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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안 May 15. 2021

헤매는 것은 훈련을 필요로 한다.

-나침반 / 이적 -

“헤매는 것은 훈련을 필요로 한다.
헤매는 사람에게 거리의 이름들이 마치 마른 잔가지들이 뚝 부러지는 소리처럼 들려오고,
움푹 패인 산의 분지처럼 시내의 골목들이 그에게 하루의 시간 변화를 분명히 알려줄 정도가 되어야 도시를 헤맨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기술을 나는 늦게 배웠다.”                                
                    
  -[1900년경 베를린의 유년시절] / 발터 벤야민-      

    

독일 출신의 유대계 언어철학자이자, 20세기 최고의 비평가 중 한 사람으로 일컬어졌던 발터 벤야민은 그의 저서에서 ‘헤맨다는 기술’을 늦게 배웠다고 적었다. 벤야민의 글에서 알 수 있듯이 “헤매기의 기술” 이란 것은, 헤매는 것에 충분히 익숙해지고, 자신이 어디에서 어떻게 헤매고 있는지 잘 알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벤야민이 표현한 ‘헤매기의 기술’이라는 것은, 마치 “소리 없는 아우성”처럼 모순 형용이다. 헤매기의 기술이 어느 정도 완성되면, 헤매기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기 때문에, 그 기술이란 건, 더 이상 헤매기도 또는 그 어떠한 기술도 아닌 게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도서출판 길에서 야심 차게 펴내고 있는 발터 벤야민 선집은, 국내 독자들의 현대 철학 연구에 관한 지평을 넓혀줄 수 있을 거라고 확신한다. >

 

낮 기온이 30도를 육박하고 여름이 일찍 와버렸다고 투덜대던 금요일을 뒤로하고 주말엔 비가 내린다. 비가 내리면서 기온을 뚝 떨어뜨려 버렸다. 비가 올 것처럼 밤의 구름과 밤의 공기가 끄물끄물 대던 금요일 밤에 나는 헤매었다. 세븐 일레븐에서 산 스텔라 아루투아 5병을 동네 입구 계단에 앉아 마시면서 비가 내릴 것 같은 밤의 공기를 흡입하고 있었다.      


나치 정권으로부터 탈출하는 게 좌절되자 유대인 벤야민은 스페인에서 48세에 자결을 했는데, 스스로 밝힌 ‘늦게 터득했다’는 헤매기의 기술은, 이미 베를린의 유년시절에 깨우쳤다. 베를린 중심에 자리 잡은 티어 가르덴이라는 공원을 헤매던 어린 시절에 터득해 버렸다.    

  

나는 올해로 쉰세 살이 되었지만 헤매기에 기술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지 않고 살아왔다. 헤매기의 기술을 터득해버려서 헤매기로부터 벗어나는 게 두려웠기 때문이다. 헤매기에서 벗어나게 된다면, 헤매기의 원인 제공자였던 실연의 아픔, 혹은 절절한 사랑의 연인이었던 그녀를 아예 지워야 하는 건 아닌가 두려웠기 때문이다.      


목요일에 친한 방송국 PD 후배로부터 연락이 왔다.      


후배 PD : 선배 이 사람 한번 만나봐, 언제까지 그렇게 시름시름 앓으면서 살래?
피터팬 : 누군데?
후배 PD : 내가 아는 언니인데 좋은 사람이야, 나이는 선배보다 네 살이 많지만... 어때? 괜찮지?    

 

후배가 보내준 사진 속 여인은 나보다 연상이라고는 믿기지 않게 젊어 보였고, 후배 말로는 우리나라 금융계에서 제법 힘 좀 쓰는 위치에 있고 재산도 많다고 했다.      


피터팬 : 사랑하는 동생아~ 금융계에서 잘 나가는 사람이 나 같은 가난뱅이 실업자를 만나겠니?
후배 PD : 아니야 피터팬처럼 철은 없지만 영혼이 맑은 선배 같은 남자를 좋아한대!
그러니까 꼭 만나봐 알았지? 내가 선배 생각해서 정말 어렵게 자리 만든 거야~     


후배가 보내준 연상의 그분 사진을 오랫동안 들여다봤다. 미인이었지만 내 이상형은 아니었다. 

