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인의 짝사랑과 에레스 뚜

“내 가슴이 텅 비어 있는 거 같아요”

by 이안

서울 평창동에서 솔로 생활을 시작하고 나서, 미니시리즈 따위의 영상 콘텐츠를 보는 시간이 늘어가고 있다. 지난달에는 넷플릭스에서 요즘 가장 핫하다는 [퀸스 겜빗(Queen’s Gambit)](천재 체스 소녀가 미국에 이어 러시아 체스계까지 재패하는 과정을 흥미진진하게 그린 드라마)을 무척이나 재미있게 봤었다. [퀸스 겜빗]을 통해서 미드 보는 재미에 다시 불이 붙고 나니까, 20년 전쯤에 아내와 함께 즐겨 봤던 [그레이 아나토미]도 한번 더 정주행 했다.


그리고 이미 두 번쯤 정주행 했음에도 이번 주부터 다시 [로마(ROME 1-2)]를 보기 시작했다. 카이사르의 갈리아(지금의 북부 이탈리아와, 남부 프랑스, 그리고 벨기에 지역) 원정기부터 시작하는 이 드라마는, 카이사르가 살았던 시대의 로마의 모습과 정치인들의 암투, 그리고 연인들의 격정적인 사랑을 밀도 있고 치밀하게 그려낸 웰메이드 드라마이다.

특히 그 시대를 온몸으로 부딪히며 살았던 두 주인공, 루시우스 보레누스(불패의 로마 13군단 백부장)와, 자유로운 영혼의 악동(?) 타이투스 풀로의 이야기가 상당히 몰입감 있게 전개되는 드라마이다.

20여 년 전쯤에 국내에서 큰 인기를 모았던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도 그렇지만, 로마제국의 역사는 흥미로운 요소를 많이 갖고 있다. 영국의 위대한 역사가 에디워드 기번의 [로마제국 쇠망사]나, 독일의 역사가 테오도르 몸젠의 [로마의 역사]가 전 세계인으로부터 그토록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이유도, 로마 역사가 들려주는 역동성과 흥미로운 영웅들의 이야기, 그리고 일반 로마인들의 삶을 통해서는 시대를 초월한 공감대를 전해주기 때문일 거다.


<전 세계적으로 큰 인기를 끌었던 HBO의 미니 시리즈 [ROME]의 포스터. 하지만 이 시리즈 물은 막대한 제작비 때문에 시즌 2에서 멈춰야 했다>


그럼 로마를 다룬 TV 시리즈물은 왜 이토록 우리들의 관심을 끌까?

필자가 생각하기에는 세 가지 요인이 있다.


1. 로마의 역사는 왕정에서 공화정, 그리고 다시 황제가 다스리는 로마제국으로 이어지면서 기원전 8세기부터, 476년에 서로마 제국이 멸망하기까지의 1200여 년의 세월 동안, 지금까지 인류가 만들어 낸 정치체계의 거의 모든 형태를 이미 만들어 실제로 운영했다. 특히 카이사르의 등장과 귀족을 중심으로 한 공화정 세력의 대립, 그리고 그로 인한 카이사르의 드라마틱한 죽음을 살펴보면, 300명의 원로원이 다스리는 공화정을 지지하는 세력과 황제가 다스리는 왕정을 세우려 했던 정치 세력 간에 철학과 신념의 대립, 그 사이에서 벌이지는 정치적 암투는, 프랑스 대혁명 직전 프랑스에서 나타났던 정치상황과도 많은 점이 닮아있다. 이처럼 로마인은 이미 2,000년 전에 정치체계와 관련해서 인류가 향후 시도하게 될 실험을 이미 다 해낸 것이다.


2. 로마에는 다양한 인종이 함께 거주하면서 상당히 역동적이면서 다양한 문화가 공존했다. 이에 따라 거대 제국의 세계 도시에 걸맞은 화려하고 풍성한 볼거리를 보여 줄 수 있다. 로마의 거대한 힘과 지혜는 특히 건축기술에서 많이 드러나는데 지금도 이탈리아 로마를 방문하면 감상할 수 있는 유서 깊은 문화재를 비롯해서, 2,000년 전에 유럽 전역으로 신선한 물을 실어 나르기 위해서 건설한 수도교는 아직도 유럽 곳곳에 남아 그 위용을 자랑하고 있다.


또한 카이사르가 저술한 [갈리아 원정기]에도 잘 설명되어 있지만, 30만이 넘는 갈리아 전사들에 맞서서 5만의 로마군이 승리할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이유도, 난공불락의 요새였던 알레시아를 포위하는 성벽을 로마인의 뛰어난 건축술로 한 달 만에 뚝딱 구축함으로써, 지정학정 불리함을 극복했던 카이사르의 천재적인 전략이 중요한 요인이었다.


<2000년이 지난 지금도 건재한 로마의 수도교. 수도교는 상하수도를 받치기 위해 가설한 다리를 말한다. 로마시대에는 영토 확장과 함께 인구가 늘어나면서 물 사용량이 급격히 늘어나자 근처 산들로부터 물을 끌어오기 위한 수로(水路)를 건설하였다. 수로는 협곡이나 계곡을 통과해야 했으므로 수로를 떠받치는 수도교가 건설되었다. 사진. 스페인 세고비아의 수도교>

3. 로마 시대를 살아갔던 사람들의 자유분방하고 자극적이며, 때론 타락한 사랑이 인간 내면의 본능을 적나라게 하게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로마 시대에는 근친상간을 비롯해서 동성애, 주인의 노예들에 대한 성적 학대뿐만 아니라, 결혼을 한 남녀가 정부(情夫)를 두는 것도 자주 있는 일이었기 때문에, 인간 내면의 성적 욕망과 다양한 사랑의 형태에 관해서 이후의 인류가 보여주는 거의 모든 것을 이미 보여주었다.


