행과는 또 다른 행복, 힐링이 되더라고요. 그래서 올해도 아내와 함께 제주를 찾았어요. 원래 아내와 함께 하기를 좋아하는 저지만 아내가 좋아하니 더 같이 가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렇게 우린 이번 여행도 함께 했고, 이틀간의 여행도 너무 행복하게 흘러간 것 같아요. 다만 작년과 다르다면 한 살을 더 먹었더니 여행 후 여독이 쉬이 풀리지 않더라고요.
이번 주와 다음 주는 아내와의 제주 여행 이틀에 대한 기록으로 채울 생각입니다. 앞으로도 매년 11월을 기다리며 과거 행복했던 제주 여행을 한편씩, 한편씩 글을 묶어보는 것도 나이 들어 재미가 있을 것 같네요. 그럼 다음 주 연재도 기대해 주세요.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