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9화, 다섯 개의 빛

운명, 다섯 걸음으로부터 오다.

by 추억바라기

인적이 드문 도시 외곽. 잡초가 우거진 울타리 너머로 폐허가 된 놀이동산이 모습을 드러냈다. 한때는 아이들의 웃음소리와 밝은 불빛으로 가득했던 그곳이 이제는 녹슨 회전목마가 멈춘 채 삐걱거리고, 신체 일부가 찢겨나간 인형탈들이 흉물스럽게 굴러다닐 뿐이었다. 흉물스럽게 부서진 안내 데스크는 반쯤 무너져 있었고, 기념품샵의 유리창은 날카로운 파편만 남긴 채 흔적만 남아 있었다. 시간조차 이곳을 외면한 듯 무거운 정적만이 공간을 채웠다.

하지만 지금 이런 침묵을 깨우며 한창 싸움이 벌어지고 있었다. 붉은 기운이 지면을 핥듯이 일렁이고, 누군가의 비명이 철제 놀이기구의 골조를 타고 메아리쳤다. 금이 간 바닥 틈 사이로 기이한 문양이 번져나갔고, 하늘에는 수만 마리 찌르레기 떼처럼 정체를 알 수 없는 검은 물체가 무리 지어 소용돌이쳤다.


“미란, 왼쪽이잖아! 왼쪽!!!”

“알아! 안다고. 내 눈알 두 개가 장식인 줄 아냐?”

미란은 손에 든 구마검을 휘둘러 이계에서 튀어나온 비틀린 팔처럼 생긴 촉수를 잘라냈다. 그 순간 뒤편에서 검은 연기처럼 피어오른 이계의 그림자가 준우를 향해 돌진했다.

준우는 본능적으로 손을 뻗었다. 그의 주먹에 푸른빛의 결기가 휘감겼고, 그 에너지는 허공을 찢으며 앞으로 돌진했다. 그러나 그 존재는 준우의 공격을 그대로 삼켜버렸다.

“이 녀석 보통이 아닌데. 아무리 제대로 자세를 잡진 않았다고 해도 그래도 3할 이상의 힘인데…!”

“아무래도 결계가 흔들려 봉인이 느슨해진 탓이야. 봉인의 틈이 열리고 있어.” 미란이 이를 악물었다.

그때였다.

‘짤랑’.

어디선가 풍경소리처럼 맑고 고요한 울림이 공간을 가로질렀다. 어떤 소리도 들릴 것 같지 않은 폐허 속에서 그 소리는 마치 다른 세계의 숨결처럼 이질적이었다. 바람이 멈추고, 어둠이 한순간 숨을 죽였다.

그때 허공이 갈라지듯 찢기며 한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산처럼 묵직한 기운을 두른 승려였다. 짙은 회색 장삼에 그을린 얼굴, 깊게 팬 주름마다 세월의 흔적이 배어 있었지만 눈빛만큼은 번개처럼 날카로웠다.

그는 자인선사 유진이었다.

세상과 등을 지고 이십여 년이 넘는 시간을 악귀와 맞서 온 중년의 퇴마승이었다. 그의 발아래로 억눌린 나쁜 기운이 순간 움찔했고, 부서진 회전목마 너머에서 검붉은 실들이 꿈틀거렸다.

“이계의 존재여! 현세에 존재하지 말아야 할 그대들에게 고한다”

미란과 준우가 고개를 돌렸을 때 유진은 이미 염주를 양손에 들고 있었다. 그의 입에서 빠르게 금강경이 흘러나왔고, 염주에서 금빛 파동이 일렁이며 이계의 존재를 옭아맸다.

“불안정한 감정의 기운으로 태어난 존재들은 다시 존재해야 할 이계로 돌아가라.”

지금 바로 작가의 멤버십 구독자가 되어
멤버십 특별 연재 콘텐츠를 모두 만나 보세요.

brunch membership
추억바라기작가님의 멤버십을 시작해 보세요!

따뜻한 일상과 행복한 생각을 브런치에 담고 있어요. 주로 위로와 공감되는 에세이를 쓰며, 좋아하는 소설책을 읽으며, 직접 소설을 쓰고 있어요.

2,648 구독자

오직 멤버십 구독자만 볼 수 있는,
이 작가의 특별 연재 콘텐츠

  • 총 17개의 혜택 콘텐츠
최신 발행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