이와 같은 사회적, 정치적, 문화적 배경을 기초로 때로는 즐겁고, 때로는 무시무시한 상상력을 자극하는 드라마 [로마]의 시즌 1-2에는 시청자들을 중독에 가까운 매력으로 끌어 모으는 힘이 있다. 그중에서도 필자의 마음을 흔들었던 장면 중의 하나는 바람둥이이자, 불쌍한 짝 사랑꾼이었던 타이투스 풀로의 슬픈 사랑이야기이다.

불패의 13 연단에서 가장 용맹한 병사 중 한 명이었던 풀로는, 그가 생명을 구해준 여자 노예의 아름다움에 반해 그만 사랑에 빠져버린다. 그리고 상관 보레누스에게 이렇게 말한다.


“나는 지난 6개월 동안 너무도 슬펐어요. 마음이 텅 비어 있는 거 같았어요. 지금까지 그 이유를 몰랐는데, 알게 되었어요. 저는 제 여자 노예를 사랑해요. 그녀를 노예에서 해방시켜주고 그녀와 결혼할 거예요”


풀로는 결국 큰돈을 빌려 아름다운 여자 노예를 해방시켜주고, 한 번도 웃지 않던 노예는 아름다운 미소를 보여준다. 폴로에게는 세상에 태어나서 가장 행복한 날이었다. 이어서 풀로는 그녀에게 프로 로즈를 하려고 하는데 뜻밖에도 한 남자 노예가 나타나더니,


“주인님 감사합니다. 제 약혼녀를 해방해주셔서요. 우린 결혼할 사이랍니다.”

라고 말하고, 절망한 풀로는 순간적인 분노로 그 남자 노예를 때려죽이고 만다.


이로 인해서 풀로는 그토록 사랑하는 여인과 상관이자 단짝 친구였던 보레누스마저 잃게 된다. 한 노예 여인을 사랑했던 과격하지만 순진했고 무식한 듯 하지만 소중한 동지들에게 늘 진솔했던 한 남자의 사랑과 삶이 무너지는 순간이다.


이 장면을 보면 2,000년 전, 위대한 제국 로마에서나 현시점 서울 평창동에서나, 짝사랑하는 사내들의 가슴에 흐르는 애절함은 변함이 없는 듯하다. 로마시대가 성적으로 문란하고, 사랑을 돈으로 거래하면서 순수한 사랑을 부패시켰고, 귀족과 평민 간의 뛰어넘을 수 없는 신분의 격차는 사랑을 가로막기도 했지만, 사랑의 본질적인 순수한 정신은 어느 시대에나 도도히 흐르고 있었던 것이다.


드라마 [로마]에서는 또한, 로마인들이 조국 로마를 얼마나 뜨겁게 사랑했는 가에 관한 장면도 자주 나오는데, 루비콘 강을 건넌 카이사르에게 겁을 먹고 로마를 버리고 도망갔던 정치인들은, 죄책감에서 다시 로마의 공화정을 지키기 위해서 목숨을 걸고 싸우다가 최후에 비장한 자결을 한다. 로마에 대한 그들의 사랑과 스스로의 명예에 대한 자부심을 비장미 있게 그려내고 있다.


피터팬 PD의 음악 칼럼 <음악이 흐르는 풍경>에서 오늘 듣고 싶은 노래는, 조국에 대한 사랑을 노래한 곡, [에레스 뚜(스페인어: Eres tú) : 당신은]이다. 이 노래는 1973년에 스페인의 악단인 모세다데스(Mocedades)가 부른 스페인어 곡인데, 가사는 당시 스페인의 민주주의를 말살했던 프랑코 독재 군부에 저항하는 뜻을 담고 있다. [에레스 뚜]는 1973년에 유로비전 송 콘테스트에 출품되었고, 1974년에는 미국 빌보드 차트에 9위로 랭크되면서, 빌보드 10위권 안에 진입한 몇 안 되는 스페인어 노래 중 하나가 되기도 했다.


Como una promesa, eres tu', eres tu'.

꼬모 우나 쁘로메사 에레스 뚜, 에레스 뚜

Como una man~ana de verano.

꼬모 우나 마냐나 데 베라노

Como una sonrisa, eres tu', eres tu'.

꼬모 우나 손리사 에레스 뚜 에레스 뚜

Asi', asi', eres tu'.

아씨 아씨 에레스 뚜


하나의 약속 같은, 그대는 그런 사람

여름날의 아침 같은, 그대는 그런 사람

하나의 미소 같은, 그대는 그런 사람

그래, 그래, 그대는 그런 사람

- 스페인 저항 노래 <에레스 뚜> 가사 중에서-

아름답고 서정적인 멜로디 때문에 가사 속의 ‘당신’을 사랑하는 연인으로 해석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스페인 청년들은 당시에 독재정권에 항거하는 뜻으로 이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 비록 프랑코 독재 군부의 통치로 스페인의 자유가 침탈당한 상태이지만, 언젠가는 아름다운 조국 스페인을 되찾을 거라는 그리움이 담긴 노래라고 할 수 있겠다.


애절한 마음으로 짝사랑하는 사람을 그리워하면서, 혹은 스스로의 명예와 사랑하는 조국을 생각하면서 다시 듣고 싶은 곡이다.



https://youtu.be/JUQnlXsISvg


<1973년 유로비전 송 콘테스트에 참가했던 스페인의 악단 모세다세스가 [에레스 뚜]를 부르는 영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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