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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안 Jan 22. 2022

소설가 P가 읽는 시.

-먼 훗날 그때에 니젓노라-

오늘도 소설가 P는 김소월의 시를 뒤적인다.      


먼 훗날 당신이 찾으시면 / 그때에 내 말이 잊었노라

당신이 속으로 나무라면 / 무척 그리다가 잊었노라

그래도 당신이 나무라면 / 믿기지 않아서 잊었노라

오늘도 어제도 아니 잊고 / 먼 훗날 그때에 '잊었노라

-먼 후일 / 김소월-     


조선 민주주의 인민 공화국의 시인이자 소설가였던 백석의 시, 그 유명한 구절로 시작하는 시,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 오늘 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한국 현대 문학에서 가장 유명한 시구절 중의 하나가 된, 백석의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를 소설가 P는 눈 나리는 서울의 겨울밤에 하얗게 얼은 창유리에 호호 입김을 불어대며 읽는다.


가난하다고 해서 외로움을 모르겠는가

너와 헤어져 돌아오는 눈 쌓인 골목길에

새파랗게 달빛이 쏟아지는 데

가난하다고 해서 두려움이 없겠는가

                   (... 중략...) – 가난한 사랑 노래 / 신경림-     

     

성에 낀 유리창 사이로 비추는 차디찬 달빛이 따뜻한 입김을 이지러뜨리고 창유리의 무늬들이 쩡 소리를 낼 때면, 소설가 P는 다시 한 권의 시집을 꺼내어 신경림의 [가난한 사랑 노래]를 읽는다. 시를 읽으며 작년 이맘때 통영에서 보냈던 겨울을 생각한다. 백석을 생각하고, 백석이 짝사랑했던 아름답던 나타샤를 떠올려 보고, 가난을 생각하고, 먼 훗날 그때에 잊을 그녀를 생각했던, 통영의 겨울을 생각한다.          


엊그제 눈이 내렸다.

세상 모든 위대한 시인들의 그리웁던 옛사랑을 떠오르게 하는 겨울밤의 눈이 내렸다.

그리하여 가난한 소설가 P도 가난과 사랑과 못 잊을 사랑에 대해서 생각했다.

제주에서 1년을 겨우 버텨내고 서울로 올라와서 낯선 평창동 월세집의 좁은 골목 사진을 보내줬을 때, 이국의 도시에서 함께 보냈던 아름다운 밤거리 같다고 답신을 해주었던,

하지만 우리의 사랑은 여기 까지라던 그날의 서늘한 그녀를 떠올렸다.      


그쳤던 눈이 다시 나리면 좋겠다.

그때는 백석이나 신경림처럼 가난한 사랑 노래를 부르지는 않겠다.

김소월처럼 멋 훗날 그때에 그녀를 잊어보리라.


<눈 내리는 평창동의 겨울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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