내 주위에 실제 하는 사람 중에 피터팬의 이상형이었던 사람은, 나와 이혼한 아내 외에는 아직까지 없었다.

아내는 빼어난 미인이자 피터팬이 오랜 기간 꿈꿔온 이상형이었다.      


MBC 라디에서 내가 [배철수의 음악캠프]의 연출을 하던 2001년에, 아내는 [김원희의 정오의 희망곡]의 작가였는데, 두 프로그램의 주말 방송 녹음 시간이 항상 같았다. 그래서 나는 아내가 멀리 내어다 보이는 여의도 MBC 라디오본부 7층에 위치한 [3 스튜디오]에 앉아서 아내를 흠모하는 마음으로 바라보았고, 아내는 복도 맞은편 [8 스튜디오]에서 DJ이자 탤런트인 김원희 씨와 무언가 재미있는 얘기를 나누곤 했었다.   


<피터팬 PD를 아내와 연결해 주었던 MBC 라디오 / 국내 최장수 팝 전문 방송 [배철수 음악캠프]를 진행 중인 배철수 DJ >


물론 당시의 아내는 나의 존재도 모르던 시절이었고, 나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내가 33년간 찾아온 이상형의 여인이 복도 건너편에 앉아 웃고 있네’라고 생각하곤 했었다. 가끔 배철수 선배에게


“저기 [정오의 희망곡] 녹음 스튜디오에 앉아 있는, 저 작가 예쁘지 않아요?”


라고 물었었는데, 철수 선배는 항상 그렇듯 짧게 ‘응’ 하고 한마디 하곤, 다음에 플레이할 CD를 고르곤 했었다.     


그렇게 좋아하다 결국 결혼까지 했던 아내와 이혼을 한 작년 봄 이후 피터팬은 아직도 여전히 헤매고 있다.

그렇다고 헤매기를 멈추고 싶은 마음이 생기지도 않는다. 헤매는 시간이 아무리 고통스럽고 괴롭더라도 헤매기의 기술을 다 익혀서 헤매기를 멈추게 된다면 아마도 내 가슴속에서 가장 숭고했던 '결코 잊을 수 없는 한 시절에 관한 기억'이 다 사라지게 될 것만 같았다.   


오히려 손에 잡히지 않는다는 걸 잘 알면서도, 잡을 수 있고 믿는 착각이, 되돌릴 수 없으면서도 다시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고 믿는 어리석음의 시간들이 더 좋았다. 나를 걱정해주는 친구들과 선후배들에게 걱정을 끼치고, 지인들의 친구분들에게 까지 민폐를 끼치는 상황이 1년을 넘어가고 있다. 어쩌면 이 모든 것도 헤매기의 기술을 터득하지 못한 나의 어리석음 때문이리라.     


후배가 보내준 사진과 연락처를 한참 들여다보다가, 그 연상의 분께 문자를 보냈다.                          

- 피터팬 :좋아하는 후배가 갑자기 제안을 해서 엉겁결에 승낙을 해버렸지만 아무래도 저는 아직 누군가를 만나기엔 용기가 없어요. 죄송합니다. 많이 결례가 된 듯합니다.

- 소개팅 여 : 네 알겠어요. 그렇게 해요.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요즘 부쩍 새벽 어스름을 보고 나서야 잠이 든다. 

나름 핑계는 있다. 나의 작은 침실 맞은편 궁궐처럼 높은 평창동의 고급 빌라의 창가에서 비춰 나오는 불빛에 눈이 부시다는 거였다. 하지만 이 역시 억지를 부리는 거였다. 내 창문에 걸린 커튼을 치면 해결되는 일이였지만, 커튼을 치지 않고 나를 침대에서 계속 뒤척이게 내버려 두었다.

     

때론 옆집 빌라에서 쏟아지는 불빛들이, 중3 여름방학 때 할머니 집에 들러서 감탄하면서 바라봤던 은하수일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했다. 당시에 전남 담양 할머니 집에서 살고 있던 나의 사촌형제들은, 나를 칠흑같이 어두운 시골길로 데리고 다니면서, 컹컹대는 개 짖는 소리도, 밤하늘을 불꽃처럼 수놓았던 은하수도 구경시켜 주었다. 나는 사촌들의 뒤를 따라서 한 치 앞도 안 보이는 밭의 이랑과 고랑 그리고 울퉁불퉁거리던 시골길을 헤매고 다녔다. 행복한 헤매임이었다. 밤새 은하수를 붙잡으러 다니는 헤매임이었으니까.      


<25년 전 필자의 인도 여행 중에 돌아가셨던 할머니 댁에 다시 들르면 그 시절의 은하수 꿈을 다시 꿀 수 있을까?>


어린 시절의 그 밤길 속 헤매임에는 길잡이 동무들이라도 있었지만, 나이 50세에 이혼을 하고 혼자 살고 있는 중년 돌싱남의 헤매임에는 어두운 밤길에서 손을 잡아주던 동무들도 없고, 더이상 헤매임이 설레지도 않다. 그저 헤매임에서 벗어나게 된다면 그동안 살아온 내 존재를 부정하게 될 듯만 하여, 몇 걸음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봄밤의 헤매임이 길어졌던 오늘, <음악이 흐르는 풍경>에서 듣고 싶은 노래는 이적의 [나침반]이다.   

   

아직 내겐 너라는 선물이 있으니까

아직 이 황량한 세상 속에

너는 내 곁에 있어주니까

어지러웠던 하루하루가

먹구름처럼 내 앞을 가로막아도

너의 눈빛이

마치 꼭 나침반처럼

내 갈 길 일러주고 있으니                       - 나침반 / 이적 -


필자가 이적을 처음으로 만난 때는 1997년 가을이었다. 전설의 별밤지기 이문세 선배님이 하차를 하자, MBC 라디에서 후임 별밤지기로 [패닉]의 이적을 기용했었기 때문이다.


당시에 별밤은 주 5일, 매일 2시간씩 생방송을 했기 때문에 이적을 주 5일 볼 수 있었는데, 매일 가까이에서 지켜봤지만, 노래 [달팽이]로 가요계에 신선한 충격을 몰고 왔던 서울대 사회학과를 휴학한 이 젊은 청년이  지금처럼 대성하게 될 줄을 꿈에도 몰랐었다.


가까에서 지켜본 이적은 뭐랄까, 많이 예민하고 때론 소심하기도 해서 1~2집 정도의 앨범을 내고 다시 학교로 돌아가서 공부를 계속 하지 않을까 생각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음악 천재 이적은 이후에도 꾸준히 불후의 명곡들을 발표했고, 지금은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남자가수의 위치에 올라 고, 그의 주옥같은 노래들은 전 세대에 걸쳐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뮤지션 이적의 위대함은 그가 쓰는 아름다운 멜로디에도 있지만, 무엇보다 삶을 깊이 있게 통찰하는 가사가 받쳐주는 힘이 크다고 피터팬 음악 PD는 생각한다. 2017년 겨울에, 이적의 미니앨범을 통해서 발표된 [나침반] 역시,
필자의 최애곡 중 하나이다.    

"아직 내겐, 너라는 선물이 있으니까"

이 짧은 한 구절의 가사를 통해 얼마나 많은 상심한 청춘들이 힘을 내었던가?


< 흔적(痕迹)이라는 제목으로 2017년 12월에 발매된 이적의 미니앨범. 총 3곡이 수록되어 있었는데, 타이틀 곡이었던 [나침반]은 특히 많은 사랑을 받았다. >


이번 주말에 내린 봄비가 그치고 나면,

다시 온도가 오르고 여름이 올 것이다.

봄밤의 낭만 같은 건,

저 먼 기억 속으로 사라질 것이다.

여름이 오면 봄을 보내야 하듯이 피터팬도 언젠가는 헤매임의 시간을 멈춰야 할 것이다.

그럼, 그 시절의 소중한 추억들은, 지나간 시간들에게 다시 되돌려줘야 할지도 모르겠다.


피터팬에게 '헤매임의 기술'을 터득하게 해 줄, [나침반]은 어디쯤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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